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떨리는 입술에 한동안 힘을 주고 있자니 우아한 발음이 느릿하게 들려왔다.
“……돌아오지 않겠다고?”
침묵은 환상처럼 깨졌다. 자작은 이유도 모르게 아찔함을 느꼈다.
대답이 늦는 그에게 황제는 다시 물었다.
“에흐베로 간다는 말이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쓸모없도다!”
노한 황제가 호령했다. 뮤니르 자작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근위 기사와 시종은 굳은 얼굴로 황제를 살폈다. 황제가 이토록 활동적인 분노를 나타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이리 동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황제는 뮌제 로헤올의 말에 담긴 모든 무례는 전부 듣지 못한 것처럼 단 한 가지에만 분노했다.
“알고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원한을 갚는 것조차 필요 없다는 뜻이냐? 내가 그리도 관심 밖이라는 뜻이야?”
이상. 하다.
자작은 순간 두려움도 잊고 황제의 얼굴을 보았다.
‘알고도.’ ‘원한을.’
당연히 황제 스스로 함구해야 하는 단어들을 황제가 말했다. 뮌제 로헤올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방금 인정했다는 걸 황제는 인식하고 있나.
이를 간 황제는 주먹으로 팔걸이를 내리쳤다.
팔걸이 위에서 흰 주먹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손가락 사이로 드러나는 두 눈은 죽은 윌리엄과 같이 금색으로, 이 순간 명정하지 못하게 찬란했다.
상처 입은 맹수처럼 싸늘하고 날카롭기도 했다.
황제는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그러나 만일 눈동자가 우는 소리를 낼 수 있다면 지금 황제의 눈은 맹수처럼 울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신분 중 가장 위에 있는 이는 천천히 다시 물었다.
“로헤올을 찾지 않겠다는 건지, 그건 말하지 않았더냐?”
“다른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뒤 상황과 뮌제 로헤올이 한 말로 유추해 볼 때, 다시 로헤올의 가주가 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작은 이 역시 말하지 않았다. 추측은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되었다. 뮌제 로헤올에 대해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황제에게는 더더욱.
“전 공작이라는 미명으로 감히 온느발레의 귀족을 단죄하는 데에 온느발레를 막아 주겠다?”
“…….”
“잘도 지껄인다. 감히 내게 대적하겠다는 거지.”
하지만 확실히 이 나라에는 뮌제 로헤올에게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위압감이나 실력으로나. 같은 대귀족이라도 그랬다. 문인과 무인의 차이는 어쩔 수 없이 존재했다.
더더군다나 뮌제 로헤올이 더는 로헤올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뮌제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궁무진했다.
막말로 온느발레 귀족을 죽여도 거리낄 게 없었다. 황제에게 ‘감히’로 시작하는 그따위 말을 전하게 한 것도 사실상 그 일환이었다.
마법사인 뮌제가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것쯤이야 더없이 쉬울 것이다. 정 아니 되면 다른 마법사들처럼 몸을 감추고 살아도 되었다.
자작은 침묵했다.
얼굴에서 손을 내린 황제는 가장 먼저 자작을 쫓아냈다.
“물러가라.”
평소처럼 돌아온 찬 음성이 차라리 반가웠다. 자작은 깊숙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황제는 기사와 시종까지도 물렸다.
그녀는 머리에 고정되어있는 작은 관을 손수 뺐다. 그리고 그것을 팔걸이에 대충 덜컥 걸쳐 놓았다.
죽은 윌리엄과 같은 금발, 뮌제와 같은 금발을 쓸어 넘긴 존귀한 이는 심호흡했다. 눌러 놓았던 노여움이 다시 일어났다. 노기에 차서 씨근덕거리는 숨을 몇 번 더 쉬었다.
황제가 된 눈으로 봐도 태산 같았던 사촌 언니.
빌어먹을 로헤올. 빌어먹을 윌리엄 로헤올. 과분한 걸 받으면서도 불만만 가득했던 놈. 그런 놈에게서 끝까지, 끝까지 손을 거두지 않았던 뮌제는 윌리엄이 예고했던 그대로 죽었다. 윌리엄의 얼굴을 보고 순순히 무기를 내려놓았다.
뮌제 로헤올은 끝까지 그랬다.
그래서 황제는 그 사람이 살해당하면 살해당하는 대로, 죽으면 죽은 대로 기뻤다. 황제가 바란 걸 주지 않았으므로 뮌제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에게 죽임당했다니 마지막에 얼마나 참담하였을까.
그런데 어떤 기적처럼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그것 역시 기뻤다.
또, 살아 있긴 하나 윌리엄을 죽였으니 지금 고통스럽게 있으리라는 짐작 역시 기뻤다. 뮌제 로헤올이 죽는 것도 좋았고, 고통받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건.
“경.”
그녀가 여전히 뮌제의 관심 밖에 있단 말이 아닌가.
공작. 증오 한 자락이라도 가져야지. 내게 무슨 감정이라도 가져야지. 살아 돌아온 지금이야말로 그래 줘야지. 어떻게 이래. 언니,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도 내가 바라는 걸 하나도 주질 않아.
아티팩트를 지니고 몸을 숨긴 채로 황제를 호위하던 기사는 모습을 드러냈다.
“경이 당장 아리오로 가라. 얼숍으로 가. 그 사람을 찾아서, 토씨도 틀리지 말고 전해라.”
“예. 폐하.”
“작위의 승계는 가주가…….”
* * *
“작위의 승계는 가주가 숨져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현 공작으로 돌아와 살아남든지, 진실로 전 공작이 되기 위해 지금 죽든지. 선택하라, 로헤올 공작.”
기사가 내민 검끝이 목을 살며시 찔렀다. 작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뮌제는 대답했다.
“죽일 수 있겠나?”
기사는 멈칫했다.
“……죽겠다고?”
그 느릿한 반문에 뮌제는 슬며시 웃었다. 간소하게 흰 셔츠 차림인 그녀는 손을 들어 엄지로 톡 첨단 바로 옆의 날을 건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아니. 경을 죽일 수 있는지 물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의 목을 뚫은 검이 튀어나왔다. 뚝. 무언가가 끊어지고 부러지는 소리도 도중에 들렸다. 기사를 죽인 이는 검을 빼내며 시신도 옆으로 치웠기 때문에, 뮌제는 피 약간만을 맞았다.
빈 서점의 안쪽에 서 있다가 이 기사를 맞이했던 전 공작은 손으로 목을 슬쩍 훑었다. 따끔하지도 않았다. 죽은 자의 피도 함께 묻어 거슬릴 뿐.
기사를 죽인 이는 에흐베의 기사였다.
뮌제는 그녀의 기사들에게 이제 더는 그 어떠한 아티팩트도 가지게 허락하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그들은 에흐베의 옥타브가 기어이 마련해 주고 간 저택에 있었다.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기사는 뮌제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넣어 둔 겉옷이 카운터에 있었기 때문에, 뮌제는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었다. 피가 튄 하관에 손수건을 덮으며 그녀는 물었다.
“뮤니르 자작이 마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온느발레에 오늘쯤 도착했을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 이건 마법으로 왔겠군.”
기사부터 시작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는 정중하게 시작한다.
뮌제는 슥슥 피를 닦아 내며 눈을 찡그렸다.
에흐베의 기사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며 양해를 구하고는 시신을 가지고 사라졌다. 시신도 처리할 겸 라파엘에게 보고하러 갔을 것이다. 그래 봤자 한 사람이 사라진 것뿐이다. 아직 다른 기사 하나가 마찬가지로 몸을 숨긴 채로 남아 있었다. 라파엘이 보이는 염려의 결과였다.
피가 잔뜩 떨어져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손수건을 내렸다.
* * *
사랑이 있었고, 증오가 생겼다.
아마도 순서가 그랬다.
* * *
로헤올 전 공작이 얼숍에서 저택을 하나 매입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행보는 주시할 수밖에 없는지라 멀리서 은여우단의 기사와 은늑대관의 기사가 따라다녔다.
아티팩트를 인지할 수 있다고 말했었으니 공작이 그 추적과 감시를 모를 리 없었다.
따라서 이 감시가 가능했던 건 전 공작이 암묵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중요한 일은 두 기관에서 하나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
엘르시어는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비릿한 냄새를 맡았다. 욕실 있는 곳에서는 지금도 물소리가 나는 중이었다. 그는 주방 쪽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드 세네허? 욤 에 카셰?”
“안 들립니다!”
“…….”
온느발레어로 말문을 열었지만 돌아온 건 아리오어였다.
힘 있는 목소리이니 적어도 이 피 냄새가 그녀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열린 욕실 안을 본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세면대를 적시는 물은 붉은 색이었고, 움직이고 있는 뮌제의 한쪽 소매도 완전히 빨갛게 젖은 채였다. 한동안 더 머리를 물로 헹군 그녀는 머리에서 물을 꽉 짜냈다.
엘르시어는 그녀가 준비해 둔 듯한 수건을 들어 그녀에게 건넸다.
뮌제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에야 그에게 제대로 시선을 주었다.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렸지요?”
전 공작은 머리에 수건을 걸치고 탈탈 털어 가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위즈인 때라면 모를까, 온느발레의 대귀족이라는 사람이 손수 이리 거칠게 머리카락을 말리니 엘르시어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리 하는 게 익숙해 보여서 더욱.
이제는 위즈가 아니라 하더니 이리도 위즈 같다.
위즈 때 형성된 생활 습관이 남은 걸까, 아니면 뮌제가 원래 이랬을까.
카운터 있는 곳으로 나가는 그녀를 따르며 엘르시어는 물끄러미 전 공작의 뒷모습을 보았다.
뮌제는 카운터 안쪽에 섰다. 서점 주인이던 때처럼.
책은커녕 책장도 없이 텅 비었으나, 카운터는 남아 있었고, 의자도 남아 있었다. 뮌제는 흰색의 윈저체어를 가리켰지만 엘르시어는 예의 바르게 미소짓고 사양했다. 뮌제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닙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온 것도, 잘 지내는지 확인하러 온 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왔다.
정말 그냥. 이유도 없이.
그는 점점 검붉어지는 소매와 마찬가지로 피로 물든 셔츠 앞을 보고 조용히 호흡했다. 머리를 털면서도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던 뮌제는 묘하게 미소했다.
그녀의 손이 멈추었다.
엘르시어와 시선이 얽히자, 그녀는 묘하게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아리오인을 해한 건 아닙니다. 설령 아리오인이라 하더라도 날 해하고자 온 자들이니 내가 해해도 상관없고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면요.”
수건을 끌어내려 확인했다. 다 씻어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흰 수건은 아주 옅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촛불 하나만 켜 두어 꽤 어두운데도 분별될 정도였다.
후에 다시 씻어야겠다. 떨떠름하게 수건을 카운터에 내려놓은 뮌제는 단정한 인상의 후작에게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내가 그렇게 선전포고를 했는데 황제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까?”
“각하.”
“처음부터 예상하고 아리오를 돕겠다고 한 겁니다.”
뮌제가 얼마나 강하든지 간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실제로 현실을 마주하게 되자, 엘르시어는 말문이 막혔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을 본 뮌제는 빙긋 웃었다.
“염려 말아요. 여유롭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대공께서는…….”
엘르시어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왜 에흐베 대공이 나오나.
마치 뮌제가 대공 없이는 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무얼 말하려고 대공을 입에 담았는지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했으나, 뮌제는 그다지 불쾌해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대공에 대해 어느 정도 말해 주기까지 했다.
“괜찮습니다. 그분이야 뭐……. 내가 어느 정도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시기도 하고……. 아, 혹 안부를 물어본 거라면 잘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