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라파엘은 베렐이 그에게 전한 뮌제의 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그에게 무얼 묻거나, 편지를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잊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의미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라파엘은 이제 믿었다.
뮌제는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쉬이 생명을 놓으려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했다. 윌리엄을 ‘잃은’ 뮌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만으로도 라파엘은 깊이 안도했다.
그녀에게는 이제 그가 있다.
죽었다 하는 뮌제를 찾아 헤맨 그가 있다.
뮌제밖에 없는 그가 있다.
그녀는 그를 두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라파엘은 저 상처에 대해 뮌제에게 인상 찡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를 마친 의사가 두 귀족에게 인사하고 퇴실했다.
발롬브로사가 제공한 이곳은 윌리엄을 죽인 후 의식 잃은 뮌제와 라파엘이 머물렀던 방이었다. 익숙한 곳을 가로질러 온 라파엘은 뮌제의 맞은편 베르제르에 앉았다.
그렇게 앉자마자 뮌제는 불쑥 말했다.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
“내가 알기로 네가 황제에게 그만큼……, 그, 대든 일이 없었거든.”
단어를 적당한 것으로 사용하려고 애쓴다 싶었다. 그래 봤자 나온 단어가 ‘대들다’였다.
라파엘은 짧게 웃었다.
“왜 왔는지는 안 물어보고.”
“내가 황제 멱살 잡아서 흔들고 있을까 봐 말리러 온 거 아니야?”
“그걸 왜 말려.”
농담은 진담으로 받아쳤다. 뮌제도 그 대답을 듣고 낮게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나자 아주 잠시, 방 안은 적막했다.
뮌제는 약간 일그러진 눈으로 라파엘을 보다가 나직하게 물었다.
“왜 왕에게 그런 걸 허락했어?”
“너는 왜 그걸 덮어쓰려 했어?”
라파엘도 차분하게 반문했다.
그에 침묵하던 뮌제는 피를 씻어 깨끗한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틈으로 그녀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라파엘은 뮌제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녀를 살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치료를 위해 겉옷은 벗고 셔츠 소매도 접어 올린 상태라 아리오 복식의 예복이라는 건 한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쳐서 피 흘리는 상태라는 것에 집중하여 뮌제가 겉옷을 입고 있었을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잘 어울렸을 것이다.
에흐베의 옷을 보낼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리오의 옷을 선택했음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의 눈길은 이제 뮌제의 팔에 감긴 붕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뮌제가 손을 내린 건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뮌제는 옅게 인상을 쓰고 그를 노려보았다. 라파엘은 옅게 미소했다.
노려보던 눈은 금세 한숨 어린 웃음으로 바뀌었다.
뮌제는 깊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네가 정말 알아서 하겠지만. 라파엘. 에흐베에는 많은 사람이 있고, 넌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걸 잊지 않은 거지?”
라파엘은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이내 순순히 대답했다.
“잊지 않았어.”
“보호할 거지?”
“보호할 거야.”
“살아갈 거지?”
“너와 함께.”
[같이 있자.]
[너와 있고 싶어.]
이 방에서 그 대화를 하던 때처럼, 뮌제는 오늘도 그 말에는 잠잠히 침묵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온느발레에 대적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
중앙탑을 옮긴다 하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라파엘은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뮌제는 눈이 부신 것처럼 웃는 얼굴로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천천히, 천천히, 그녀는 말했다.
“네가 역부족이고 내가 역부족이라서 만약 온느발레가 에흐베를 멸망시킨다면, 그래도 끝까지 함께할 거야.”
대공의 연회색 눈동자가 커졌다. 그의 숨이 굳었다.
뮌제는 푹 한숨을 쉬었다.
“네가 황제에 대해 물었을 때 내가 말했었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무엇이든 해. 내가 물은 것들을 기억하고만 있으면 됐어.”
넋이 나간 것처럼 뮌제를 보던 라파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드물게도 망설임을 보인 그는 다시 입을 열었고, 도로 닫았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라는 그 한 문장에, 그의 몰락이 온다면 거기에까지도 함께 하며 죽겠다는 뜻까지 담겨 있었다고…….
우리가.
죽거든 같이 죽겠다고…….
라파엘은 두 팔을 뻗었다. 양손의 손끝이 마비된 것처럼 무겁고도 가벼웠으며, 아주 잘게 떨렸다.
그는 베르제르에서 일어났고, 뮌제도 기꺼이 일어나 그를 마주 안았다. 라파엘은 뮌제를 안고, 안고, 안았다.
녹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뮌제의 옆얼굴에 물처럼 떨어졌다.
“사랑해.”
“…….”
뮌제는 라파엘의 품에서 눈만을 홉떠서 천장 쪽을 보았다.
조금 전의 라파엘처럼 입을 열었다가 닫은 그녀는 눈을 꽉 힘주어 감았다. 착각이라는 그 한 마디를 차마 하지 못하겠다.
[널 사랑하고 있어.]
[착각이야.]
그때와 같은 그 한 마디를. 차마.
* * *
라파엘은 용건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아리오에 온 것이다.
그런데 오자마자 본 게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이들, 그리고 뮌제의 부상이었다.
이제 뮌제도 치료하였으니 그는 일정을 소화하고자 자리를 비우려 했다.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가 아니라 ‘일정을 소화하길 원했다.’ 다친 뮌제의 곁을 잠시 떠나야 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그의 속은 구렁텅이처럼 까맣게 얼어붙어 있었지만, 뮌제의 앞에서 그는 끝까지 차분했다.
사실 뮌제는 그가 황제를 만나러 가는 것임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느냐며 걱정하는 말조차 없이, 그저 그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가 놓은 것으로 보면.
그래서 라파엘은 뮌제에게 말했다.
“이제 황제를 만나러 가.”
뮌제는 짧은 숨을 침착하게 들이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다물린 입술을 혀로 갈라 열었다.
“……너와 나는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내게 마법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이젠 확실히 네 무위가 더 높겠지. 난 마법으로 실력을 속여 왔었거든.”
“…….”
“라파엘. 짐작하고 있겠지만, 황제의 지근거리에 아티팩트로 몸을 숨긴 기사들이 있을 거야. 내가…….”
뮌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어딘가가 조금 어긋난 듯한 음성으로 이었다.
“내가 같이 가면 더 안전할 텐데. 난 마법을 느낄 수 있으니까.”
경직된 연회색 시선이 라파엘에게 닿는 중이었다. 긴장한 기색은 아니었다. 동요를 억누르고자 하는 느낌만이 있었다.
눈을 깜박거리던 라파엘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아주 잠시 뮌제의 눈길을 마주하지 않고 허공을 보았다.
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감는 그 순간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라파엘은 다시 뮌제를 보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마법사라서?”
뮌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마법사라서 느낄 수 있었던 게 아니야. 마법사들은 서로를 스쳐 지나가도 서로가 마법사인 걸 몰라.”
“그럼.”
“내가 악마의 옆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야. 아마도 그래. 제이 왕자도 오랜 시간 나와 윌리엄 옆에 있어서 그렇게 된 거고.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돼. 후천적으로나마 마법과 관계있게 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
“거기다 마법을 느끼는 건, 마법사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거잖아. 마법의 근원 같은 것과 함께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거야.”
뮌제는 잠시 동안 아랫입술을 사리문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가 없다는 헛웃음, 쓴웃음이 걸린 표정에는 허탈함이 가득했다.
“제이 왕자가 겁에 질려서 물어볼 때는 정말 많이 당황했어. 왕자에게는 되도 않는 말을 지껄였지. 혈이 열린 거라고. 나도 그렇다고. 혈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
“제이 왕자가 그렇게 되었다는 걸 알고 난 바로 로헤올 저택에 머무는 이들을 살폈어. 사실 윌리엄을 가까이에서 수발들던 몇도 마법을 느끼는 것 같긴 했지만, 그걸 드러내 놓고 묻지는 못했어. 어떤 식으로 새어 나갈지를 모르니까.”
그녀는 윌리엄을 지켜야 했다.
윌리엄과 그 현상이 서로 관계있다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차라리 사용인들은 자신이 마법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지조차 못하게 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굳이 느낄 수 있느냐 물어서 상기시켜 줄 이유가 없었다.
제이가 어디 가서 말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입단속을 시켰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랬었다.
윌리엄이 죽은 이제는 더는 숨길 일도 아니었다.
뮌제 로헤올은 마법을 느낀다.
악마의 유산이다. 윌리엄이 살아 있을 적에 받은 악마의 유산이다.
뮌제는 자칫 긴장을 놓으면 물기에 젖을지도 모를 숨을 삼켰다.
라파엘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미소했다.
손을 뻗은 그는 뮌제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가 놓았다.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접촉이었다. 그러면서도 대공은 뮌제의 비밀 하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하는 제이 왕자를 잠시 떠올렸다가 지웠다.
“난 문제 없이 돌아올 거야. 걱정하지 마. 괜찮아.”
“알아. 그냥, 음, 조심하라는 말이야. 다치지 말고.”
“응.”
그녀의 걱정이 달다.
하지만 라파엘은 그 달콤함에 미쳐 있기보다는 그 달콤함을 어떤 기회로 여기는 걸 선택했다.
대공은 치료를 마쳐 붕대를 감은 뮌제의 팔을 정중하게 그의 손에 올렸다. 뮌제는 제게 닿는 라파엘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
라파엘은 붕대를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아까.
아까, 그 현장.
황제가 일부러 툭툭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데도 뮌제는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않았다. 사실, 반격은커녕 방어조차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온느발레에서의 로헤올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리.
공작 아닌 사람으로 지내던 시간이 길어서 그 자리가 어색하여 저런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번에 그녀는 페레이라 백작 앞에서 온화하게 매서웠다.
그러니 뮌제에게 무슨 의도가 필시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리 몸을 낮추고 있을 것이다. 그는 뮌제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는 늪에 잠겼었다.
발롬브로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왜 했는지를 알아차린 뒤 대공은 그 장단에 맞추면서도 이를 갈았다. 페레이라 백작의 시신을 토막 내어 개에게 주었다 한 건 황제를 향한 도발이었다.
황제와 뮌제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하였던가.
뮌제가 굳이 말했으니 실제로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뮌제를 죽이려 했고, 또 공격했다. 이번에는 직접. 그 손에 직접 피 묻혀 본 게 이번이 처음일 확률이 높았다.
라파엘은 이 순간 차분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 선택. 네 의도. 네 생각.
새기고 새겼다. 뮌제를 존중한다. 그 존중 속에서 그는 말했다.
“다시는 이러지 마.”
“왕이 다칠 수도 있었어.”
뮌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서 라파엘도 예상했다는 듯이 그에 대답했다.
“응. 그랬겠지. 다치게 둬.”
“…….”
미소하지 못한 뮌제와 눈이 마주치자 라파엘은 상냥하게 웃었다.
“왕을 죽일 공격이었다 하더라도 그대로 둬. 죽게 둬.”
살인을 방관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어조 역시 다정했다.
뮌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서로의 성격이 어떤지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반문했다.
“네가 아는 나는 남을 살리기 위해 대신 칼을 맞을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