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그 미소가 거슬렸다.
저런 표정을 받아 본 게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부왕과 모후 생전에 몇 번.
그 시간 외에 그는 누군가의 기특한 사람이 된 적이 없었다. 그는 왕이었다.
발롬브로사는 이 여자가 그를 동등한 사람으로 보고는 있는 건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서 한 말은 다른 말이었다.
“그대는 일단은 아리오를 위해 온느발레를 막아 준다는 사람이니.”
물론 발롬브로사는 그런 식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 여자를 믿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호의 한 조각이라도 더 보여서 뮌제가 아리오에 모래 한 알만큼이라도 아리오에 호감을 가질 수 있게 노력하는 것뿐이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 그 불신을 굳이 표현하여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이 여자가 아리오를 도울지는 모르겠으나.
발롬브로사의 날카로운 말에 뮌제 로헤올은 한숨 쉬듯 웃었다.
그녀는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 손끝으로 서신을 가볍게 눌렀다.
왕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그 손끝에 향했다. 그 눈길 위로 뮌제 로헤올의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모처럼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한 가지 말씀 여쭙겠습니다.”
왕은 눈을 들었다.
“황제에게 엎드려 사죄할 결심이 되셨습니까?”
엎드려 사죄할 결심. 말초적인 단어였다.
이 무례한 말에 분노도 일지 못하게 기가 막혔고, 기가 막힌 만큼 두려움이 일었다. 상대가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왕은 입가를 쓸어내렸다.
“그대는……. 정치인이지요. 나와 같은.”
“전하에 비할 수 없이 교활하게 살아 왔지요. 전하께서는 그저 위에서 억누르시면 되었지만 저는 상생하며 억눌러야 했으니까요.”
“…….”
“어린아이의 머리는 어른의 것보다 창의적이고, 그래서 그 어린 시절부터 교활해지는 버릇을 들이면 참 창의적으로 교활해집니다.”
청소년 시절 로헤올의 가주가 된 이가 말했다.
발롬브로사는 어딘가 꼿꼿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툭 말했다.
“황제는 내게 분노했겠지.”
“그랬겠지요.”
“날 엎드리려 하겠지.”
“하고도 남습니다.”
“이렇게 될 걸 그대는 알았을 테고.”
“예.”
황제가 오리라 예상하였으니, 이왕에 온 황제가 눈앞에 있는 왕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는 것도 예상하였을 터다.
발롬브로사의 질문에 뮌제 로헤올은 가분한 어조로 툭툭 대답했다. 속 빈 것처럼 가벼웠다.
[아리오 왕실을 고의로 어지럽히려 든 죄, 작지 않습니다. 이후 온느발레의 누가 윌리엄 로헤올을 대신하여 오든 제가 비호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오에서 원하시는 대로 수사하십시오.]
굴욕을 앞에 둔 왕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대는 나를 위해 나서 주지 않겠군.”
설령 약속대로 아리오를 위해 나서 주더라도, 왕을 위해서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 평민 행세까지 하며 아리오의 귀족들에게 멸시당하기까지 했던 사람이니, 왕국의 왕이 황제에게 멸시당하는 것쯤이야 심상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그대, 황제가 내 나라에 오길 원했던 거겠지.”
“…….”
“황제의 진정한 목적도 그대를 만나는 것일 테고.”
“…….”
“그대와 황제의 힘겨루기에 애꿎은 아리오와 내가 휘말리는 거요.”
“…….”
“왜 아리오를…….”
하는 말이 다 옳다는 듯 앉아 있던 뮌제 로헤올은 대답했다.
“제게 그나마 익숙했던 왕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맡았던 분이 아리오의 왕자가 아니라 슈라이버의 왕실 일원이었다면 슈라이버로 갔겠지요.”
“겨우 그런 이유로 아리오를 이용했다…….”
“아리오는 온느발레 내부의 정쟁에 휘말린 약자입니다. 비호하겠습니다. 애꿎은 이들을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
“그래도, 전하께서 저를 감탄시키십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받아들이시는군요.”
“이쯤 되니 심히 불쾌하군. 예의를 갖추어 말씀하시오. 그대 앞에 앉아 있는 난 한 국가의 왕이오.”
더 참지 못하고 잘라 내니 뮌제 로헤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앞에 위즈로 있는 게 아니라 뮌제 로헤올로 있는 것인데도, 그런 표정을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뮌제 로헤올은 서신에서 손을 떼고 두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 뒤 고개를 까닥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조심한다고 하는데도 이 모양이군요.”
“…….”
그 순순한 사과에 발롬브로사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혹 저 말이 진심이고, 정말 이게 조심한 거라면, 황제는 도대체 얼마나 막 나가는 태도일 것인가.
도대체 온느발레 놈들은 왕국인을 대할 때 얼마나 개차반인 건가.
왕조차 이 모양으로 낮추어 보고 있다면, 평범한 왕국인들은 얼마나 천하게 보고 있을 것인가.
차라리 일부러 살살 약 올린 거라고 해 줘……. 온느발레 이 끔찍한 놈들…….
그의 표정이 어두워져서 그런지 뮌제 로헤올은 달래듯 말했다.
“부디 노여워 마십시오. 전 조금 전까지도 황제에 대해서도 경칭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그 황제보다도 급 낮은 왕은 닥치고 있으라는 건가?”
“아, 말이 또 그렇게 됩니까? 아, 그렇군. 그렇게 되는군요.”
“…….”
왕은 뮌제 로헤올이 지금까지 일부러 그를 깔짝깔짝 건드리며 약 올리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탑주 그 얄미운 노인네를 대하는 것보다도 더 빡치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상상했던 로헤올 공작은 이것보다는 진중했다. 상상했던 로헤올 공작보다 훨씬, 아주 훨씬 선뜻 잘 웃는 여자를 보다가 왕은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페레이라 백작 앞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온느발레 대귀족처럼 굴더니.
발롬브로사는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씨근덕거릴 것 같은 호흡을 참고 말을 돌렸다.
“와서 뭘 할 것 같소?”
“절 죽이려 하겠지요. 아리오에 분노하였을 테니 그 분풀이도 할 테고.”
“…….”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겁니다. 꽤 바쁜 사람이라서.”
“국무를 보긴 하오?”
비꼬았다. 왕국들을 우습게 보며 왕국들을 분노하게 하거나, 뮌제 로헤올을 처리하려 하거나. 그런 일이나 하며 탱자탱자 노는 게 아니고?
뮌제 로헤올은 작게 웃었다.
“강한 황권은 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방법이 거칠긴 하지만 황제는 일하고 있습니다.”
“…….”
일관되게 비난만 하고 일관되게 적의만 비치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원수에 대해 인정할 건 인정하기는 정말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왕은 거짓말처럼 이 여자에게 더 두터운 경계심을 세웠다.
그 단 두 문장에서 뮌제 로헤올의 냉혹한 이성을 느끼게 하는 것도 대단한 재주였다.
부드러운 낯으로 왕을 가지고 놀고 있던 뮌제 로헤올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전하. 조언드리건대, 황제를 영접할 때에는 반드시 저와 계십시오.”
그리하고 뮌제 로헤올은 물러갔다.
회의실에 홀로 남은 발롬브로사는 제 쪽으로 서신을 끌어왔다. 심지어 황제의 친필 서신조차 아닌 이것.
그는 조금 전 뮌제 로헤올이 했던 것처럼 그 위를 다섯 손가락 끝으로 눌렀다.
[그래도, 전하께서 저를 감탄시키십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잘 받아들이시는군요.]
패가 되어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뮌제 로헤올뿐이었다면.
그랬다면, 뮌제 로헤올이 본디 생각했던 것처럼 극심히 스트레스 받으며 이를 갈았을지도 모르지.
발롬브로사는 뮌제 로헤올을 믿지 않는다. 뮌제 로헤올을 믿어서 선뜻 페레이라 백작을 신문 시작한 게 아니었다.
* * *
아리오 복식.
에흐베 복식.
두 예복을 앞에 둔 뮌제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는 아리오 왕실에서 준비해 준 옷이요, 하나는 라파엘이 보내 준 옷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에흐베의 예복 소매를 들어 올렸다.
[그에게서 너를 보든 윌리엄을 보든 너는 그를 허락했어.]
피로에 젖은 낮은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뮌제는 무표정으로 그 옷을 내려다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엄지가 부드럽게 소매 끝을 쓸었다.
오른손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 일부가 소매 옆으로 얼핏 보였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을 제게 허락하십니까?]
그녀는 그 반지 일부를 눈에 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감정과 충동으로 말씀하셨을 리 없습니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뮌제는 아리오의 예복을 가리켰다. 대기하고 있던 젊은 여성은 멀쩡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두 하녀는 흠칫 놀랐다. 세 사람 다 에흐베에서 온 이들이었다.
두 하녀는 시녀의 지휘에 따라 뮌제를 환복시켰다.
대공이 마련해 준 저택이 아닌 서점에서 모든 치장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거울을 확인한 뮌제는 거울을 통해 시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에흐베 대공의 보좌인 루시안의 첫째 여식.
뮌제가 에흐베의 본성인 드비에 성에 머물 때 종종 시중들던 사람이라 서로가 그럭저럭 익숙했다. 오로지 뮌제를 위해 드비에 성에 드나드는 귀족 아가씨에게 뮌제는 미소를 지어 보냈다. 남작 가의 귀한 아가씨로 살면서 이리 초라한 곳에 발을 디뎌 본 적 없었기 때문인지 이곳을 신기해하는 기색이 여전히 역력했다.
전 로헤올 공작은 부드럽게 말했다.
“시중 고맙습니다, 레이디. 대공께 감사드린다고 전해 줘요.”
“제 기쁨이었습니다. 말씀 전할게요, 각하.”
“너희도 수고했다.”
두 하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하녀들은 허리를 굽혔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대공이 마련해 준 저택에 주로 머물고 있던 베렐도 오늘만큼은 뮌제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뮌제는 기사에게 말했다.
“다녀오겠네. 서점에 남아서는 안 돼. 며칠만 더 저택에 있게.”
“예, 각하.”
그제야 비로소 서점의 문이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경.”
“공.”
오래간만에 만나는 엘르시어가 뮌제를 향해 미소했다. 뮌제는 그 여전한 웃음을 보다가 흐리게 웃었다.
오늘은 황제가 얼숍에 오는 날이다.
모든 게 잘 흘러갈 것이다. 악마를 상대하는 것보다야 인간을 상대하는 게 그나마 쉬웠다.
뮌제는 황제를 맞이하는 자리, 발롬브로사의 왼팔과 팔이 맞닿을 수도 있게끔 애매하게 뒤에 서 있었다.
황제는 퍽 수준 높은 마법사와 함께 먼저 나타났다. 수행원들은 그 직후 다른 마법사들이나 아티팩트와 함께 나타났다.
여기 서 있는 아리오인 중 황제를 직접 만나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찬란한 금색으로 휘감긴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많은 이가 기겁했다. 그리고는 자기 반응에 놀라 곧바로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그 폭군이 저 사람이라고? 더러운 괴물 같은 게 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애로운 인상이지 않았나?
그리고 아리오의 왕은.
발롬브로사는 제 선친이 땅으로 돌아간 이래 처음으로 허리를 굽혔다.
“온느발레의 황제를 뵙습니다.”
저희 왕의 굴욕을 눈앞에서 보게 된 아리오인들은 대경했다. 본능적으로 분노의 비명을 지를 뻔한 기사는 이를 악물고 더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의 아리오인들은 모두 몸을 숙이고 있었던 탓에 황제가 미소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뮌제도 그걸 보지‘는’ 못했다.
나네트는 아리오에 나타난 직후를 제외하고는 뮌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발롬브로사다.
오로지.
“아리오의 왕이여. 이리 만나게 되어 내 진심으로 기쁘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무릎 꿇으라.”
황제는 부드럽게 명령했다.
발롬브로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니, 발롬브로사뿐만 아니라 아리오의 귀족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