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라파엘일 줄은 몰랐다.
뮌제는 환부를 더 힘주어 잡았다. 축축해진 옷이 환부 주위의 살갗에 닿는 게 느껴졌다. 어깨가 굳었다.
잠시 서 있는가 싶었는데, 곧 넓은 돌들이 박힌 길을 걷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뮌제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옷감이 스치는 소리,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아리오인들이 꿇어앉은 자리에서 에흐베 대공을 위하여 길을 내는 것이다.
걸어오는 대공에게 황제는 계속 말했다.
“여기 이 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페레이라 백작을 죽였다 하더군. 그것에 공작은 자신이 죽였다고 토설했네.”
뮌제의 뒤, 위에서 손이 뻗어져 내려왔다. 지혈을 위해 환부를 압박하고 있던 손을 그 손이 덮었다. 그의 온기가 머리 뒤에서 훅 밀려왔다. 뮌제는 반사적으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라파엘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뮌제를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대공은 그 후에야 황제를 보며 대답했다.
“후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대단하군. 대단해. 한 나라를 이끈다는 군주가 무려 셋이나 이 자리에 있군. 공작, 겨우 그대 하나 때문에 말이야.”
“…….”
뮌제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 앞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든 상관없었고, 사실 의도했던 수모라서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않았었지만, 이 모습을 라파엘에게 보이고 싶진 않았었다. 오지 말라 했는데.
생각지 못하게 급히 온 것도 아닌 듯 품위 있는 차림이었다.
에흐베 대공은 황제가 온후한 어조로 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리오의 왕에게 말했다.
“발롬브로사. 일어나십시오.”
그건, 사실상 드러내 놓고 황제를 무시하는 말이었다.
황제는 여전히 미소한 얼굴로 냉혹하게 경고했다.
“아니, 그대로 있으라.”
에흐베 대공의 연회색 눈과 온느발레 황제의 금색 눈이 서로를 향했다. 두 군주는 제련된 듯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를 담았다.
황제는 온느발레 사교계에 도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대공을 사랑하여 뮌제를 질투했을지도 모른다더라.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었다. 나네트가 에흐베 대공에게 특이한 태도를 보였던 이유는 그런 가소로운 게 아니었다.
나네트는 라파엘 에흐베를 꿰뚫을 것처럼 응시했다.
온느발레의 많은 귀족이 공감하지 못할 경계심이었다.
대공 된 이후 온느발레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던 게 두 번. 그때 대공은 매너 좋은 모습을 보였다. 타인에게는 그랬고, 뮌제 로헤올에게는 특별하게 다정했다. 현재 귀족들이 보는 라파엘 에흐베 대공은 신중하고 어딘가 위압감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어딘가 유약한 현실주의자였다.
유약 어쩌고 하는 평가가 덧붙여진 건 뮌제 로헤올의 사후였다.
어릴 적 생성된 관계를 계속 이어 가기 위해 꽤 노력했을 텐데도, 뮌제 로헤올이 죽은 뒤에는 대공이 그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러나 황제는 대공을 경계했다. 뮌제가 죽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이 경계를 가지고 그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신분 낮은 이들은 신분 높은 이에게 허리 굽혀 예를 취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렇습니까.”
황제는 지금까지 묵묵히 있던 대공이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 정신 나간 남자에게 필요했던 건 아마도 결론과 확신이었을 터다. 시신도 제대로 남지 않은 뮌제 로헤올이 정말 죽었다는 확신. 아마도 그랬다.
뮌제 로헤올을 ‘기어이’ 찾았으니 대공은 이제 온느발레로 칼을 겨눌 것이다.
공국에 불과한 에흐베가 제국 온느발레를 심각하게 흔들 수는 없을 텐데도.
하지만 이 나른한 남자가 모든 복수를 실패하는 모습도 꽤 우스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 뒤에 서 있던 오십여 명의 온느발레인들은 누군가가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휘청거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흐베 대공의 앞에서 마땅히 허리 굽혀 예를 취해야 할 신분 낮은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아마도 아티팩트로 사람들을 주저앉혔을 에흐베 대공은 담담한 얼굴로 다시 한번 아리오의 왕에게 일렀다.
“일어나십시오, 발롬브로사.”
* * *
발롬브로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치는 끝났다.
황제는 아리오인만 있는 곳이 아닌, 에흐베 대공과 에흐베의 기사 몇이 지켜보고 있는 곳에서까지 아리오의 왕을 계속 무릎 꿇릴 정도로 몰상식하지는 않았다.
“하루 정도는 머무는 것도 좋겠군. 한적한 곳으로 하루 간 정양을 온 셈 치지.”
일국의 수도인 곳, 그것도 왕궁에 대고 ‘한적한 곳’ 운운하는 얼굴에 한 점 거리낌도 없었다.
사실 얼숍에 와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뮌제도 얼숍을 꽤 시골로 생각했었으니, 황제의 저 반응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저런 말을 드러내 놓고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는 크다.
반걸음 뒤로 한 발을 뺀 황제는 무릎 꿇은 온느발레인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대귀족 가주를 위시하여 그 아래의 귀족, 시종, 시녀, 마법사, 기사 전부 땅에서 일어났다.
황제는 약간 옆으로 몸을 튼 그대로 물었다.
“백작의 시신은 어디 있지?”
“토막 내어 개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발롬브로사에게 던져진 질문이었으나 에흐베 대공이 대답했다. 온느발레인들이 대공을 노려보았다. 감히 황제에게 무슨 무례한 언사인가.
그러나 황제는 부드럽게 눈을 휘고 미소했다.
“끔찍한 짓을 했군. 내 듣기에 참담하다. 에흐베에 망조가 들었나.”
“…….”
대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온느발레에서 보이곤 했던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네트는 차분하게 숨을 내쉰 뒤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왕이여. 아리오가 날 위해 준비한 곳으로 안내하라.”
“예.”
대답한 발롬브로사는 그제야 기립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였던 탓에 일어서자마자 휘청거리고 말았으나, 그의 팔을 뮌제 로헤올이 다친 쪽의 손으로 잡아 주었다. 뮌제의 팔에서 잠시 손 뗀 에흐베 대공 역시 그리했기 때문에 발롬브로사는 한 팔을 두 사람에게 잡혔다가 놓였다.
중년의 왕은 마비된 것 같은 머리로 나직하게 명령했다.
“일어나 폐하를 뫼셔라.”
본디 그리 명령받아 두었던 시종과 시녀, 은늑대관의 기사들이 일어났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황제는 걸음을 옮기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공작. 머리, 어울리지 않네. 품위도 없군.”
“…….”
황제의 것과 유일하게 같았던 금색의 긴 머리칼은 이제 갈색의 단발이었다.
뮌제는 다친 쪽의 손을 왼쪽 가슴에 올리고 가볍게 인사했다.
온느발레인들이 떠난 빈터는 한동안 조용했다.
발롬브로사의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기 위해 시종장이 달라붙었다. 오래도록 왕을 모신 나이 든 얼굴에는 비참해 하는 분노가 가득했다. 뮌제 로헤올과 에흐베 대공이 없었다면 체면 차리지 않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여기 남은 나머지 아리오 귀족들의 심정도 비슷했다.
설마 온느발레인들이 이렇게나 아리오를 천하게 취급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허탈한 오전이었다. 너무나도 허탈하고, 무력감을 느껴 공허하고, 뻥 뚫리게 비어 버린 가슴 속에 스멀스멀 분노가 차오른다. 열이 받아서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두 타국인은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동감할 이유도 없었다.
잠시 뮌제와 눈을 마주치던 에흐베 대공은 뮌제에게 말했다.
“가지요. 치료해야겠습니다.”
뮌제는 잘린 소매를 헤치고 상처를 보았다. 새로 솟아나는 피의 양이 아주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나 치료는 반드시 해야 할 부상이다.
뮌제가 다시 환부를 손으로 덮으려 하자, 라파엘은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먼저 환부를 덮었다. 뮌제는 그 손수건 위를 손으로 덮었다.
그녀는 발롬브로사를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렸다.
발롬브로사는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잠시, 그대. 말을 들어 보시오.”
“이분 대공께서 전하께 허락하셨습니까?”
분노할 줄 알았건만 뮌제 로헤올의 음성은 차분했다.
아리오의 왕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제가 무어라 말을 보탤 일이 아닙니다.”
발롬브로사는 턱을 조금 올렸다. 왕은 에흐베의 군주를 힐끔 보았다. 대공은 차분한 낯이었다. 뮌제 로헤올이 당연한 말을 했다는 듯이. 그 말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는 듯이.
그 시선을 보지 못한 뮌제는 발롬브로사와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점잖게 말했다.
“하지만 조심하시길. 황제께서는 전하의 측근을 부추겨 전하를 살해하여 왕을 교체할 수 있습니다.”
“공작. 말씀 조심하시오.”
“전하. 로헤올 공작을 죽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왕국의 왕을 바꾸는 건 일도 아닙니다.”
“…….”
“전하께서 실감하신 적 없으실 테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만, 로헤올은 온느발레에서 진실로 가볍지 않습니다. 저 개인 역시, 온느발레에서 가볍지 않습니다. 죽어 아리오에 머물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아…….”
“황제께서는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 과장되고 거친 행동을 한 게 아닐 겁니다. 저분이 아리오를 경시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외국의 군주에게 조금 전처럼 무도하게 행동할 분은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황제가 정말 무도한 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만이 나왔다.
발롬브로사는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리려다가, 제 손을 보고는 그저 주먹을 쥐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뮌제 로헤올 공작이 산길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발롬브로사는 별다른 조치를 한 일이 없었다. 당연하다. 남의 나라 공작의 억울한 죽음 같은 것을 구태여 파고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의감 따위는 왕자 시절부터 이미 버렸던 바.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런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기 직전이 될 줄은 몰랐지…….
목이 졸리는 것 같다. 너무 간만에 생명의 위협을 겪으니, 한때 익숙했던 두려움도 생소하게 무거웠다. 노년으로 넘어가는 왕은 짜증스럽게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뮌제 로헤올은 그 얼굴을 보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페레이라 백작을 정말 죽이셨습니까?”
“아니.”
“그럴 것 같았습니다.”
아니라는 대답에 안심하는 기색도 없이 그렇게 대꾸했다. 불안해한 적도 없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발롬브로사가 놀랐다.
뮌제는 픽 웃었다.
“계획은 저지당했고, 제이 왕자는 건강합니다. 왕자가 죽었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백작이 죽어야 할 죄를 짓지는 않았지요.”
“그럼 알면서도 살인죄를 졌나…….”
“거짓이라 하더라도 왕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명분이 됩니다. 대공이 절 보호하고자 애쓰셨다면 제가 대공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희는 항상 그러했습니다.”
발롬브로사는 다시 한번 에흐베 대공을 일별했다.
대공은 이번에는 반응을 보인 채였다. 금방이라도 한숨 쉴 것처럼 쓴웃음을 웃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스러운 이를 향해 짓는 웃음이 있다면 저런 것이겠다. 쓴웃음인데도 저건 실로…….
[황제가 라파엘 에흐베를 사랑하고, 라파엘 에흐베는 뮌제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라파엘 에흐베라면, 그, 대공 말이냐? 전 공작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랑?]
아.
왕은 드디어 제이가 했던 말을 일부 실감했다.
* * *
라파엘은 의사가 뮌제를 치료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피를 흘리기를 택한 뮌제를 존중한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죽었다고 알려진 널 몇 년이고 찾다가 마침내 찾았는데.]
그의 자리에 서서 그의 심정을 생각해 보려 했던 뮌제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