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라파엘은 벽에서 머리를 뗐다.
“네가 그때 주변을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
“‘손대지 마시지요, 클리포드 후작.’”
불쑥 나온 말에 라파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런 사소한 말조차 기억하고 있었어? 죽은 윌리엄을 안고 정신없었을 텐데?
뮌제는 그의 반응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네게 관심 많아.”
“…….”
“나는 네가 그를 알아본 게 은여우단의 단장이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거 아니었구나. 하긴 그래. 추측해서 불렀다고 하기에는 너무 확신 넘쳤지.”
다른 귀족의 초상화는 손에 넣기가 어렵다. 저택을 떠나게 반출되는 일이 없었다.
화가들이 기억에 의존하여 그린 초상화를 팔기도 하지만, 그래도 직접 마주 보며 그리는 것보다는 덜 정확했다. 그런 초상화조차도 팔려 가는 일 없게 보통은 가문에서 후원하는 화가에게 초상화를 맡겼다.
뮌제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아리오의 귀족들과 접촉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타국인 중 뮌제의 정확한 얼굴을 알고 있는 이는 직접 뮌제를 본 사람밖에 없다.
알려진 생김새라 해 봤자 머리 색과 눈 색, 그 외의 특징 정도에 불과하니, 염색과 언동의 경박함만으로도 충분한 대책이 되었다. 제이가 나타나기 이전, 그 누구도 위즈와 뮌제 로헤올을 연결짓지 못했다.
심지어, 십 분 정도라고는 해도 뮌제 로헤올의 얼굴을 마주했던 은여우단의 기사조차.
다니엘은 제이를 살피기 위해 온느발레에 왔다가 뮌제의 자비로 살아 귀국한 기사였다.
그런 판국에 라파엘은 엘르시어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만일 만났다면 엘르시어도 라파엘을 알아보았을 터. 엘르시어는 라파엘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뮌제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턱을 괴었다. 촛불이 닿지 않는 곳에 그림자가 진 얼굴에 담담하지 못한 기색이 어렸다.
“그의 여동생에 대해 알고 있어?”
“…….”
“언제부터?”
“네가 은여우단 기사를 살려서 돌려보내고 나서.”
아리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면 제이 왕자를 각별하게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발롬브로사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일일 테니.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제대로 경고하려면 말로만 경고할 게 아니라 아예 기사를 죽이는 게 가장 좋았다. 발롬브로사가 ‘이 사람 물건이라’고 괜히 감탄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기사를 살려 보낸 건 로헤올과 아리오와의 관계를 위함이 아니라 기사의 상사인 엘르시어를 위함이었다.
뮌제는 라파엘의 답을 듣고 허탈하게 웃었다.
“하긴 많이 이상한 일이긴 했지. 그래도 네가 그를 조사했을 거라곤 생각 못했어.”
“네가 기사를 살려 보낼 만한 이유를 조사한 거지. 그러다 클리포드가 걸린 거고.”
“무서운 자식…….”
뮌제가 투덜거리자 라파엘은 빙그레 웃었다.
그땐 후작에 대해 알고도 그런가 보다 했다. 뮌제의 일을 몰랐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왜 후작이 뮌제에게 의미 있는지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 본 후작은 뮌제와 닮았다.
한데, 가까이에서 본 후작은 또, 윌리엄과 닮았다.
라파엘은 피로에 젖은 눈에 뮌제를 담다가, 녹진하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옆을 허락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었지.”
그 말을 하고 그는 다시 벽에 뒷머리를 기댔다.
눈도 감았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뮌제의 반박은 느리고 무겁게 왔다.
“……허락 안 했어.”
“했어.”
대공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뮌제가 아니라 뮌제의 속내를 전부 알 수는 없겠지만, 뮌제가 클리포드 후작을 허락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정도로 뮌제의 옆에서 시간을 보냈다.
라파엘은 주홍빛으로 어둡게 붉어진 눈가를 찡그리고 천천히 눈 떴다.
뮌제는 충격을 받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말했다.
“뮈즈. 너는 그를 허락했어.”
“…….”
“그에게서 너를 보든 윌리엄을 보든 너는 그를 허락했어.”
그리고 그건 특별한 일이었다.
알면서도 라파엘은 여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도 이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것이다. ‘일단은’ 지켜보는 것이다.
* * *
엘르시어와 뮌제가 길을 걸으며 나누었던 이야기는 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마법을 느껴 봤자 겨우 수십 미터라 했다고?
그 수십 미터 안에 황제의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몹시 가깝게. 다섯 걸음의 거리도 되지 않게 가까이.
뮌제는 몸을 숨긴 누군가가 그 대화를 듣고 있음을 분명 알았다.
알고도 그 민감한 이야기를 했다.
“……감히.”
긴 침묵 끝에서, 황제는 달콤하리만큼 우아하게 말했다.
감히.
뮌제 로헤올은 그 누군가가 황제의 사람이라고 짐작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황제는 그 조용히 간교한 사람이 일부러 도발한 것임을 알았다. 알 것 같았다.
황제의 고개가 약간 기울었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라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앞으로 조금 흘러내렸다. 존귀한 이는 손끝에 턱을 기댔다.
감히.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황제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자리에 대공은 없었더냐.”
“없었습니다.”
“그래?”
나네트는 픽 웃었다. 하루 일정을 소화하느라 쌓인 피로에 물들어 있던 금빛 눈동자가 눈꺼풀에 살짝 가렸다.
“그 사람이 그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허락’한 걸 알면 대공이 가만히 있지 않을 듯한데…….”
“…….”
“까딱하면 돌아 버릴 남자인데 그 사람은 그걸 몰라.”
뮌제가 죽은 뒤 움직이지 않는 에흐베 대공을 끝까지 감시하며 살폈던 까닭도 그래서였다.
황제는 대공을 경계했다. 그녀가 대공에게 가진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온느발레의 군주는 우아하게 웃었다. 금방 사라진 웃음이었다. 이미 기울어져 있는 눈동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총기가 약간 가신 시선은 이미 흐렸다. 피곤했다.
황제를 도발하기 위한 대화였다 할지라도, 그 대화 내용이 극히 민감한 개인사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뮌제 로헤올은 그자를 허락한 것이다.
나네트는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클리포드…….”
“…….”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군.”
아리오의 귀족. 알고 지냈다 해 봤자 3년도 되지 않았을 자.
“클리포드 후작이라는 자, 누군지 아느냐.”
“클리포드 공작의 후계자입니다.”
“그래서 후작인가. 아직 가주도 되지 못한 자란 말이지.”
온느발레의 대귀족인 로헤올의 가주와는 격이 맞지 않는 자다.
격‘도’ 맞지 않는 자다.
“또. 다른 건?”
“은여우단의 장입니다.”
황제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루미나리에단의 전 단장과 은여우단의 현 단장. 특수 수사기관의 장이라는 공통점. 설마 그런 웃기지도 않는 공통점에 마음을 허락했겠느냐마는, 조금 거슬리기는 했다.
피곤한 한숨을 쉬고 넘어가려 했던 황제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바로 했다.
“아니……. 잠깐. 그럼 공작가의 후계가 왕에게 고용되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
황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리오의 왕권이 강하다 한들 공작가가 그런 일을 좌시할 리가 없는데.
로헤올 공작이 루미나리에단을 맡았던 것과는 달랐다.
뮌제 로헤올과 윌리엄 로헤올은 ‘어쨌든’ 황제의 사촌이었으며, 특히 뮌제 로헤올은 비밀리에나마 황제와 사적인 자리도 갖곤 하였던 사람이었다.
또, 그녀는 루미나리에단을 맡을 당시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는 가주이기도 했다.
윌리엄 로헤올이 루미나리에단을 맡는다 했다면 뮌제 로헤올은 극렬히 반대했을 것이다. 로헤올 공작의 동생이 황제에게 ‘고용’되는 것과 다름없는 그런 일은 유서 깊은 가문에게는 치욕이므로.
게다가 하나뿐인 후계자가 군주의 손에 들어간다는데 어느 가주가 허락하겠는가.
물론, 이는 윌리엄 로헤올을 향한 애정 같은 것들을 전부 제외하고 정치적으로만 판단을 했을 시의 이야기였다. 현실적으로 뮌제는 윌리엄이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다 허락했을 사람이었으니까.
황제는 뮌제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대부분의 까닭이 윌리엄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혹시 클리포드의 가족 관계에 무슨 특이사항이라도 있더냐?”
“가족이라면……. 후작의 누이동생이 급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 답을 들은 황제는 반응했다. 적당하게 살결 매끄러운 손이 가볍게 팔걸이 끝을 감쌌다.
‘동생’은 황제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당연히, 황제와는 다른 의미로 뮌제 로헤올 역시 예민하게 반응하는 단어였다. 뮌제 로헤올이 어린 시절부터 몸부림치며 품에 안아 왔던 단어였던 걸 모르는 온느발레 귀족이 얼마나 있을까.
나네트는 느릿하게 반문했다.
“……동생이?”
“예. 그 죽음에 마법이 관계있는 듯합니다. 기밀은 아니지만 널리 알려지지도 않은 일입니다.”
“마법에.”
“예. 공작 부부는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얼숍을 완전히 떠났고, 후작이 수도에서 클리포드를 대리하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이 은여우단의 단장이 되었습니다.”
동생. 마법과 관계있는 죽음. 그리고 은여우단.
“언제 일어났던 일이지?”
“대략 구 년 전입니다.”
“그 일가의 분위기가 좋았는지는 알고 있느냐? 그러니까, 그렇군, 가족 일원 간 사이가 좋았느냐?”
“적어도 공작 부부는 여식의 사망에 크게 상심하였던 듯합니다.”
“그럼 공작은 마법이나 마법사에 가진 분노가 크겠군.”
그렇다면 후계자가 마법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은여우단의 단장을 맡는 것을 오히려 기꺼워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사랑한 자식을 잃은 부모’나 ‘그런 부모의 복수심’ 같은 것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감정이라는 것에 젖으면 항상 이성적일 수 없다는 건 알았다.
황제는 입을 다물고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황제를 그리 크게 친애하는 것도 아니면서, 루미나리에단의 단장 자리는 상당히 흔쾌히 수락했던 뮌제 로헤올.
마법과 마법사를 경멸하는 이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뮌제 로헤올.
마법사의 원수라 불렸던 뮌제 로헤올.
그런데 알고 보니 마법사인 뮌제 로헤올.
그리고, 마법과 관련하여 동생이 죽은 엘르시어 클리포드…….
이제 와서 말하기를, 윌리엄을 진심으로는 사랑하지 않았다는 뮌제 로헤올.
이제 와서 보니, 마법과 관련 있었던 윌리엄.
이제 와서 보니, 결국에는 죽어 버린 윌리엄.
“…….”
황제는 팔걸이에서 뗀 손을 들었다. 눈앞을 종으로 가로지르도록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존귀한 여성은 뒤통수에서부터 어깨 앞으로 손을 끌어내렸다. 딸려온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사륵사륵 떨어졌다. 손은 어느 순간 팔걸이 위로 다시 뚝 떨어졌다.
황제는 생각했다. ‘혹시 모르지. 뮌제 그 사람, 윌리엄 로헤올 때문에 마법사를 증오한 것일지도.’
너무 논리를 뛰어넘은 억지처럼 들리지만 정말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전 전달받은 대화의 내용대로라면 윌리엄은 마법과 관련 있었다.
아티팩트를 뿌려 아리오에 해를 끼친 사람이 정말 윌리엄이라면, 뮌제 사후 온느발레에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던 아티팩트들도 윌리엄의 짓일 확률이 높았다.
그 윌리엄이 루미나리에단을 맡았었으니 범죄자가 자기가 저지른 사건의 재판관을 맡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황제는 사납게 입꼬리를 올렸다.
윌리엄 그 새끼는 어떻게 된 게 하나라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제 와서 그게 중요한가. 나네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감히…….”
감히.
팔걸이를 감싼 손의 검지가 천천히 움직였다. 톡……. 톡……. 톡……. 검지 끝이 팔걸이 끝을 아주 느긋한 주기를 두고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