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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88)화 (88/120)

# 87화

“응.”

망설임 없이 선뜻 대답하자 뮌제는 단번에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라파엘……. 나를 너무 착하게 보는 것 같은데…….”

“넌 다정해, 뮈즈.”

뮌제가 부정해도, 온느발레의 모든 귀족이 부정해도, 진실로 라파엘은 뮌제가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도 결코 구하지 못할 거리에 있다면 그녀는 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구할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그녀는 달려든다. 위험에 처한 자의 신분이 어떻든.

구하려거든 그녀가 중상을 당해야 할 일 같다면 그녀는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경상만으로 끝날 일 같다면 그녀는 나선다. 위험에 처한 자의 신분이 어떻든.

중상을 예상했을 텐데도 달려든 일은 윌리엄을 감싸고 대신 칼을 맞았을 때의 일뿐이었다.

그래서 온느발레인들은 뮌제 로헤올 공작을 좋아했다. 다른 어지간한 고위 귀족들에게서는 바라지 못하는 희생과 다정함이기에.

평민을 위해 손으로 칼날을 잡는 공작이라니 세상에 그런 기적이 있나 한다.

직접 몸으로 뛰며 마법사들을 막아 주는 공작이라니 세상에 이런 감사한 분이 있나 한다.

온느발레의 방패라 하는 지칭은 본디 평민들의 그런 지지로부터 나왔다.

평민들에게 뮌제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라파엘이 겪은 뮌제 역시 그러했다. 그녀가 때때로 도덕심을 모르는 듯 보일 만큼 냉혹한 정치가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뮌제는 기본적으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뮌제는 계속 부정했다.

“글쎄. 네가 나를 좋게 봐서 그래. 황제가 아는 나는 아리오의 왕이 공격당한다고 나설 사람이 아니야.”

“…….”

“황제가 설마 실로 왕을 죽이려 했을까. 그거 아닌 거 알잖아. 황제는 내가 막을지를 보려 했을 거야. 막지 않기를 원했겠지. 왕을 구하지 않기를 바랐을 거야. 황제가 아는 나는 왕 대신 다칠 사람이 아니고, 만약 왕을 대신하여 다친다면 그건 내가 왕에게 의미를 두고 있다는 뜻이니까.”

“…….”

“그저 그뿐이고, 나는 황제가 분노하길 원해서 왕 대신 다친 거야. 라파엘. 난 그런 공격, 내가 다치면서까지 막을 사람이 아니야.”

“네가 보기에 왕이 다치는 게 필요했다면 넌 막지 않았겠지. 왕이 다치도록 두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넌 네 몸을 상해 가면서까지 막을 사람이야. 네 눈앞에서 이유 없이 다치는 사람이 생기는 걸 네가 두고 볼 리가.”

“…….”

뮌제는 입을 다물었다. 일견 차가워 보일 정도로 표정이 굳었다.

짧은 시간 이루어진 치열한 공방은 그렇게 끝났다.

라파엘도 이만 뮌제의 팔을 부드럽게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끝까지 완성했다. 다정하게 가차 없이.

“다치지 마. 건강하게 있어. 건강하게 살아. 너만 위하면서 살아.”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며 그를 응시하고 있던 뮌제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얕게 내쉬었다.

털어내는 것 같은 호흡이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한숨 쉬듯 웃었다.

“본인이 아니라는데도 우기네. 대공 전하.”

농담조였지만 뼈는 있었다.

라파엘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숨긴 네 비밀을 전부 알 수는 없어도, 적어도 네 심성은 알아. 네가 날 알듯이.”

“…….”

그 짓궂고도 다정한 말을 뮌제는 이기지 못했다. 앓는 듯한 표정의 뮌제가 사랑스럽다.

라파엘은 살짝 구부린 손끝으로 그녀의 눈꼬리를 훔쳤다. 반사적으로 눈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피하지는 않는 건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는 슬며시 웃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에서 물어볼까.”

“뭘.”

반문하는 그녀에게 웃음을 보인 에흐베 대공은 허리를 조금 굽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물었다.

“네가 아는 나는, 널 벤 황제를 가만히 둘 사람이야?”

얼음장 같았다.

* * *

“폐하.”

“대공. 어서 오시게.”

온느발레의 황제는 예를 갖추는 에흐베 대공을 그럭저럭 환대했다. 그 태도에 전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대화는 정중하지 않았다.

대화의 끝에서 황제는 에흐베가 지도에서 사라질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조차도, 심지어 그런 엄슬한 맹세를 하는 중에도, 황제는 대공을 사랑했다. ‘나와 그대. 어쩌면 이리도 닮았는가’ 하며.

그리고 에흐베 대공이 떠난 자리.

홀로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네트는 어느 순간 지그시 눈을 감았다. 황제의 침묵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종료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황제는 손수 걸음을 옮겨 거울을 찾았다.

거울 속의 제 외견을 찬찬히 살폈다. 아니, 실은, 머리카락만을 살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칼. 지금까지도 상당히 아끼는 이 색. 이제 와서는 아끼는 게 버릇되어 아끼는 이 색.

그러나 아끼기 시작한 이유가 있었던 색.

황제는 물끄러미 제 머리만을 보고 있다가 손을 올렸다. 장신구들을 빼자, 화려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채가 부드럽게 쏟아졌다.

“…….”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윤기 흘렀던 다른 금발이 있었다. 길고 아름답고 우아하였던 금발이.

오늘 보기로는, 되지도 않는 갈색 단발이었던 그 머리칼의 원래 색을 떠올리던 황제는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들을 쑤셔 넣었다.

유일하게 같았던 이 색.

외견상 유일하게 같았던 것이 이 색이었다…….

“…….”

기억을 더듬던 나네트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황제는 픽 웃었다.

머리칼 사이에서 손을 뺀 그녀는 거울을 보고자 살짝 굽히고 있던 허리를 세웠다.

[저는 이분이 군주이기 때문에 이분을 보호한 게 아니라, 이분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당연히 보호한 것입니다. 이 역시 일종의 사랑이겠지요.]

사랑.

사랑…….

아리오의 왕 따위를 말이지…….

과정이 어땠든지 간에, 어쩌다 여기에 도달했든지 간에, 어찌 되었든 다른 사촌을 제외하면 이제 당신의 가족은 나뿐인데도.

고개를 돌려 잠시 멀리 창밖을 바라보던 황제는 문득 웃었다.

이를 어찌하나.

공작. 그대는 그대의 그 말이 발롬브로사의 명을 재촉한 것을 과연 알고 있을까.

내가 여기 아리오에 남은 게 오늘 안으로 그대와 제대로 대화하고자 함임을 짐작은 하고 있을까.

그리고 조금 전 대공이 무슨 귀여운 것을 말하고 갔는지, 공작, 그대는 과연 알까.

서서히 웃음을 그친 황제는 몸을 돌렸다.

에흐베 대공이 놓고 간 벨벳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입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상자는 고급스럽지만 그 안에 든 것이 흉물스럽고 더러웠다. 죽은 인간의 목이라니. 역겹기도 하지. 마법으로 조치를 했는지 시취가 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그런 끔찍한 것을 실제로 본 적 없는 존귀한 이였다.

[제 집무실에서 발각되었던 자들 중 한 명입니다.]

그리고 사실 대공도 그녀보다는 격 떨어지긴 하지만 존귀한 자리에 있는 군주였다. 저런 걸 가까이 할 지위에 있는 이는 분명 아니었다.

오늘도 그토록 우아하게 떨어지는 성장을 한 대공의 모습으로 왔었다.

그런데 그 모습으로 건넨 건 시신의 일부가 담긴 상자였다.

[주군에게로 돌아가지 못한 이 남자를 위해 이 남자의 주군이 추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

가소롭다. 감히 온느발레의 황제에게 에흐베의 군주 따위가.

황제는 사람을 불러 슬슬 아리오 왕궁을 나설 채비를 하면서도, 끝끝내 그 상자를 열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가지고 가서도 발각되다니 실로 쓸모없다. 추도할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에흐베는 감히 그녀의 온느발레인을 살해한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 * *

[그대는 나를 위해 나서 주지 않겠군.]

발롬브로사는 자신이 뮌제에게 했던 말을 돌이켰다.

[하지만 조심하시길. 황제께서는 전하의 측근을 부추겨 전하를 살해하여 왕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대신 무기를 맞은 건 뮌제 로헤올 나름대로 발롬브로사를 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쳐 보자.

만약 실로 그렇다 해도, 이후의 조언까지는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발롬브로사가 어련히 알아서 경계할까.

“…….”

이건 꼭 뮌제 로헤올이 어느 정도는 진심으로 아리오를 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면 이렇게 느끼게 하는 것조차 뮌제 로헤올의 꿍꿍이일까.

국정을 보는 내내 온느발레인들이 틈틈이 떠올랐고, 그때마다 가슴이 조였다.

그러다 발롬브로사는, 온느발레의 권력자들이 아리오를 전장 삼아 저러고 있는 게 그에게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아들을 죽여야 할 때조차, 아들을 죽였을 때조차 이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었다.

그때에는 그가 이 나라의 가장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모든 걸 결정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나라에서마저 그의 위에 황제가 있다.

어쩌면 뮌제 로헤올도 그의 위에 있다.

황제로 인해 그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 있고 황제의 결정에 대해 무어라 반발하기도 어려운 지금 이 상황.

발롬브로사는 크고, 깊고, 짙고, 무거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버거울 정도로.

그래서인지 그는 뮌제 로헤올이 팔을 내밀어 저를 지킨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는 이분이 군주이기 때문에 이분을 보호한 게 아니라, 이분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당연히 보호한 것입니다. 이 역시 일종의 사랑이겠지요.]

개소리라는 건 알았다.

피를 본 그 자리에서 굳이 말했으니, 분명 의미가 있는 개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든 없든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런데 발롬브로사는, 그 개소리가 개소리임을 알면서도 그 내용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하. 황제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흑암이 세상에 내린 시간, 이 보고를 받은 발롬브로사는 잠깐 침묵했다.

이러한 실시간 보고가 아리오 기사들이 하는 최선이었다.

아티팩트를 지닌 채로 멀리에서 황제의 동태를 살피는 것에 불과한 최선.

그는 이 자리에 함께 있던 제이를 흘끗 보고는 은늑대관의 관장과 은여우단의 단장에게로 눈을 돌렸다.

“보고가 왔다는 건, 그럼 걸어서 궁을 나간다는 뜻이지. 마법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런 듯합니다.”

엘르시어가 대답했다.

발롬브로사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황제의 곁에는 아티팩트를 지녀 눈으로 볼 수 없는 기사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호위를 위해서든, 다른 이유를 위해서든.

눈을 감았다가 뜬 발롬브로사는 손에서 반지 하나를 뺐다.

그 반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제이와 두 단장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왕은 그 반지를 엘르시어를 향해 내밀었다.

“경. 로헤올 전 공작에게 이걸 전하게. 최대한 빨리.”

한 번 정도는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이것이 왕이 항시 필수적으로 소지해야 하는 물건 중 하나인 건, 이 세계가 마법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한 세계.

공식적으로 아티팩트는 각 국가의 군주들에게 속하는 것이라 그나마 다행일 따름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각 군주는 제 명에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리오 왕실이 가진 것 중 가장 강한 방어 마법을 가진 아티팩트였다.

그래서 이 시간까지도 소지하고 있던 것이며, 그래서 이제야 내어 주는 것이다.

“전하. 이건 전하께서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이 밤에만 가지고 있으라 해. 빨리 가게. 되도록 황제보다 앞서서 도착해.”

“전하.”

“내 목숨 값이고 내 자존심의 값일세.”

뮌제 로헤올은 황제의 면전에서 황제가 아니라 발롬브로사를 택했다. 그리고 뮌제 로헤올은 황제가 발롬브로사보다도 존중하던 이였다. 그런 사람이 황제가 아니라 발롬브로사를 존중한다 사랑한다 운운한 것만으로도 발롬브로사는 어느 부분에서는 황제의 위에 선 게 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뮌제 로헤올은 황제의 앞에 무릎 꿇은 발롬브로사의 면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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