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마법과 관련된 윌리엄. 마법과 관련하여 죽은 동생.
마법을 향한 감정으로 특수 수사기관의 장을 맡은 것.
뮌제 로헤올이 겨우 그따위 상황에 공감하여 흔들릴 사람인가.
[윌리엄 로헤올을 맹목적으로 사랑한 것은, 그리해야 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윌리엄 로헤올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이 맹목적임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했다 함에도 불구하고, 뮌제 로헤올에게 윌리엄 로헤올은 어떤 식으로든 감정을 들끓게 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에는 틀림이 없었다.
감정은 버릇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이유로 시작한 혐오나 장난으로 시작한 혐오가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이유도 없이 진심으로 혐오할 수 있듯이.
증오가 버릇이 될 수 있듯이. 책임감이 버릇이 될 수 있듯이.
오래 끌어온 사랑도 버릇이 될 수 있다.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가져오다가 이미 끝났다 하는 사랑에도 부스러기 같은 후유증이 남는다. 버릇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어느 순간 인식하고 모질게 버리려 해도 단숨에 버려지는 게 아니야.
버릇이 되어 버린 감정을 완전히 털어 내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뮌제 로헤올은 겨우 그따위 상황에 공감하여 흔들릴 사람이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든지 간에 뮌제 로헤올에게 윌리엄 로헤올은 결코 작지 않고, 결코 의미 없지 않다.
“…….”
황제는 남자를 물렸다.
그리고 생각을 계속했다. 감히.
감히.
감히 그따위 귀족이. 왕국의 귀족 따위가. 알고 지낸 지 몇 년도 되지 않은 귀족 따위가. 감히.
감히 뮌제 로헤올의 곁을.
‘뮌제 로헤올이 감히 마음을 내어 주었다’가 아니었다. ‘클리포드 후작이 감히 뮌제의 마음을 얻어 냈다’였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피로와 분노가 겹쳐 되돌아온 버릇이었고, 그래서 익숙했기에 더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칵.
나네트는 옆방으로 자리를 피해 있던 사람이 이 침실에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느 순간 멈춰 있던 검지 끝이 다시 팔걸이 끝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톡.
“온느발레로 돌아오지 않겠다…….”
‘온느발레로 돌아오지 않겠다. 그러나 황제는 도발해야겠다.’ 이건가.
나네트는 픽 웃었다.
뒤로 다가온 남성이 황제의 목을 느슨하게 휘감아 안았다. 긴 손가락이 유혹하듯 황제의 오른팔을 쓸었다.
“로헤올은 아직도 주인을 정하지 못했고.”
로헤올에서 뮌제 로헤올에게 찾아가려 할 수도 있으리라. 뮌제 로헤올이 황제에게 이만큼 충격적으로 무례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를까, 그 전에는 로헤올과 로헤올의 봉신 가주들은 뮌제 로헤올을 어떻게든 되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뮌제 로헤올은 로헤올을 버렸다.
온느발레도 버렸다.
더는 황제를 향한 그 어떠한 존경심도 보이질 않을뿐더러, 황제를 자기 원하는 대로 조종하려 하고 있었다.
“그 사람, 내가 아리오로 걸음하길 원한다.”
“…….”
‘온느발레로부터 아리오를 보호해 줄 테니 아리오는 페레이라 백작을 마음껏 치죄하라’ 했다던가.
그때부터 이미 뮌제 로헤올은 황제를 원하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에게 능히 맞설 이는 온느발레에 황제 외에 없다. 지금 온느발레의 귀족들 중 누가 뮌제 로헤올에게서 페레이라를 구출해갈 수 있겠는가.
황제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이렇게 또다시 도발한 것일 터.
“내가 움직여 주길 원한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는 게 괘씸하다. 원하는 만큼 나를 놀려 보겠다는 거지.”
“…….”
“그리고, 그래, 아리오의 왕도 괘씸하다.”
페레이라 백작이 뮌제에게 무슨 꼴을 당하든 솔직히 관심 밖이지만, 아리오에 구류되어 있다는 건 분명 문제였다.
왕국 군주의 당연한 권리도 황제의 앞에서는 없어진다.
감히 무얼 주장하는가. 소국의 왕 따위가 감히 누구에게 무얼.
차라리 로헤올은 온느발레의 유서 깊은 가문,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귀족이기라도 하지.
황제는 팔걸이를 두드리던 손을 올렸다.
남자는 황제의 어깨 앞으로 머리를 내렸다. 황제는 그의 긴 머리카락을 잡았다.
조용히 정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황제는 문득 입을 열었다.
“백작. 그 사람이 아리오를 끝까지 보호할 것 같은가?”
“…….”
“자네라면 어떻지?”
여태 말없이 황제를 안고만 있던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한숨 같은 웃음소리가 한 번 났다. 황제의 신분 높은 정부의 낮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저라면, 원하는 걸 얻으면 버리겠지요.”
“그렇지. 그게 보통이야. 그 사람은 어떨 것 같은가?”
“…….”
백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황제는 직전보다 더 잠긴 목소리로 짧게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게, 그 사람도 꽤 교활한 사람이거든.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야.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게 없어. 다른 정치가들과 다를 게 없고, 다른 가주들과도 다를 게 없어.”
“…….”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그 사람은 이 나라에서 곧고 정직하고 청렴하고 의리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
오래전부터 로헤올 가문이 일관적으로 지켜 온 이미지가 있기도 하였다. 제국에게 골칫거리였던 더러운 땅을 자진하여 가져갈 정도의 충신이라 하는.
거기에 뮌제 로헤올 개인이 쌓은 이미지가 너무도 좋았다.
마법사들의 최대 적수.
사악한 마법사들과 아티팩트들로부터 온느발레를 지키는 방패.
마냥 차갑고 계산적으로 보이는 다른 대귀족 가주들과 다르게 동생을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따뜻한 사람.
어릴 적부터 사귀게 된 에흐베 대공과 여전히 우정을 이어 가고 있는 어떤 친구.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는 황제와 친동생에게 살해당하였다는 피해자를 향한 연민까지 더해졌다.
다른 가주들과 뮌제 로헤올은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인데 아주 우스운 일이다.
“로헤올로도 돌아오지 않겠다 하는 그 사람이, 아리오에게 해 끼치는 것에 주저할 이유가 있나? 해 끼치고 그저 떠나면 되는데.”
황제에게조차 험한 말을 퍼붓는데 과연 아리오를 존중할까.
남자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었다.
“아리오의 편을 들어 주겠다고 굳게 했다는 약속.”
“…….”
“그거, 확실히 엄중하게 지켜야 할 약속이야. 그러나 그것도 그 사람이 로헤올을 계속해서 책임질 시의 이야기지. 그 사람은 이미 온느발레와 로헤올을 버렸으니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어.”
허리를 세운 남자는 황제의 오른 어깨를 조심스럽게 짚었다. 나네트는 오른손으로 그 손을 잠시 덮었다.
황제는 그대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가 시리게 아렸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한 차례 훑었다.
“권리는 누리면서 의무와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막돼먹은 자를 몇몇 봐 왔으나, 그건 철 덜 든 놈들의 유희였지. 저렇게 이성적으로 계산한 무책임을 본 바가 없다.”
“…….”
“아리오에게 무엇을 약속했든 그 사람은 자기 목적을 이루면 아리오에서 등 돌릴 거야. 그리고 그 사람을 믿고 이 나의 나라에 감히 맞서려 한 자는 값을 치러야지.”
“…….”
“백작.”
“예, 폐하.”
유혹하듯 무겁게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백작은 대답한 직후 몸을 굽혀 황제의 머리에 입맞추었다.
황제는 눈 떴다.
“난 내 발 앞에 발롬브로사를 무릎 꿇리기를 원한다.”
차갑고 담담한 선고였다.
온느발레의 황제가 말했으니 이루어질 것이다. 황제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그간 왕국들을 너무 다정하게 대했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번 황제 들어서서 왕국들의 불만이 특히 높아졌다는 건 온느발레의 핵심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저 미소했다.
황제는 남자의 손을 덮고 있던 손을 더 위로 올렸다. 허공을 더듬는 그 손에 백작은 뺨을 가져다 대었다. 나네트는 남자의 뒷목을 감싸 앞으로 끌어내렸다.
남자에게 가볍게 입 맞춘 황제는 코끝이 맞닿는 거리에서 나긋하게 속삭였다.
“아리오에 가야겠다.”
그리고 황제의 밤은 시작되었다. 어둡고 붉고 농밀하게 녹았다.
* * *
새벽이었다.
“황제가 아리오로 행차하려 합니다.”
보고를 들은 라파엘의 눈이 잠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움직였다.
읽고 있던 서신을 전부 읽고 나서야, 대공은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탑주에게서 온 그 서신이 그의 손에서 풀려났다.
* * *
똑.
차가운 울림으로 욕실을 채웠다.
……똑.
고요했다.
뮌제는 눈 감은 채로 조용히 호흡했다.
훈김은 사라진 지 오래. 욕조에 채워진 물은 많이 식어 있었다.
똑.
물에 젖어 무거워진 옷도 식어 가며 그녀를 춥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뮌제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옷 입은 채로 물속에 잠겨 있는 건 그녀의 오랜 취미였다.
춥다.
머릿속에 바짝 날이 서고, 고통스러울 만큼 아주 조금 맑아졌다. 뮌제는 기대고 있던 등으로 미끄러졌다.
세운 무릎이 물 밖으로 나가고 대신 머리가 완전히 물에 잠겼다. 그녀는 그대로 한참을 잠겼다. 함께 잠긴 손이 욕조 바닥을 멍하게 둥둥 더듬었다.
정신도 천천히 함께 잠몰했다.
뮌제는 숨이 갈급해질 때에야 물에서 빠져나왔다. 쏴아아. 찰랑. 물이 출렁거렸다. 도로 무릎이 들어가고 상체가 나왔다.
물에 젖어 늘어진 머리카락에서 물이 차르르, 후드득 떨어졌다. 속눈썹은 위에 오른 물방울을 견디고 있었다.
그리고 젖은 코로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그에 조금 나른해진 눈을 떠 그 무거운 향기의 주인을 보던 뮌제는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 위에 맺혀 있던 물이 떨어졌다.
출렁거리던 물이 멈추고 욕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똑.
……똑.
뮌제는 물에서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촤악 하고 물살 가르는 소리가 생각보다 얌전하게 났다.
그녀는 욕조에 팔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라파엘도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대로 가만히 있던 뮌제가 입을 열었다.
“마법은…….”
그 한 단어를 만들어 낸 목소리는 조금 잠겨 있었다. 침을 삼킨 그녀는 추운 숨을 작게 내쉬었다.
뮌제는 손목에 입술을 한 번 묻어 물을 닦아 낸 뒤 다시 말했다.
“아니다. 이제는 자주 오지 말란 말도 못 하겠네.”
“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
“죽었다고 알려진 널 몇 년이고 찾다가 마침내 찾았는데…….”
초점이 잠시 흩어졌다가 돌아왔다. 뮌제는 그 문장을 더 이어 완성하지는 않기로 했다.
고개를 기울여 팔에 오른뺨을 기댄 그녀는 라파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은 그러고도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옅게 미소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뺨에서 치워 주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뜬 뮌제는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알고는 있어. 마법은 더럽고 끔찍한 거야. 마지막 악마가 사라졌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조심하면 좋겠어.”
[마법과 가까이 지내지 마. 더럽고 끔찍한 거야.]
전과 많이 다르지는 않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을 터라고 생각했고, 이제 그는 그 이유를 안다. 뮌제가 마법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제는 안다.
그러나 라파엘은 다른 특별한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짧게 웃고 말았다.
“전에는 멀리하라고 아예 딱 자르더니. 이젠 ‘조심하면 좋겠어’야?”
“아…….”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부분조차 그는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