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뮌제는 말을 골랐다.
“들었겠지만, 황제는 제이 왕자와 참 많이 닮았어.”
“…….”
“내게 바란 것도 비슷했지.”
라파엘의 연한 회색 눈이 조금 커졌다.
그의 지금 심경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건 뮤니르 자작에게 말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단 한 문장이었으나, 놀라운 문장이므로. 처음 느껴 본 보호와 평온, 온기에 제이가 새끼 개처럼 뮌제를 따랐다는 걸 모르는 귀족이 없었다.
뮌제는 살짝 데워진 한숨을 쉬고는 눈을 찡그렸다.
“그런데 또, 황제는 윌리엄과도 닮았어.”
“…….”
“가엾냐 한다면, 가엾지. 가여웠지. 사촌 지간이면 어쨌든 친족이고, 어쨌든 은밀하게 만나는 사석에서는 나를 종종 언니라 부르기도 했으니까. 황제는 어떻게든 나와 가까워지려고 애썼어.”
“……황제가?”
“응. 들었잖아. 나는 황제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어. 내가 짐작하기로, 차라리 사이가 나빴다면 황제가 날 그런 식으로 쳐내려 들지 않았을걸.”
“…….”
“나네트는 내게 바라는 게 너무 컸고 나는 그걸 이루어 줄 여력이 없었지.”
윌리엄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생활 속에서 지치면 라파엘과 보내는 시간에서 휴식했기 때문이다.
뮌제는 황제가 갈구하는 걸 이뤄 줄 여력이 없었다.
사랑할 이유 없는 사촌 동생에게까지 신경을 쓰기에는 그녀는 이미 피로했다. 사랑해야 할 가족, 주시하며 살펴야 할 가족은 윌리엄이면 충분했다.
그녀는 숨을 털어 냈다.
“……뭐, 내가 황제의 속을 어찌 다 알겠어.”
“황제를 용서했어?”
차근차근하게 라파엘은 다시 물었다.
그에 뮌제는 허리를 굽혀 라파엘의 손을 조금 더 지그시 잡았다. 뼈마디 불거진 단단한 손은 그보다 작지만 마찬가지로 단단한 손에 잡혔다.
같은 눈높이, 불과 두 뼘 떨어진 자리에서 그를 마주보며 뮌제는 나직하게 말했다.
“라파엘. 무엇이든 해. 네게 해가 가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괜찮아.”
“…….”
죽도록 사랑스럽다는 건 이런 것일 터다.
라파엘은 제게 가려 약간 그늘진 얼굴을 보다가 설핏 웃었다.
너와 나는 이렇게도 닮았는데, 어째서 이렇게도 다를까. 네 이 사랑은 나의 것과는 달라서 매일 매시 고통스럽다.
그는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짧게 스쳤다.
“용서하지 마.”
손이 놓였다.
* * *
살뜰한 사랑을 받으며 지내고 있는 게 다 보였던 윌리엄.
그 사랑을 주고 있던 뮌제.
그리고 나네트.
사랑받기는커녕 부모에게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성장한 황제는 사촌인 뮌제가 동생에게 주는 사랑을 동경했다. 강인한 사촌 언니. 동생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촌 언니.
나네트의 사촌 언니.
언니. 내 언니.
* * *
사랑이 있었고, 증오가 생겼다.
아마도 순서가 그랬다.
* * *
황제는 뮤니르 자작에게서 뮌제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들었다. 아직 아리오에 잡혀 있는 아르망 페레이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내가 황제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야.]
그 말을 들은 탓에 눈이 무언가에 가린 걸까.
자작은 황제 나네트가 뮌제 로헤올에 대해서라면 숨결 한 자락까지도 알고 싶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황제가 하나하나 캐물었기 때문이다.
그 말하지 않은 부분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부분인가? 그건 아니었다.
그 말하지 않은 부분이 상식적으로 중요한 부분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얼굴은 어떻던가. 안색은? 손은 어땠지? 그 반지, 그 반지는 여전히 끼고 있던가?
머리 길이는 어땠지? 눈동자는 여전히 겨울 호수 같은 연회색이던가. 운신하는 데에 문제는 없는 것 같던가? 그럼 윌리엄 로헤올을 죽인 게 그 사람이란 말이지…….
……풋.
황제는 우아하게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딱 알맞게 갔군.”
“…….”
측근 아닌 자에게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냉혹한 말이었다.
자작은 어리둥절해 하기보다는 흠칫 놀라 온몸을 긴장시켰다. 애초에 그가 들어서는 안 될 말이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반문도 이를 악물어 가까스로 삼켰다.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듣도록 허락했다면, 필시 그 이면에 무슨 속셈이 있으리라. 최고 권력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이야 그 아랫급 귀족에게 흔한 일이었다.
다만 지금은 뮤니르가 지나치게 휩쓸릴 시에 건져 줄 로헤올 공작이 없었다.
뒤를 봐줄 대귀족이 없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자작은 침을 삼켜 목을 축였다.
황제는 자작의 그런 긴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쿡쿡 웃었다.
“생각해 봐. 누이가 쏟던 그 사랑도 모르고, 분수에 맞지도 않게 질투를 하다가 감히 그 누이를 배신하더니, 살아 있던 누이에게 또 덤벼들었다가 그 누이에게 죽은 거잖아.”
“…….”
“딱 알맞다. 처음부터 분수를 알고 감사했어야지.”
……이상하다.
자작은 예민하게 곤두선 머리로 생각했다. 이상하다.
이건 마치, 황제가 뮌제 로헤올을 옹호하는 것 같지 않은가?
분명 황제와 윌리엄이 손잡고 뮌제를 몰아냈으리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데.
“윌리엄 로헤올이 후회하고 슬퍼하면서 죽었다면 더 알맞은 죽음이었을 텐데. 자네는 못 봤다는 거지.”
“예. 제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래.”
“…….”
“그 사람이야 제 손으로 윌리엄을 죽였으니 당연히 미치려 할 테고. 현장에서 그 사람의 반응은 어떻더냐. 봤을 테지?”
자작은 빠르게 눈을 굴렸다. 심장이 명치에서 뛰는 것처럼 힘들었다.
“잠시……. 잠시 눈물을 흘렸습니다.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피눈물.”
그 단어를 중얼거린 나네트는 하하 유쾌하게 웃었다. 그녀의 손이 의자 팔걸이 끝을 탁 쳤다.
“피눈물. 그렇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
“한 번 배신 당한 걸로도 이미 고통스러울 텐데, 끝까지 찾아내 죽이려 들다니 두 번째 배신이 아닌가. 그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기어이 죽이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금으로 덮고 세심하게 조각된 고풍스러운 의자 위에서, 황제는 두 로헤올 공작에게 일어난 불행을 평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분명 사려 깊은 말인데, 살아서 고통스러운 뮌제 로헤올을 조롱하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황제가 웃고 있기 때문일 터다.
[내가 황제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말이야’를 잘못 말한 게 아닐까…….
장갑 안의 손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황제는 씁쓸하게 비칠 정도로 빙긋 웃는 얼굴로 앞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흔들 끄덕였다.
“피눈물. 그렇게 사랑했단 말이지……. 피눈물.”
“…….”
사실 전투 후유증으로 그렇게 된 것 같았지만, 뮤니르 자작은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황제가 무슨 착각을 하고 있든지 간에 그에게 해가 오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한 마디라도 덜 섞고 싶었다.
나네트는 이성적이고 총명하고 냉철하고 과감하여 좋은 군주다.
왕국들이야 황제를 정도를 모르는 폭군으로 생각하고 있겠으나, 온느발레인으로서는 이만큼 좋은 군주가 없었다. 하여간에 온느발레를 위하지 않는가. 하여간에 선황보다는 낫지 않은가.
그런데 눈앞에 있는 황제는 정말 냉철한가?
빛나는 백금의 관을 쓴, 제국 온느발레의 황제를 아주 잠시 올려다보았다. 시선은 금방 황제의 발치로 내려갔다.
위엄은 그 어떠한 대귀족 가문의 가주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것 같이 무정하고 무감한 눈은 가끔은 끔찍했다.
뮌제 로헤올을 포함하여, 자작이 만난 대귀족들 중 저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부릴 수 있는 천한 것, 세를 낼 천한 것, 영주의 보호 없이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만큼 약한 것으로 볼지언정, 어쨌든 대귀족들은 사람을 사람으로는 보았다.
그래서 황제가 에흐베 대공에게 어떤 감정이 있다는 걸 더 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시선.
“그 사람이 살아 있어서 나는 진심으로 기쁘다.”
정말 에흐베 대공을 향했던 게 맞나?
뮤니르 자작은 황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황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엇나간 게 뮌제 로헤올의 일이었다. 온느발레인마저도 경악시킨 폭력적인 결정.
뮌제 로헤올을 처리한 후 에흐베 대공에게 무슨 특별한 제안을 하였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황제는 정사情事에 있어서 뮌제 로헤올 생전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국서 없이 정부만을 둔 채였고, 뮌제가 죽은 이후 온느발레에 오지 않는 대공을 따로 초대하지도 않았다.
“이상하다 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그 에흐베 대공이 갑자기 아리오에서, 하. 그렇지. 그 사람이니 대공이 움직였지.”
아니, 하지만, 분명 대공이었다.
시선의 목적지를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럿이 착각할 리가 없다. 뮤니르 자작은 기억을 더듬고 더듬었다. 대공이었다.
그런데 왜 이러지.
[내가 황제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야.]
“어쩌면 대공은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군.”
왜, 대공이 뮌제 로헤올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지 않지?
어째서 뮌제 로헤올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지?
[그리고 자작, 아마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걸세.]
“그래. 그 사람이 언제 돌아온다 하더냐.”
무언가가 이상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뮤니르 자작은 정신을 차렸다.
가장 두려운 질문이 왔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손을 가만히 구부렸다. 입술이 말랐다. 목도 갈하여 괴로웠다. 그는 사실 전언으로라도 황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신분은 아니었다. 뮌제 로헤올이 지나친 말을 맡겼다.
떨리는 숨을 들이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에 대해서 폐하께 대신 말씀 올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대로. 그대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리 비슷하게 한심할 수 있는 것도 재주일세.]
그 조소의 뒤로 이어진 건 이만 가 보라는 송객의 말과 이 부탁이었다. 황제가 묻거든 나 대신 전하라.
혀로 아랫입술을 훑은 자작은 말했다.
“감히…….”
황제를 경호하기 위해 들어와 있던 근위 기사와 시종은 소란스럽지 않게 자세를 고쳤다. 그 누구도 황제를 향해 사용할 수 없는 부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황제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듣고 있었다.
긴장한 숨을 흘린 자작은 말을 이었다.
“내 형제와 연합하여 나를 대적하였고, 그 일로 내 형제를 조롱하며 절망케 하려 하였으니.”
“…….”
“그 성패에 상관없이……, 그 계책 자체에 대해서 칭찬 올리건대, 몰상식의 극치다.”
결코 칭찬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내가 감히 황제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 건가. 자작은 넘어가지 않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내가 내 존경하는 사촌…… 아우의 곁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상입니다, 폐하.”
적막이 내려앉았다.
경어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고, 단어 하나하나가 오만하고 차가웠다. 말을 나름대로 고쳐서 전한 게 이 정도였다.
황제와의 독대부터가 그의 평생 처음 있는 일인데 그 처음에 이리하고 있으니 자작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차마 황제의 표정조차 제대로 살피지 못하겠다. 식은땀이 났다. 이 침묵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한 치의 여유도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