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다시 앞을 본 뮌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아껴야 했거든.”
“…….”
“마음 다해 사랑해야 했거든요. 맹목적이어야 했습니다.”
“…….”
“공존할 수 없는 게 공존했습니다. 맹목도 있었고 이성도 있었다는 겁니다. 나는 내가 맹목적이었다는 걸 이성으로 알고 있었어요.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굴어야 했지. 살아 있는 윌리엄을 내가 할 수 있을 만큼 최우선으로 삼아 보살펴야 했습니다. 내가 윌리엄에게 너무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
“어느 선까지는 대공이 맞습니다. 그날 대공이 오시지 않았다면 난 분명 윌리엄과 함께 죽었을 겁니다.”
엘르시어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뮌제는 그를 특별히 돌아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예의를 잠시 버렸다. 그대로 서서, 그녀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뮌제는 한 발 앞선 곳에서 멈추었다.
그녀와 함께 나아가 있는 후작의 팔을 잡은 채로,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서늘하게 부는 바람에 긴장이 서렸다.
엘르시어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왜. 목숨을 걸 정도로 아꼈는데, 그 사랑에 감히 의문을 품어서?”
“예.”
“후작. 내게 원래 물어보려고 했던 걸 물어봐요. 궁극적으로 물어봐야 하는 걸 물어봐.”
지금 뮌제는 참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이해했다’는 한 단어를 가지고 냉혹하게 선을 긋던 사람 같지 않았다.
엘르시어는 이유도 모르게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잡혀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푼 그는 조용히 물었다.
“아티팩트로 아리오에 해를 끼친 이, 작고한 전 공작이 맞습니까?”
질문을 들은 뮌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돌아가신 윌리엄 로헤올 공작도 마법사이셨던 듯하고.]
그렇게 남을 것이다. 윌리엄은 마법사가 아니지만, 마법사로 남을 것이다. 악마에 잡아먹힌 이가 아닌 마법사로 남을 것이다. 아티팩트로 세상에 해를 끼친 마법사로 남을 것이다.
“어떨 것 같습니까?”
또다시, 같은 질문으로 돌아왔지만, 그럼에도 그는 대답을 들었다.
엘르시어는 마비된 것 같이 무거워진 손을 올려 입가를 쓸어내렸다.
윌리엄에게 도달할 수 있는 암시를 주었으면서도 확답은 피하는 건, 그녀가 로헤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다시 조각내어 살펴보면, 뮌제는 확답은 피했을지언정 윌리엄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암시를 주었다.
뮌제는 엘르시어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다가 살며시 웃었다.
“윌리엄의 명예를 끌어내리는 데에 이리 거리낌이 없으니, 내가 정말 윌리엄을 아낀 게 맞는지 의문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다시 그의 소매를 당겼다.
이번에는 엘르시어는 그녀에게 끌려갔다. 뮌제는 그가 걷기 시작하자 그제야 손을 거두었다. 엘르시어의 팔도 떨어졌다.
“후작.”
“예.”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윌리엄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습니다.”
“……싫어하십니까?”
“그리 한마디로 정의하지는 못합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복합적인지는 후작도 알 겁니다. 그래서 남에게 말할 때는 더 조심히 말해야 하고요.”
“…….”
“이렇게 말해 봅시다. 맹목적으로 사랑했지만 그런 상황이라 해서 윌리엄의 이면을 아예 보지 않는다는 건 아니고. 그리고 나도 사람이라고.”
뮌제는 클로크 아래에서 한쪽 소매를 잠시 매만졌다. 피가 많이 말라서 소매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날 사랑하려 노력한 사람이고 어떤 감정의 사랑이든 사랑을 내게 준 사람입니다. 분명 좋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 사랑 자체가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이었던 적이 많이 없다는 걸 나는 압니다.”
“…….”
“그런데 죄인이기 이전에, 로헤올의 가주이기 이전에, 나도 사람입니다. 다들 나 같은 대귀족 가주들을 무슨 별세계 사람처럼 보는데 우리도 힘든 건 힘들어요.”
“…….”
“윌리엄은 내게 굉장히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어째서 이 모든 것을 제게 허락하십니까?”
감상적인 고백을 들었으면서, 지체치 않고 하는 질문이 그것이었다.
소매를 만지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래봤자 클라크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라 엘르시어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감정과 충동으로 말씀하셨을 리 없습니다.”
“…….”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 * *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다정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촛불은 열 개 정도가 켜져 있었다. 뮌제가 무어라 말하기 전에 라파엘은 빙그레 웃었다.
“왔어?”
어딜 다녀온 거냐는 가벼운 질문도 없었다.
대신 그는 이걸 물었다.
“다친 곳은.”
엘르시어와 나갔다는 건 이미 보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고받았기에 묻지 않은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뮌제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도 보고받았을 텐데, 이렇게 굳이 직접 묻고 있지 않은가.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보았다. 뮌제는 어느 순간 살짝 눈을 찡그렸다. 문앞에 서 있던 그녀는 문을 닫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제야 대답했다.
“없어. 너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그래?”
그간 뮌제만 앉아 왔던 카운터의 의자에 앉아 있는 라파엘이 묘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클라크를 벗은 뮌제는 손님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윈저체어를 끌어와 거기에 앉았다.
검붉은 것이 잔뜩 묻어 굳어 있는 셔츠를 본 라파엘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옷은?”
“연구실에.”
“불편했을 텐데.”
“조금. 그런데 보는 눈이 있어서 못 갔지.”
“내려가는 게 귀찮았던 게 아니라?”
“사실 그거야. 그리고 지금도 귀찮아. 옷 내놔.”
뮌제는 당당하게 손을 까닥거렸다. 그 작은 움직임에 일어난 바람이 천천히 전해져 어떤 촛불이 흔들렸다.
라파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내려갔다 올게.”
“어이! 구. 어이구. 어딜 가시려고. 피곤하신 분에게 그런 걸 시키고 싶지 않아. 그냥 내놔.”
“…….”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챈 뮌제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했다.
라파엘은 약간 당황하여 눈을 깜박였다. 원래 그와 있을 때에는 편하게 말하긴 하지만, 이건 단지 ‘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씨 자체가 건들건들한 것이다.
뮌제가 기본적으로 가진 건 귀족의 말씨라서,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유들유들한 말을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얼떨떨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라파엘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라파엘? 왜?”
“너…….”
“음?”
그는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계속 웃었다.
이리 격 없는 말씨, 배워 봤자 아리오어로 배우고 써 봤자 아리오어로 썼을 텐데, 온느발레어로 쓰는 것마저 이리 자연스러울 수가 있나.
라파엘은 어느 정도 웃음이 사그라지자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말투.”
“어? 나? 아…….”
그가 웃는 걸 멀뚱하게 보고 있던 뮌제는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 이거. 그렇네. 진짜. 놀다가 이렇게 됐나?”
이제는 그 말마저 재미있었다.
라파엘은 픽 웃고는, 재차 이어진 그녀의 손짓을 보고 상의 겉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뮌제는 한 손에 턱을 괴었다.
“웃지 마. 노는 건 나한테도 저 사람들한테도 나름대로 각오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어.”
“응?”
“일단 나는 그때그때 알맞은 언행으로 저 사람들을 쓰러트려야 했고.”
거기에서 라파엘은 다시 웃었다. 눈이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뮌제는 말을 이었다.
“저 사람들은 혈압이 치솟을 걸 각오하고……. 놀러 왔다가 울면서 돌아간 사람들도 많아.”
“아.”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을 때나 상황을 이어 가기 귀찮을 때가 있거든. 그럼 그냥 실수인 척 여기저기 때렸어.”
용사들은 대체로 그럴 때 나왔다. 정수리 맞아서 기절한 용사나, 명치를 맞아서 기절한 용사처럼.
뮌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처 입을 것을 각오해야 함에도 위즈에게 끊임없이 다가오던 이들을 떠올리다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녀를 보던 라파엘은 나직하게 물었다.
“맞은 사람들은 살아 있어?”
“아니.”
심각한 얼굴로 부정했다.
물론 농담이었다. 뮌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탑주랑 이야기할 땐 온느발레어로 했거든. 그게 남았나 봐.”
벗은 겉옷을 내밀던 손이 멈칫했다. 왜 그러냐고 눈짓하자, 라파엘은 자기 셔츠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뮈즈. 셔츠를 줄까?”
“아니. 겉옷이면 됐어. 너 가고 나면 바로 내려갔다 올 거야.”
이번에는 그의 겉옷을 받아든 뮌제가 자기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라파엘은 다시 의자에 앉아서 등 뒤의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피곤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단추가 어디 딱딱한 것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나른했다.
피곤하다.
뮌제가 내는 소리이기에 기꺼운 소리를 들으며, 대공은 잠잠히 호흡했다. 작은 소리가 끊기고도 잠시 시간이 더 흐른 후. 뮌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클리포드 후작과는 별 이야기 안 했어.”
라파엘은 감고 있던 눈을 가만히 떴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옅게 웃었다.
“웬일로 그런 걸 말해 주지? 특별한 이야기를 했으면 어때.”
잠깐 휴식한 것만으로도 그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다정하게 부드러웠다.
뮌제는 그를 살피다 살짝 가늘게 뜬 눈을 굴렸다. 순식간에 생각을 마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인지 내가 후작에게 약해지는 경향이 있어.”
“이유, 정말 모르지는 않을 텐데.”
나직한 대답과 함께 다시 눈뜬 라파엘과 눈이 마주쳤다.
뮌제는 눈을 찡그리고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역시.
“너…….”
“나도 보자마자 느꼈는데, 네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어.”
싫은 상황이든 좋은 상황이든 미소를 짓는 버릇.
그 미소 지은 얼굴이나 나긋한 언행은 다른 사람들이 예의상 보이는 것과 어딘가가 조금 다르다. 버릇이 되었기에 훨씬 자연스럽고, 그래서 누군가의 눈에는 훨씬 작위적으로 보였다.
윌리엄을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던 뮌제의 눈에는 엘르시어의 미소 짓는 그 버릇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윌리엄과 비슷하므로.
그래도 뮌제는 엘르시어에게 본디 관심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그랬기에 윌리엄과 닮은 점을 빠르게 찾아냈다.
하지만 라파엘은 엘르시어와 여태 몇 번이나 만났다고 바로 알아보았을까.
그런 미소는 ‘보자마자 느낄’ 닮음은 아니었다.
엘르시어가 에흐베 대공이 버릇을 하나하나 살피게 할 정도로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눈길을 끄는 사람은 맞지만, 아리오의 귀족이다. 장래에 라파엘이 직접 엘르시어와 접촉할 일은 없으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가 위즈일 때 자주 접촉했다는 이유로 살폈다기에는 너무 자세히 살핀 것 같다.
뮌제는 지금 저희 두 사람 사이에 내려앉은 긴장감을 느꼈다.
눈을 가늘게 뜬 뮌제는 경고하듯 물었다.
“후작에게 관심 있어?”
“네게 관심이 있지.”
“…….”
“뮈즈. 너를 존중하여 네 행보에 감히 무례하게 손대지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네게 관심이 많아.”
그러니까 뮌제가 무얼 연구하는지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녀가 중앙탑의 학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뮌제는 사실상 유일한 관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