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그런 게 아니라.”
엘르시어가 또다시 말을 멈추자, 뮌제는 격려하듯 빙그레 미소했다.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오늘 왜 이리도 말실수를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짧게 한숨을 쉰 엘르시어는 그 배려를 받아들였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직접 살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리오의 왕께서는 이런 걸 언제고 수시로 직접 살필 시간이 있습니까?”
“그분이 바쁘지 않으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없는 시간도 만들어 내서 오실 거라 생각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
뮌제는 애매한 탄성을 흘렸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입을 열었던 그녀는 그대로 멈췄다가, 곧 폭 한숨을 쉬었다. 기사들에게 나가라 할까 하다가 차라리 걷기로 했다.
그늘지고 조용한 이곳은 생각을 정리하기에 지나치게 좋은 곳이었다. 뮌제는 카운터 쪽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두었던 클로크를 들었다.
“괜찮으면 좀 걷겠습니까?”
엘르시어의 눈이 그녀의 권유에 조금 커졌다. 고요한 변화였다.
어차피 그녀가 없다면, 책 한 권 남아 있지 않은 서점에 그가 계속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로헤올 공작의 이런 정중한 권유를 거부할 이유 역시 없다. 그러한 여러 이유로 어차피 그는 뮌제의 이 권유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적인 이유들과는 별개로.
“예.”
엘르시어는 그녀가 먼저 산책을 권유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어도 이 권유를 받아들였을 그 자신만큼이나.
[책을 다 읽으시면 알아서 정리하시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어, 음. 급히 읽으실 필요는 없고요. 저는 외출하던 길이라.]
[……어딜.]
[산책이요.]
오래전, 늦은 밤에 외출하는 뮌제를 혼자 가도록 두었던 자신만큼이나.
엘르시어는 뮌제가 끈을 가볍게 매듭지어 클로크를 고정하는 모습을 보았다. 쉬이 했다. 뻣뻣한 손길로 좀처럼 매듭을 만들지 못했던 얼마 전과 다르게. 딱 한 번 있었던 별일이었다.
처음으로 제이를 소개하러 왔던 날.
그날의 그 굳은 움직임은 아마 제이 때문이었을 터다.
엘르시어는 뮌제가 훅 촛불을 불어 끄는 것까지 보고 고개를 돌렸다.
* * *
군데군데 피로 젖은 옷이라 거슬렸다.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젖은 소매는 클로크 밖으로 내밀지 않고자 노력했다. 누가 봐도 귀족인 사람과 나란히 걸으면서 누가 봐도 피로 젖은 소매를 보이면 사람들이 겁에 질릴 것이다.
뮌제는 몸을 숨기고 뒤따르는 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요즘 아티팩트는? 더 늘지는 않았을 듯한데.”
엘르시어가 그녀를 보았다.
“느끼실 수 있기에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느껴 봤자 서 있는 이 자리에서 겨우 수십 미터입니다. 주변만 돌아다니니 얼숍 상태를 전부 알 수도 없고요.”
“…….”
“어떻습니까.”
“더 바빠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충분히 바쁘다는 점이 맹점이었다.
사실 엘르시어에게는 지금 이리 느긋하게 산책할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나타난 아티팩트들이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이미 일어난 살인 사건들의 조사도 아직 진행 중이었다.
뮌제는 엘르시어의 말을 재미있어하며 짧게 웃었다.
“내가, 에흐베 대공께서도 모르는 것을 후작에게 말해 주려 합니다.”
“…….”
“일단 여기부터 시작합시다. 상식적으로 다른 마법사가 만든 호문클루스를 자신의 것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호문클루스가 정확히 무슨 역할을 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너무 길어지고……. 생명을 빼앗는 것에 특화된 아티팩트 같은 겁니다.”
생명을 빼앗는 것에 특화된.
“이 짧은 설명 한 줄이 마법사에게는 자기 목숨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하지 않고, 그래서 호문클루스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각하께서는 그럼 괜찮으십니까?”
“난 방금 그 설명을 해 준 것으로 세상의 모든 마법사를 적으로 돌렸습니다.”
뮌제는 별것 아닌 것을 말하듯 말했다.
그리고 엘르시어가 무어라 반응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다른 마법사가 만든 호문클루스를 자신의 것으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를 삼켜 그 마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후천적으로 마법사가 되는 것과 조금 비슷한 구석이 있네요.”
세간의 상식으로 후천적으로는 마법사가 되지 못한다.
“사실상 유일하게 마법사와 마법에 대한 상식을 깰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하건대, 그 존재는 다른 마법사가 만든 호문클루스를 제 것처럼 사용하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
“아마도 그랬어요. 확신할 수 없었으니 나도 방심했고.”
추측에 불과한 것을 말하고 있었지만, 확신에 가까운 것이기도 하였으며, 실은 진실이 어떻든지 간에 상관없었다.
악마는 ‘호문클루스’라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수많은 생명을 삼켰기에 그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호문클루스와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든, 남이 만든 호문클루스를 이용했든, 어쨌든 그것은 회복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얼숍에 있는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 아티팩트를 뿌렸다.
다른 마법사가 만든 아티팩트들이 많았으니, 악마는 다른 자의 아티팩트를 자신의 것처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뮌제는 입꼬리를 약간 올렸다가 내렸다. 식은 피처럼 비린 비웃음이었다. 그녀는 턱을 들었다. 그리고 활기를 끌어올린 한숨을 훅 내쉬었다.
“다음으로, 후작도 알겠지만, 마법사에게는 저마다 즐겨 쓰는 분야가 있습니다. 자주 바뀌는 자도 있고, 고착화한 자도 있습니다. 자신의 마법이라는 표식처럼 남을 걸 알면서도 쓰고.”
“…….”
“예를 들어 나는, 불입니다.”
엘르시어는 조용히 들었다.
“언젠가 말한 적 있는 일레인. 예, 그 《덴트 젠비세르》를 쓴 일레인은 독을 연구했지만 표식처럼 남기는 것은 꽃이었습니다. 끼북이라 하는 이것. 일레인이 만들었습니다. 발동 시마다 꽃이 나오는 건 그 때문이지요.”
뮌제는 클로크 안주머니에서 꺼낸 반지를 보였다가 집어넣었다. 후작은 그것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후작이 처음 만날 때 찾아 주었던 자료는 릴리아의 것이었지요? 그자도 알다시피 꽃을 즐겨 썼습니다.”
“…….”
“미니라는 기사를 삼킨 호문클루스는 하얀 꽃이지요.”
“…….”
“내가 은여우단을 도울 때 어떤 시신 입술 위에 피어 있던 것도 하얀 꽃이고.”
반복해서 나오는 한 단어가 있었다.
놓칠 수도 없게 반복되었다.
“모든 일이 시작된 날에 떨어져 있던 것도 하얀 꽃이고.”
“…….”
“얼마 전 그 길 위에 떨어져 있던 것도 하얀 꽃이고.”
왕립 중앙 도서관의 뒤편.
어느 밤에 그녀가 선 적 있던 자리에 그녀는 멈춰 섰다.
“사실 꽃을 생화 그대로 호문클루스로 삼는 건 꽤 어렵습니다. 꽃으로 사람을 해칠 방법을 강구해야 하니 창의력도 필요하고 마법 실력도 꽤 필요하지요. 그래서 가끔은 꽃 그림 같은 것으로 꽃을 대체하기도 해요. 릴리아가 선택했던 그 그림처럼. 그런데도 꽃을 선택하는 마법사들이 묘하게 많아요.”
그늘이 져서 선선하게 바람이 불었다.
엘르시어는 도서관 건물을 올려다보는 뮌제를 따라 눈길을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벽, 특별할 것 없는 기둥, 특별할 것 없는 조각, 특별할 것 없는 양식이었다. 그러나 뮌제를 따라 묵묵히 보고 있다가, 그는 가만히 물었다.
“그 모든 게 한 존재가 퍼뜨린 아티팩트와 표식이었습니까?”
“…….”
대답은 없었다.
엘르시어는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뮌제는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는 얼굴로 조금 더 건물을 바라보던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깊게 숨을 뱉었다. 끝까지 웃는 얼굴이었다.
뮌제는 엘르시어를 보지 않고 건물을 가볍게 가리켰다.
“이 건물이 실은 르와셔에 있는 로헤올 저택 본관과 많이 닮았습니다.”
“…….”
엘르시어는 새삼스럽게 다시 건물을 보았다. 실로 웅장하고 거대한 건물이었다.
이게 한 가문의 영주 성도 아니고 수도 저택 본관과 비슷하다니.
순수하게 로헤올의 권위와 위상을 생각하던 그는, 직전의 질답이 어떤 흐름이었는지를 상기하고는 멈추었다.
[얼마 전 그 길 위에 떨어져 있던 것도 하얀 꽃이고.]
[그 모든 게 한 존재가 퍼뜨린 아티팩트와 표식이었습니까?]
[이 건물이 실은 르와셔의 로헤올 저택 본관과 많이 닮았습니다.]
얼마 전 그 길.
뮌제가 무슨 길을 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윌리엄 로헤올이 죽은 그 길. 아마도 그랬다. 한 존재를 말하며 로헤올을 함께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각하. 한 가지 실례되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요.”
무얼 직감한 것처럼 뮌제는 피식 웃고 허락했다.
여기까지 흐름을 만들어 온 당사자이니 그가 할 질문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그는 공작에게로 몸을 돌렸다. 뮌제도 선선히 그리해 주었다.
엘르시어는 미소하지 못한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전 공작을 극히 아끼셨다고 들었습니다.”
윌리엄을 말하는 것이다. 뮌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음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갯짓했다. 다시 걷자는 표현이었다. 엘르시어는 먼저 걸음을 옮긴 공작의 뒷모습을 아주 잠시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뮌제는 그가 옆에 서자마자 대답했다.
“맞습니다.”
“전 공작의 시신이 아리오에 머무르는 동안 한 번도 찾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그 가슴을 갈랐는데 뭐하러 시신을 볼까.”
“정말 아끼셨습니까?”
엘르시어는 이 이상 말을 돌리지 않았다.
자국의 귀족에게 던지기에도 극히 실례될 질문을 온느발레의 로헤올에게.
그러나 뮌제는 노여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떨 것 같습니까?”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뮌제는 말을 이었다.
“아꼈다고 알려진 것치고는 내가 전 공작을 매도하는 데에 조금도 거리낌을 보이지 않지요? 거침없이 깎아내리고 있고.”
“…….”
왕립 중앙 도서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아직 마르지 않은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다시 노을이 내렸다.
“내 주위는 내가 윌리엄에 눈이 가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심지어 대공도 마찬가지야.”
“…….”
“그런데 당신은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지요? 윌리엄이 죽은 후만 겪었으니까.”
[내가 내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몰랐다 하지 말게. 바깥에서도 가감 없이 보였던 정신 나간 우애였던 바.]
엘르시어는 뮌제 스스로 인정했던 ‘정신 나간 우애’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
우애는 본 적 없이, 그녀가 안고 있던 죽음을 가장 먼저 보았다. 윌리엄이 죽은 지금, 우애를 목격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애는커녕 두 남매가 같이 있는 모습조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뮌제가 말하는 ‘우애’라는 게, 죽고 죽여 피 위에 있던 모습으로만 뇌리에 남아 있는 이유였다.
엘르시어의 우애와 어딘가는 참 비슷하게도.
침묵으로 답한 엘르시어를 힐끔 본 뮌제는 옅게 웃었다.
“후작이 보지 못한 과거에 내가 얼마나 윌리엄을 아꼈냐 하면, 대공께서는 내가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아꼈습니다.”
엘르시어는 뮌제의 옆얼굴을 보았다.
“윌리엄을 내 손으로 죽였으니 내가 삶을 놓아 버릴 거라고 주변 사람이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내가 윌리엄을 아꼈어요.”
뮌제가 그를 보았다. 엘르시어는 쓰지도 달지도 않은 웃음을 그린 눈과 마주쳤다. 그녀는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