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그리 마법사들을 탄압하던 뮌제 로헤올에게 협력하는 강한 마법사가 있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저 청년에게 걸린 마법까지 깨졌다니 또 그 정도로 강한 마법사가 에흐베에 협력하고 있단 말인가.
탑주는 간절하게 뮌제에게 말을 걸었다.
“각하……. 당신이 이 대공에게 기밀을 말씀하신 건 아닙니까?”
“난 대공께서 내가 중앙탑 소속인 걸 알고 계신다는 충격에서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네. 그런 질문이 나오나?”
“그럼 정말 마법이…….”
“깨진 모양이지……?”
“…….”
탑주는 참지 않고 흐느꼈다.
이 세대의 마법사들 도대체 왜 이래?! 그 정도 힘을 가졌으면 칠렐레팔렐레 다니든지 재야에 묻히든지, 둘 중 하나였잖아. 권력에 빌붙다니 이런 마법사 같지도 않은 놈들 같으니.
돌아가자마자 탑 소속 마법사부터 족쳐야지.
벌써 두 명이나 마법이 깨져서 중앙탑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족쳐야지……. 깨진 사람도 하필이면 뮌제 로헤올과 에흐베 대공의 기사야……. 죽여 버려야지…….
그래. 그래야겠다. 탑주는 이 자리가 파하자마자 할 일의 순서를 정했다. 이 대공이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마법사부터 족치고 황제께 알현을 청……, 아니, 이것도 아니다. 그 황제는 이걸 빌미로 지식인의 망명을 청할 수도 있고…….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발해도 괜찮다. 물론 그에 따른 책임은 져야겠지.”
썩을. 젊은 주제에 눈치 빠른 놈 같으니.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게 아니야. 상황을 지켜보다가 결정하는 것도 용납해 주겠다.”
“…….”
이를 악물었다가 놓은 노인은 힘겹게 물었다.
“정확히 중앙탑에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중앙탑이 무얼 할 수 있다고.”
“학자들과 함께 에흐베에 정착하길 원한다. 새로운 부지를 내어 주지.”
“각국에서 모인 지식인들을 에흐베로 망명시키시겠다고요? 불가능합니다. 저희들도 모국을 향한 애국심과 충성심이 있습니다.”
“그럼 그대로 그렇게 와해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현 중앙탑은 지나치게 부패했어.”
이런 말을 같이 듣고 있으면서도 뮌제 로헤올은 한마디도 없었다.
탑주는 씨근덕거리는 숨을 흘렸다. 미쳐 버릴 것 같다. 이토록 존중받지 못한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험한 길을 가도 나는 상관없다.”
“…….”
하지만 에흐베 대공이 담담한 얼굴로 하는 그 나지막한 말에 반쯤 끝났다.
중앙탑이 있는 그 지역에는 군사가 없다. 중앙탑을 위협할 군사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중앙탑을 보호할 군사 역시 없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노인은 팔걸이를 움켜잡고 있던 두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 대공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이리 당당한지는 모르겠지만, 뮌제 로헤올이 여기에 있었다. 이 모든 걸 듣고도 침묵하는 뮌제 로헤올이. 온느발레의 방패였던 뮌제 로헤올이.
탑주는 이 알 수 없는 대공보다 뮌제 로헤올이 두려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각하. 온느발레를 버리셨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물었다.
없는 셈 치라 하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해 주던 뮌제 로헤올은 이 질문에도 대답했다.
“오래전에.”
다 끝났다.
뮌제 로헤올이 에흐베 대공의 뒤를 봐준다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이다. 탑주에게 저 고귀한 여성은 그 정도로 유능하고 무서운 존재였다.
처음부터 너무도 다른 세계, 그가 넘볼 수도 없는 세계, 제국 온느발레의 대귀족만이 발 디딜 수 있는 세계. 그곳에서 젊은 나이에 유의미한 이름을 남긴 사람. 황제에게 견제당해 살해당할 뻔하기까지 했던 사람.
그 뮌제 로헤올이 중앙탑에서 손 뗄 뿐 아니라 돌아서서 온느발레를 적대한다면, 에흐베의 이 참담한 의중도 성공할 가능성을 가졌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긍정적으로 회의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탑주는 이 위압적인 제안이 ‘처단’이라고 짐작했다.
에흐베 대공은 뮌제에 대해 거짓말을 나불댄 걸 용서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리라.
* * *
탑주가 옥타브와 함께 회의실을 나가자, 뮌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펼쳐져 있던 책은 탁 닫고 의자에 놓았다.
내내 뮌제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던 라파엘이 그녀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의자를 돌렸다.
뮌제는 테이블에 기대듯 걸터앉았다.
라파엘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 살며시 웃었다.
“‘충격에서 회복도 못한 상태’?”
“놀란 건 사실이거든.”
그녀는 편하게 풀어 놓았던 셔츠 앞섶의 단추 두 개를 다시 잠가 올리며 나른하게 대답했다. 라파엘은 높은 등받이에 기대어 있느라 흐트러진 단발로 손을 뻗었다.
그를 위해 살짝 허리를 굽힌 뮌제가 조용히 물었다.
“내가 무얼 연구하고 있었는지도 알고 있어?”
“짐작은 하고 있지만 맞는지는 모르겠네. 로헤올로 들여오는 새 책들의 주제가 꽤 자주 겹쳤으니까. 내가 네게 책을 선물해 주기도 했었잖아.”
“아. 맞아. 그랬었지…….”
“화났어?”
“그냥 놀랐을 뿐이야. 우리가 서로에게 다 털어놓는 건 아니잖아. 내 비밀이 있고 네 비밀이 있지. 내가 네 기사에게 들려준 황제 이야기처럼.”
에흐베의 기사는 서점 안에 아티팩트로 몸을 숨기고 있었고, 뮌제는 그걸 알면서도 뮤니르 자작과의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녀는 머리를 넘겨 주느라 귀를 스친 손길에 멈칫했지만, 바로 웃는 얼굴로 눈을 찡그렸다.
“그보다 나는, 알았다면 왜 처음부터 중앙탑에 묻지 않았는지가 궁금해.”
“아. 중앙탑 내부를 샅샅이 살피느라 시간이 걸렸어. 굳이 물어서 경계하게 만드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탑주의 방도 전부 뒤지고, 그 후에야 질의했어.”
“탑주……. 그게……. 그게, 어, 불가능할…… 텐데?”
다시 상체를 세운 뮌제는 제 머릿속을 점검하느라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녀가 알기로 탑주의 사무실과 연구실, 침실은 마법으로 지켜진다. 누군가가 들키지 않고 침입하기는 어려웠다.
라파엘은 다정하게 웃었다.
“글쎄. 되더라.”
“아니,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닐 텐데……. 아까 옥타브 경이 중앙탑 기밀 빼돌렸다는 건? 진짜야?”
“중앙탑에 소속되게 했고 마법은 파훼했어.”
“…….”
이 사람 뭐지?
뮌제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강한 마법사를 데리고 있어? 아, 혹시 그날 그 마법사인가?”
“글쎄……. 그는 아니야.”
에둘러 ‘윌리엄이 죽은 날’을 말하는 뮌제의 표정은 태연했다.
라파엘은 웃었다.
“뮈즈. 혹시 탑주의 방, 시도해 본 적 있어? 연구실이든, 침실이든, 집무실이든.”
“음? 아니. 관심도 없고……. 쓸데없이 마법 쓸 여력은 없기도 했고. 한번 파훼하면 다시는 쓸 수 없는 마법인 것 같기도 했고…….”
“응, 뭐. 그런 것 같더라.”
“……파훼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그거 그래 봬도 꽤 강했던 마법사가 걸어 준 걸로 알아. 중앙탑 세워진 초창기에. 최근에 보강도 했었고. 십 년 전쯤에.”
“그래?”
라파엘은 파훼의 어려움이나 탑주, 마법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답은 상냥하게 성의껏 해 주고 있었지만, 그건 뮌제를 향한 관심이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다.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보호도 안 되는 방에 탑주가 머무는 건가.”
“알아차리고 새로 설치한 게 아니라면 그러겠네.”
라파엘의 어조는 부드러웠다. 어조만 부드러웠다. 내용이 가차 없어서 그렇지.
그는 가만히 덧붙였다.
“이대로라면…….”
“음?”
“중앙탑 입구만 뚫리면 탑주는 손쉽게 스러지겠다.”
그 말이 옳다. 보호받지 못하는 방에 숨어 봤자 소용이 없을 터.
그쯤 되자 뮌제는 탑주가 조금 불쌍해졌다.
“탑주는 내 뜻대로 날 보호한 거야. 그에게 노여워하지 마. 네게 알리지 않은 사람은 나잖아.”
“그리고 그가 널 보호했기 때문에 나는 널 찾지 못했어.”
“…….”
“뮈즈. 내가 내게 네가 세상에 없다 했던 베렐 경을 가만히 두는 건, 결국에는 그가 나를 네게로 인도했기 때문이고 그가 네 기사이기 때문이야. 단지 그뿐이야.”
라파엘은 그 말을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었으나 빛나지 않고 캄캄했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를 보던 뮌제는 뒤늦게 가까스로 반응했다.
“……그래도 좀 봐줘도 돼. 나는 그래도 너와 다시 만났는데 탑주는 이제 그게 불가능하거든. 가엾잖아.”
무슨 말이냐고 대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번에는 뮌제가 손을 뻗어서, 그의 한쪽 눈가를 만졌다. 티 내려 하지 않아도 많이 피곤한 듯 눈이 어두웠다. 라파엘은 그녀의 손끝에 기대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뮌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탑주에게 첫사랑이었던 친구가 있었거든. 아까 그, 중앙탑 마법을 보강했다고 했잖아. 그거 해 준 마법사야.”
“…….”
“연락이 안 된 지 몇 년 되어서 꽤 걱정하는 것 같더라.”
명정한 빛을 안고 라파엘을 보던 눈동자가 흐려졌다. 라파엘의 눈가를 살살 쓰다듬는 손길에서 힘이 빠졌다. 생각에 잠겨 멍하게 초점 멀어졌던 눈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라파엘은 그 과정을 잠잠히 보았다.
뮌제는 어색하지 않게 그에게서 눈을 들고 허공을 보며 말했다.
“안된 일이지. 그 친구는 다시는 나타나지 못할 테니까.”
“…….”
불태워진 한 권.
보지 못했던 그 한 권.
떠오르자마자 뮌제는 입을 다물었다. 이를 악물었다가 놓은 그녀는 조금 더 침묵하다가 빙긋 웃었다.
“난 가 봐야겠다.”
“일레인?”
대공은 테이블에서 몸을 떼는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뮌제는 멈추었다.
웃지 못하는 얼굴로 저를 보는 그녀의 시선을 라파엘은 받아 냈다. 그가 말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뮌제가 입을 열었다.
“뭘 알고 있어?”
“최근에 일레인을 찾기 시작했었어.”
“왜.”
“로헤올 저택에 《덴트 젠비세르》가 없었으니까.”
“……《덴트 젠비세르》는 왜 찾았는데.”
“단서들이 아리오로 모여서.”
일레인은 아리오 출신 마법사였다.
뮌제는 어이없어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리오 출신 마법사가 쓴 책이 사라졌다고……. 아니, 누가 봐도 아무것도 아닐 만한 거잖아.”
“응.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갑자기 생각났었어.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것도 난 찾아봐야 했고.”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뮌제의 표정은 하얗게 굳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입가에서 멈춘 그녀의 두 손을 지그시 잡아서 내렸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파해서는 안 돼. 그는 뮌제의 식은 손을 부드럽게 주물렀다.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던 대공은 입을 열었다.
“뮈즈.”
“…….”
“뮈즈.”
“으응.”
잠긴 대답이 돌아왔다. 잠깐 뮌제를 올려다보던 라파엘은 담백하게 물었다.
“황제가 가엾어?”
[내가 최근에 제이 왕자에게도 말한 적 있지만, 자작, 황제는 그럭저럭 불행한 사람일세.]
뮌제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라파엘의 손안에 있는 뮌제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 일방적으로 그가 잡고 있었던 손의 끝이 구부러졌다. 가볍게 맞잡아 오는 손을 느끼며 라파엘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뮌제는 그런 친구를 내려다보다가 한 번 숨을 떨어 냈다.
맥락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가 왜 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너무도 상냥한 친구. 그녀는 라파엘의 다정한 얼굴을 보며 망설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가 유도하는 대로 가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