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발롬브로사의 오른팔 뒤에 서 있던 엘르시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뮌제를 보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발롬브로사를 도우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엘르시어 클리포드는 손을 뻗어 제 왕의 옷을 잡았고, 그 직후 뿌리쳐졌다. 발롬브로사는 무릎 꿇었다. 아리오의 한 시녀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나라의 주인이 무릎 꿇었다. 그 뒤에 감히 서 있을 수는 없다. 엘르시어가 가장 먼저 왕의 뒤를 이어 몸을 굽혔다. 그 자리의 나머지 아리오인들 역시 참담하여 비통하게 이를 갈며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잊지 않겠다. 결코 잊지 않겠다. 오늘을 잊지 않겠다.
황제는 무릎 꿇은 오십여 명의 아리오인들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리오 측에 서 있던 자들 중 지금 꼿꼿하게 서 있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거의 눈앞에 있는데도 나네트는 그쪽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뒤를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호위 기사로 데려왔을 백작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스르릉.
검집에서 검을 빼내며 백작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맵시 있게 잘 차려입은 황제의 정부가 팔을 올렸다.
“폐……!”
“무슨……!”
이번에는 온느발레인들도 놀랐다.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 후로 풀 위에 피가 떨어졌다.
나네트는 직전보다 자세가 낮아진 뮌제 로헤올을 내려다보며 백작에게 또다시 손짓했다.
백작은 차분하게 검을 내리고 황제의 뒤로 물러났다. 황제는 그제야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일세, 공작.”
발롬브로사의 목을 보호하느라 대신 칼날을 맞은 팔에서 연신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투둑. 툭. 투둑. 피 떨어지는 소리가 꽤 크게 났다.
싸늘할 만큼 조용해진 군중 속에서 뮌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 * *
오전 햇빛이 서늘하게 졌다.
뮌제는 피 떨어지는 팔을 거두며 흘끗 발롬브로사를 확인했다.
칼날이 내려오는 걸 인식하자마자 팔을 내민 덕분에 발롬브로사의 목은 멀쩡했다. 달리 베인 곳도 없어 보였다. 경악한 발롬브로사와 아주 잠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장갑 낀 왼손으로 팔꿈치 아래의 팔뚝을 꽉 잡아 지혈했다.
그리고 칼과 발롬브로사의 목 사이로 팔을 집어넣느라 어정쩡하게 굽혀야 했던 무릎을 이제는 완전히 굽혔다. 발롬브로사의 옆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험하게 나올 것 같긴 했지만, 설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럴 줄이야.
장갑 손가락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핏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아주 깊게도, 아주 얕게도 베이지 않은 덕분이었다. 어쩌면 그게 더 악질이었다.
뮌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팔만 겨우 벤 힘입니다. 이분을 어찌하려 하셨습니까.”
“글쎄. 생각해 보게. 어찌하고 싶었을까?”
평온하게 반문한 황제는 온화한 낯으로 우아하게 웃었다.
뮌제 역시 미소했다.
“이보다는 현명하셨습니다, 폐하.”
“공작이 감히 나의 현명함을 논하는가.”
“…….”
“하지만 염려 말게. 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거든. 공작은 지금 마땅히 자세 낮추어야 할 자리에서 굽히고 있지 않은가.”
애초에 발롬브로사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뮌제는 지금 황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 꿇은 왕의 목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 있던 뮌제도 자연스럽게 자세를 굽혀야 했으므로.
황제는 쐐기를 박았다.
“아리오의 왕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를 낮추고 있는 것도, 공작이 내게 마땅한 예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 때문이야. 애당초 공작이 제대로 예를 갖추었다면 난 애꿎은 일국의 군주를 꿇어앉히지 않았겠지. 공작은 군주를 공격하려는 정도는 해야 자세를 낮출 사람이지 않은가.”
“…….”
황제는 뮌제 로헤올에 대한 적의를 아리오 귀족들에게 제대로 심어 주었다.
아리오에, 특히 수도 얼숍에 평온히 머무를 곳 없게 만들기가 이렇게 쉽다.
뮌제는 오랜만에 듣는 황제의 육성, 어딘가 다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 그럼에도 이 세상 가장 위에 서 있는 유일한 이의 특권 의식이 강하게 묻어나는 내용을 듣고 분석하면서도 평온한 미소를 유지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저는 이분이 군주이기 때문에 이분을 보호한 게 아니라, 이분을 존경하고 존중하기 때문에 당연히 보호한 것입니다. 이 역시 일종의 사랑이겠지요.”
뮌제는 황제의 역린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네트의 웃음이 사라졌다. 황제의 존귀한 흰 얼굴에 냉혹한 살의가 들어찼다. 본연의 것이며 날것이다.
이제 이 자리에서 뮌제만이 웃고 있었다.
절창의 통증이 슬슬 강해지고 있었으나 참지 못하고 표정을 구길 바는 아니었다.
상처를 누르고 있는 손의 흰 장갑의 절반이 붉어졌다. 장갑이 흡수하지 못한 피는 아주 천천히 손끝에 맺혔다가 무겁게 떨어졌다.
그런 뮌제의 모습을 보는 생전의 윌리엄과 비슷한 금안이 화려하고도 흐리게 빛났다. 황제는 입을 열었다.
“존경……. 존경. 존중.”
“…….”
“공작에게 오히려 묻겠네. 감히 온느발레의 귀족을 억류하고, 공작의 감언이설에 넋 나가서 날 여기까지 오게 한 미련한 왕의 어디가 존중하고 존경할 만한가.”
아리오인들의 앞에서 그들의 왕의 자격을 논하는가.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은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황제는 총명하고 과감하여 온느발레에겐 좋은 군주이지만, 온느발레에게만 좋은 군주이다.
황제는 사람을 저와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았다. 온느발레인마저도 그렇게 보는데 왕국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왕국인들을 천하고, 낮고, 아둔한 것들로 보았다. 왕이라 하여 달리 보지 않았다.
아마 황제는 왕국의 발전 수준을 보면 굉장히 놀랄 것이다.
아둔하고 천한 것들이 이 정도로 문명화되어 있느냐며.
왕국의 발전 정도에 대해 지식이 있음에도 그 지식을 믿지 않으니, 어찌 보면 미치고 팔딱 뛸 일이고 어찌 보면 귀여운 일이었다.
“이 나라 백성은 현명한 주군에게 다스림받을 권리가 있다.”
정말 귀여워 죽겠군.
뮌제는 침묵했다.
뮌제 로헤올을 차게 노려보던 황제의 눈길이 다시 발롬브로사에게로 향했다. 결코 유약하지 않은 금색 시선이 왕에게 내리꽂혔다.
“아리오의 왕이여. 왕실 일원을 온느발레에 보내지 않도록 잠시 유예를 주었더니 참으로 방자하게 날뛴다.”
뮌제는 발롬브로사의 옆얼굴을 힐끔 보았다. 이를 사리문 듯 턱 근육이 살짝 도드라졌다가 풀렸다.
좋은 정치인이다.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아 본 적 없을 텐데도 잘 인내함을 보건대.
그 와중에 뮌제는 황제의 뒤에 선 온느발레인들이 제게로 던지는 시선을 전부 무시하는 중이었다.
제발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절박한 애원일 터.
황제가 몰이해한 위세로 사람들을 제압하는 일은 일상이지만, 설마 일국의 왕에게까지 이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저들도 온느발레인이고 왕국을 온느발레에 비하면 하찮게 여기는 건 황제와 마찬가지지만, 이 정도까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목하 황제가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이는 왕이다. 군주다. 이 나라 아리오의 국부다.
보라. 외교적으로 대참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왕국인들이 온느발레에 이를 가는 판국에.
그러나 이 자리에서 황제를 그나마 막을 수 있는 이는 로헤올 공작이 유일했다.
그 사실들을 전부 알면서도 뮌제는 방관했다.
“나의 온느발레는 아리오 따위에게 우습게 여겨질 나라가 아니다.”
“…….”
“내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짚어 주지. 아리오는 나의 온느발레의 예속국이다.”
그거야 그렇지.
뮌제는 별 의문 없이 그렇게 그 말에 내심 동의했다. 이 자리에서 저 말에 반발하는 자는 아리오인 뿐일 터. 온느발레를 버렸다 하는 뮌제마저도 결국에는 온느발레에서 성장한 귀족이었다. 대공국인 에흐베를 존중하기에 다른 왕국들도 그나마 존중하는 것뿐.
“아리오의 왕이여. 나는 여기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당장 페레이라 백작을 내 앞으로 데리고 오라.”
발롬브로사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황제는 자신을 위해 준비되었을 건물로 안내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 선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낼 작정인 모양이었다.
왕은 예상에 비할 수도 없이 무례하고 오만한 젊은 황제를 앞에 두고 분노에 찬 호흡을 정돈했다.
[아리오 왕실을 고의로 어지럽히려 든 죄, 작지 않습니다. 이후 온느발레의 누가 윌리엄 로헤올을 대신하여 오든 제가 비호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오에서 원하시는 대로 수사하십시오.]
아니.
[황제에게 엎드려 사죄할 결심이 되셨습니까?]
아니.
그는 뮌제 로헤올을 믿지 않는다.
[발롬브로사. 저 사람은 페레이라를 이 나라에 억류하길 원하고, 당신도 내심으로는 페레이라가 괘씸할 겁니다.]
뮌제 로헤올이 나간 자리.
뮤니르 자작을 잠시 물러나게 한 뒤 페레이라 백작이 다 듣는 자리에서 약속한 이.
[저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가 보증하겠습니다. 페레이라의 죄가 밝혀지거든 원하는 대로 처단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는 내게 돌리십시오.]
왕은 입을 열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페레이라는 에흐베 대공이 죽였습니다.”
[에흐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에흐베가 저 사람과 함께 아리오를 비호하겠습니다.]
자신의 성씨가 곧 국가의 이름인 그 대공을 믿는다.
뮌제 로헤올의 손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발롬브로사는 뮌제 로헤올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 * *
[내일 네가 필요한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정확히는, 거의 없게 하려고 애를 쓰겠지.]
[…….]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이번에는 네가 했다는 둥 끼어들지 마.]
[글쎄. 일단 내일 가서 보자. 네가 어떻게 할지를 모르니까 나도 무어라 약속을 해줄 수가 없어.]
그 말을 할 때 네가, 어떻게 웃었더라.
[계시려고요?]
[미안합니다. 먼저 가십시오.]
[뭐……. 예, 전하.]
네가.
우리가.
그날에는 무어라 대화했더라.
[라파엘. 무엇이든 해. 네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괜찮아.]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네가 보고 싶었어…….]
[뮈즈. 나는 너를 놓을 생각이 없어.]
라파엘. 우리는 도대체 서로에게 뭘 하고 있는 거지.
* * *
침묵하던 황제가 천천히 반문했다.
“……대공이?”
“예. 대공이 사…….”
“제가 죽였습니다.”
뮌제 로헤올이 강하게 누른 목소리로 발롬브로사의 말을 잘랐다.
황제가 침묵하던 그 짧은 순간은 곧 뮌제에게는 앞으로의 방향을 정할 수 있게 생각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뮌제 로헤올은 거침없었다.
본디 정치라는 건 항상 뜻대로,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쯤 되면 지식의 수준과 정보력의 수준이 높은 만큼이나 임기응변과 대처 능력의 수준도 높았다. 그래야 했다.
로헤올 전 공작은, 그 대처 능력으로, 살해를 짐 지기로 했다.
“제가 죽였습니다.”
그에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나네트는 조금 전 대공을 반문할 때보다 약간 잠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작이. 말이지.”
“예. 제가.”
“윌리엄 로헤올을 죽인 것처럼.”
뮌제는 턱을 약간 들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로헤올 내부의 문제입니다.”
“보이터 경도 공작이 죽였다 했던가.”
“아리오의 왕자를 죽이려 한 자입니다.”
“공작. 온느발레의 귀족을 셋이나 죽였다는 말인가.”
“죄인을 셋이나 처단해 드렸다는 말입니다.”
황제는 웃었다. 온화해 보일 정도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뮌제 로헤올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눈길을 올렸다. 저벅 하는 소리가 한 번 들렸다.
나네트는 다정하게 물었다.
“대공. 어찌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