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83)화 (83/120)

# 82화

뮌제는 다시 고개를 세웠다. 더는 라파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대로 앞을 보며 멍하게 눈을 굴렸다.

라파엘은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면서 뮌제의 뒷목을 부드럽게 지압했다. 직전까지의 자세가 목에 꽤 부담이 갔을 것을 알아서.

그 손길을 받으며 뮌제는 대답했다.

“그냥…….”

“응.”

“네가 마법사든 아티팩트든 굉장히 알차게 사용하는 것 같아서…….”

“…….”

“물론 걱정은 되는데,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싶어서…….”

라파엘은 작게 웃은 뒤 걸터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일어나자. 살이 차가워.”

욕조에 들어가 있는 게 그녀의 오랜 취미인 만큼, 라파엘도 이를 겪은 적이 많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꺼내기도 여러 번이었다.

뮌제는 순순히 그의 손에 손을 올렸다.

물에서 나오자 그녀는 오히려 정신이 깬 것 같았다. 눈빛에 조금 전보다 훨씬 빛이 돌았다. 짧은 머리를 모아 대충 물을 짜내는 표정이 직전보다 훨씬 역동적이기도 했다.

라파엘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젖은 욕조에 걸터앉느라 코트 아랫부분이 조금 젖었지만 못 입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그걸 뮌제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걸쳐 주려고 했고, 뮌제가 그 전에 라파엘의 두 팔 사이로 들어왔다.

라파엘은 펼친 코트를 든 채로 멈칫했다. 이제 뮌제는 그의 허리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뮈즈?”

“후작을 생각하고 있었어.”

엘르시어 클리포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대공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대꾸하는 음성은 변치 않고 다정했다.

“그래.”

“…….”

뮌제는 젖은 발로 라파엘의 구두 위에 올라갔다.

일단 옷을 한 손에 몰아 잡은 라파엘은 익숙하게 그녀의 등을 받치고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이를 어르는 듯, 안락의자처럼 느긋하게 움직이는 걸음이었다.

그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물이 떨어졌다.

자취를 남기는 물이 처음에는 많았으나 빠르게 적어졌다.

라파엘은 카운터의 의자에 뮌제를 앉히려 했지만, 뮌제가 거부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대로 서점 안을 돌아다녔다. 한참.

보이지 않게 뮌제를 경호하고 있던 에흐베의 기사들은 에흐베 대공이 여기 도착했을 때부터 밖으로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었더라도 두 사람은 똑같이 했을 터다.

빈 책장들만이 남아 있는 서점 안은 이제 조용하게 빈 냄새만 났다. 책 냄새는 더는 나지 않는다.

구두가 바닥을 밟는 소리만 간간이 나는 가운데, 라파엘은 뮌제의 젖은 등을 안고 있는 손을 통해 무얼 느꼈다.

잠깐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그녀의 머리 위로 제 코트를 덮어씌웠다.

가서 갈아입고 오라거나 물을 닦자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코트에 가린 뮌제의 등을 다시 지그시 받쳤다.

그때 뮌제가 불쑥 말했다.

“나, 중앙탑 부탑주였던 적이 있거든.”

라파엘의 쇄골 즈음에 눌린 그녀의 목소리가 번져 나왔다.

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알았어?”

“아니.”

“놀랐지.”

“응.”

굉장히 놀랐다.

탑주와 비슷하게 부탑주도 그 자리에 오르려면 ‘머리’를 써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부담이 탑주보다는 훨씬 덜했다. 타국과의 정치와 관련해 탑을 대표하여 나서는 이는 오로지 탑주뿐이었다.

부탑주들의 정체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세계 정세에 관계없을 수 있도록. 그 알력 다툼과 정치에 말려들지 않도록. 연구와 중앙탑 경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래서 부탑주가 되기 위한 자격으로는 각자의 학문적 성과가 더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뮌제의 정체를 탑주가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 비상시에 뮌제의 덕을 보기를 바란 점도 어느 정도는 있었을 테지만, 다른 학자들은 뮌제의 정체를 모른다. 다른 학자들에게 그녀는 정당하게 부탑주에 오른 학자일 터다.

“…….”

라파엘의 손에 아주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윌리엄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이, 얼마나 깊이 연구해 왔기에 그걸 부탑주가 될 만한 학문적 성과로 이을 수 있었던 건가.

그는 뮌제가 그간 얼마나 간절하게 살아 왔던 건지에 대해 이렇게 또 한 가지 알게 되었다.

뮌제는 라파엘이 한 것처럼, 라파엘을 안은 팔에 좀 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부탑주가 아니야. 조금 아슬아슬한 짓을 했었어.”

“…….”

“아리오에 중앙탑이랑 온느발레를 팔았어.”

대공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팔아?

그의 의문을 알았는지 뮌제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덮고 있던 코트가 뒤로 넘어갔지만, 그녀의 등을 안고 있던 라파엘의 손에 걸렸다.

라파엘이 다시 그녀에게 코트를 덮어 주는 사이 뮌제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리오에 해 끼친 아티팩트를 탑이…….”

전조 없이 끊겼다. 뮌제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침묵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굳이 그녀의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굳이 걱정하는 부름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렸다. 그러나 한 번, 코트 위로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전 공작은 빠르게 목소리를 진정시켰다.

말을 이었다.

“그걸 탑이 아리오인에게 팔았다고.”

“…….”

“그런데 그 아티팩트를 만든 사람은 온느발레인이라고.”

그럼 탑은 선택을 해야 한다. 중앙탑이 전부 잘못했다고 받아들일 건지, 온느발레도 잘못했지 않느냐고 화살을 돌릴 건지.

미쳤다고 후자를 택하겠느냐마는.

뮌제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일로 후작을 알게 됐어.”

“…….”

“자료를 찾으려고 여기에 왔었거든.”

라파엘은 느리게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뮌제는 함께 젖고 있는 친구의 표정을 잠시 살피다가, 천천히 이었다.

“내가 그에게 약해지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다시는 여기 오지 말라고 했었어. 멀어져도 상관없었다는 소리야. 그 마음은 여전해. 멀어져도 상관없어.”

라파엘은 그제야 그녀가 어째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아래턱이 떨리려는 걸 느낀 그는 이를 사리물었다.

그 사이에 뮌제는 친구에게 굳게 약속하듯 말했다.

“그를 허락한 게 아니야.”

[뮈즈. 너는 그를 허락했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원하는 게 있어. 그것뿐이야. 그를 허락한 게 아니야.”

[그에게서 너를 보든 윌리엄을 보든 너는 그를 허락했어.]

클리포드 후작에게 곁을 허락했다면, 그게 뭐 어떤가. 뮌제 자신에게 ‘친구’ 한 명이 늘어나는 게 뭐 어떤가. 특별한 일이라 동요하고 마음 무겁지만 그건 라파엘이 감당할 일이었다. 뮌제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며 후작을 완전히 쳐낼 필요는 없었다.

라파엘은 옅은 한숨을 흘렸다. 이런 말을 하라고 그때 그리 말한 게 아니었다. 특별한 것처럼 진행되고 있음을 인지는 하고 있으라는 말이었지.

“왜 내게 그걸 설명해?”

그는 뮌제가 그 질문을 오해하지 않길 바라며 부드럽게 물었다. 뮌제에게 선을 긋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다. 선을 긋는 게 아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대공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뮈즈. 네 인간관계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아니…….”

“그를 허락했다면, 그게 뭐 어때.”

“…….”

지나치게 차가워진 뺨을 감싼 그는 고개를 내려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엘르시어 클리포드 후작에게서 너를 보지도 말고 윌리엄을 보지도 말고 부디 건강한 관계를 이어 가라는 따위의 조언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와 뮌제의 관계부터가 건강한 관계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허락해. 그를 아껴. 그를 소중히 여겨. 무엇이든 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사랑만 하지 않으면 된다.

온느발레의 황제가 경계할 정도로 ‘까딱하면 돌아 버릴’ 에흐베 대공은 정말 다정하게, 부드럽게, 뮌제의 이마에 입 맞추고 입술을 떼었다. 오로지 뮌제에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는 그대로 속삭였다.

“뮈즈. 황제가 와.”

그 낮은 목소리를 들은 뮌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공에게서 내려갔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은 서로에게 불필요했다.

라파엘은 젖지 않은 손등을 뮌제의 뺨에 한 번 대어 보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무 차가운데.”

“…….”

“수건은? 갈아입을 옷은?”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뮌제는 친구가 걸쳐 준 코트 앞섶을 주섬주섬 모았다. 대공은 이마를 짚었다.

* * *

상석에 앉은 발롬브로사는 오른편에 앉아 있는 뮌제 로헤올에게 서신을 밀어 주었다.

황제가 친히 오겠다는 내용의 서신이었다.

그 서신을 읽어내린 뮌제 로헤올은 픽 웃었다. 가볍기도 가벼운 웃음이었다.

발롬브로사는 그 웃음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하 웃었다. 그는 저 서신을 보고 저런 식으로 웃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제가 온다니. 황제가!

“므아 레쇼. 인컨터드 언 드 르……암프허?”

말씀해 보시오. 황제…… 폐하를 막을 수 있소?

아리오의 왕과 온느발레의 귀족으로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보다는 말이 높아졌다. 이 편이 마땅한 격식이었다. 그는 ‘아리오’의 왕이고, 뮌제 로헤올은 ‘온느발레’의 ‘대’귀족 ‘가주’ 혹은 ‘전 가주’ 혹은 ‘전전 가주’이기 때문이다.

뮌제 로헤올은 온느발레어를 사용하는 왕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리고 유창한 아리오어로 대답했다.

“페레이라 백작은 그렇다 쳐도, 로헤올 공작에 대한 문제도 엮여 있는데 그럼 황제 외에 누가 올 수 있겠습니까? 예상 못 하셨습니까?”

“…….”

이 빌어먹을 여자.

위즈일 때부터 참 교묘하게 잘도 엿 먹이는구나.

웃는 모양을 따라 난 눈주름이 구겨졌다. 발롬브로사는 이를 악물고 웃었다. 그의 앞에 있는 이가 뮌제 로헤올인 이상 예의를 지켜야 했다.

뮌제 로헤올은 그 애쓴 웃음을 보고 조금 전보다는 정중하게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서신을 회의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리 촉박하게 오는 게 무례라는 건 황제도 알 것입니다.”

“무례를 알아? 아리오를 우습게 보고 통보한, 통보하신 것이겠지.”

발롬브로사의 날카로운 첨언에 뮌제 로헤올은 다시금 미소했다. 예의상으로라도 그 말에 부정하지 않는 꼴이 짜증스러웠다.

황제가 무례를 알긴 무슨.

현 황제는 로헤올마저도 치워 버릴 정도로 강력한 황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 황제가 무엇이 무례인지 무엇이 결례인지 알 리가 없다. 설령 알더라도 사실을 무시할 것이다.

황제가 하는 언행이 예의의 기준이라고 선포해도 이상하지 않을 폭군이니까.

그래서 공식적으로 오겠다 하지 않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온다 하면 시일이 촉박한지의 여부는 상관없이 완벽히 성대하고 아름다운 영접의 예를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영접의 예가 황제의 마음에 흡족하지 않는다면 어떤 패악을 부릴지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공식적으로 오는 것도 문제였다. 조용히 와서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것인지.

발롬브로사는 뮌제 로헤올의 앞에 놓인 서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페레이라 백작을 그토록 아끼기에 행차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렇다고 작고한 로헤올 공작을 아껴서 오는 행차일 것 같지도 않아.”

깔짝깔짝 간을 보던 왕의 말투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그는 더는 황제를 높이지 않았다. 그에 대해 뮌제 로헤올이 아무 반발도 하지 않는 걸 보고 완전히 안심한 발롬브로사는 숨을 들이켜고 이었다.

“……조심하시오, 공작.”

조용히 나온 경고에 뮌제 로헤올은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는 이내 기특한 것을 보듯 빙그레 웃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호의를 받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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