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탑주는 끼북이를 통해 뮌제에게 받은 답장을 넣어 둔 안주머니 위에 손을 올렸다.
그대 알아서 하라. 나는 대공과 만났다. 내가 탑 소속이라는 건 그가 모르니, 아마 내 일과는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리 두려워할 것 없다.
연구실에 박혀 있다가 며칠 만에 나왔더니 윌리엄 로헤올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냐 하고 있었는데 에흐베 대공에게서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지 알아볼 시간이 없어서 뮌제에게 급히 서신을 보냈다. 그렇게 받은 답장이었다.
이게 지금 그의 위안이었다. 뮌제 로헤올이 이리 확답하였다. 대공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직 발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중앙탑 소속의 학자가 에흐베 대공의 사람으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뮌제 로헤올의 일과는 상관없을 것이다.
설마 뮌제 로헤올이 이렇게 위안이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탑주는 아주 조금 든든해진 마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
그리고 굳었다.
테이블 상석에 앉아 있는 대공 때문은 아니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구석에 편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뮌제 로헤올이 한가롭게 손을 올렸다.
“오랜만일세. 오래전에 온느발레에서 보고 처음이지?”
“왜…….”
넌 또 왜 여기에 있니.
갑자기 품속의 답장이 불안해졌다. 어쩐지 추신으로 대공과 만나기로 한 일시를 묻더라.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뮌제는 괜찮을 거라고 빙긋 웃었다. 아니, 저 웃음이 ‘괜찮을 거라’고 다독이는 웃음이길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발을 한 뮌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난 없는 셈 치시게. 그러기로 했어. 나 없는 자리이니 날 마음껏 욕해도 좋아.”
“…….”
할 수 있겠냐? 당신 같으면 할 수 있겠어?
하지만 그렇게 시비 걸었다간 지금은 죽을 것이다. 위즈의 콘셉트, 일명 ‘천재지변’에 대해서 항상 뒷목을 잡아 왔는데, 막상 지금 보니 위즈도 나쁘지 않았다. 위즈였다면 너무 흥분해서 실수한 척 한 번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넘어가 줬을 텐데.
그리고 그건 로헤올의 전 주인에게는 실수로라도 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다.
탑주는 옥타브에게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는 대공과 공작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게 처음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는 듣기만 했을 뿐, 그의 눈에 실제 담은 적은 없었다.
중요하다면 중요한 이 자리에 뮌제를 허락하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인데, 그 뮌제는 흐트러진 차림으로 비스듬하게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예의를 차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
신기하기까지 했다.
품위 있게 앉아 있는 대공과 더 비교가 되어서 그런 듯했다. 대공은 탑주를 손님으로 대우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차림이었다. 회색 셔츠, 검은 타이, 검은 베스트, 검은 재킷, 보석이 박힌 타이 핀. 단정하고도 화려하여 탑주를 충분히 예우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탑주는 뮌제에게서 좀처럼 눈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노인에게 에흐베 대공이 유려한 온느발레어로 말했다.
“보다시피 로헤올 공작을 찾았네.”
“…….”
애달픈 현실도피는 종말을 맞았다.
쓰어어그으으을.
노인은 바닥에 드러눕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다른 주제이길 바랐는데 뮌제 로헤올 때문에 부른 게 맞은 모양이었다.
서신에서 본 경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 정도 존중이 특이한 일이긴 했었다.
아, 제발 거짓말한 게 들키지만 않기를 바…….
“그대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무슨 속셈이었는지는 캐묻지 않겠네. 공작을 위해서 거짓을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공작이 탑에 소속되었는지 어땠는지를 몰랐던 건지, 나는 모르겠지.”
들켰넹.
대공의 냉철한 얼굴을 본 탑주는 직감했다.
아, 망했다.
노인은 애써 미소했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전 로헤올 공작의 지금 표정과 아주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멍하게 평가했다.
공작은 자신이 탑에 소속되어 있다는 걸 대공이 모른다고 했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한 ‘오래전에 온느발레에서 보고 처음이다’는 발언도, 그래서 굳이 한 말일 텐데.
탑주는 이 자리에서 뒤통수 맞고 있는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게 아주 조금 위안이 되었다.
뮌제는 비스듬하게 팔걸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기까지 했다. 그녀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저게 무슨 의미의 반응인지 탑주는 알 수 없었다. 없는 셈 치라 했으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탑주는 그 기민한 머리로 문득 어떤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공작이 탑에 소속되었는지 어땠는지를 몰랐던 건지’ 따위의 말을 하면 공작이 탑에 소속되었다고 돌려 말하는 것 아닌가?
탑주가 정말 그 사실을 몰랐다면 이 대공은 공작의 비밀을 멋대로 털어놓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 그럼, 조금 전 뮌제 로헤올이 머뭇거린 것도 그 때문인가? 대공이 제멋대로 행동해서?
그런 거라면 공작이 대공에게 화를 내서 이 자리를 뒤집어엎어 줄 가능성이 있……을까? 있으면 좋겠다. 탑주의 파들파들 웃는 얼굴 위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국가의 각 군주들이 꺼려 하는 ‘탑주의 눈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에흐베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를 만나고자 한 건 다른 일 때문이야.”
“예에…….”
이거 안 통하는구먼. 탑주는 주름진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척 입가를 가리고 혀를 찼다.
다른 일 때문이라면 왜 하필이면 로헤올 공작을 찾았다는 말로 말문을 열었을까…….
뮌제도 더는 책을 보지 않았다. 심각한 눈으로 대공의 왼쪽 모습을 보고 있었다. 비스듬한 뒤에서 보고 있으니 대공의 지금 표정이 온전히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탑주는 힐끗 그녀를 보고 에흐베 대공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움직이지 않은 시선으로 노인을 응시하는 연회색 눈동자가 어쩌면 이리 무정한가.
대공이 입을 열었다.
“중앙탑이 중립지일 수 있는 이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네.”
탑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뮌제도 고개를 더 들었다. 두 노소 모두 눈이 커졌다.
그러나 에흐베 대공은 나긋하게 느껴질 만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유일한 제국인 온느발레가 중앙탑을 인정하기 때문이고, 그 온느발레의 유서 깊은 가문인 로헤올이 대대로 그 옆에서 중앙탑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때문이지.”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 군주가, 도대체.
“온느발레를 무시할 수 있는 단 한 국가만 나타나면 상황은 변하네.”
도대체 무슨 말을.
온느발레 황제에게서도 이런 협박은 들어 보지 못했다. 노인의 경악한 눈은 빠르게 뮌제에게로 향했다.
대공의 말마따나 로헤올은 온느발레의 그 어떤 가문보다도 중앙탑과 관련이 많은 가문이었고, 뮌제는 로헤올이었다.
탑주의 시선을 느낀 뮌제가 탑주를 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눈길을 돌렸다. 이 자리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자리에서 대공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인데도.
그러나 충격을 받은 건 매한가지인 모양인지 공작은 손을 올려 눈가를 덮었다.
결국 그가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신중하게 고른 말을 뱉었다.
“정확히 그 말씀은……, 에흐베가 온느발레를 대적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 그대가 오해했군.”
“아, 역시 아니지요. 제가 노망이 들었는지 요즘…….”
“에흐베에 협력하지 않으면 중앙탑이 사라지리라는 뜻이었네.”
냉혹하게 떨어진 말이 탑주의 명치에 내리꽂혔다.
중앙탑의 탑주는 대부분 온느발레 출신이 차지해 왔다. 중앙탑이 그만큼 온느발레의 은밀한 입김에 휘둘린다는 뜻이었다. 학자들에게는 모국이 따로 있지만 중앙탑을 새 고향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하여 온느발레 출신인 학자들조차 중앙탑에 미치는 온느발레의 영향력에 반발과 조소를 하고는 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라도 중앙탑이 중립 지역이기 위해서는 온느발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현재의 탑주도 예외 없이 자존감 높은 온느발레인이었고, 온느발레를 사랑하지만 그보다 자신이 중앙탑의 주인이자 이 세대에서 가장 이름난 학자라는 사실을 더 사랑했다.
상대가 일국의 왕이라는 두려움은 둘째 치고, 그 고고한 자존심에 금이 간 탑주는 팔걸이 끝을 움켜잡았다.
그는 발롬브로사에게도 네놈 자식 건강해서 유감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뮌제 로헤올 전 공작과 같은 온느발레 대귀족이 아니라면 노인은 미칠 수 있었다. 정신 나가서 덤벼들 수 있었다.
수염에 자그마한 붉은 리본 다섯 개를 단 노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에흐베가 그럴 힘이 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전하, 그게 중앙탑에 침입하여 비무장한 학자들을 살해하시겠다는 말씀이시라면, 전 세계가 에흐베를 비난할 것입니다. 온느발레 역시 가만히 있지 않겠지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들을 살해한다 하면 명분은 더 없어진다.
탑주는 뮌제에게로 분기 어린 목소리를 발했다.
“또한, 공작 각하. 온느발레의 대귀족으로서 에흐베 대공의 이 참담한 말씀을 듣고만 계십니까?”
“나 끌어들이지 마시게. 난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야.”
뮌제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손을 휘저었다.
“각하!”
“감히 저 사람에게 언성 높이지 마라.”
대공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그 경고와 함께 탑주의 온몸을 내리찍은 어떤 기운이 있었다. 살기였다.
언젠가 뮌제 로헤올에게 당했던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탑주는 힘겹게 몸을 떨었다. 소름이 끼쳤다. 온몸이 차가워졌다.
대공의 태도에 더는 존중이 없었다.
“중앙탑을 무너뜨리기는 쉽다. 중앙탑의 수많은 기밀은 저 기사를 거쳐 내게 도달했고, 그 양과 질은 중앙탑이 와해되기에 모자람이 없어.”
“…….”
“그리고 그때가 되면 온느발레는 중앙탑을 보호할 여력이 없을 테지.”
탑주는 여전히 이 회의실 문 앞에 서 있던 옥타브를 돌아보았다. 옥타브는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 보니 저 청년, 중앙탑에 처음으로 논문을 제출하였던 날이…….
그 심사가…….
탑주는 떨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뮌제 로헤올이 죽은 직후였다. 일주일? 그쯤이었던가? 뮌제 로헤올의 장례가 끝난 후였던 건 기억한다. 그의 침실을 차지한 그녀가 한창 누워 있을 때였으니까.
퍽 수준 높은 논문을 들고 왔기에 심사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기쁘게 통과시켰다. 그리고 외부에 머물며 연구할 것을 원한 사람이라 끼북이를 주었다.
하지만 분명 마법을 걸었다.
중앙탑 소속의 일개 학자들이 중앙탑의 ‘기밀’을 알게 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연히라도 서류가 유출되는 일도 있고, 우연히 부탑주의 정체를 알게 되는 등 꽤 중요한 우연이 본의 아니게 일어나기도 하는 데다가, 논문 발표 시 필명을 본명과 달리 쓰는 학자들을 서로서로 알고 있는 등 비밀로 지켜야 할 부분도 여럿 있었다.
따라서 중앙탑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깥에 누설할 수 없도록 마법을 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마법을 압도하는 실력의 마법사가 있지 않는 한, 마법은 깰 수 없다.
섬세한 무언가는 필요하지 않았다. 시동한 마법을 파훼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마법만 있으면 되었다. 마법을 파훼한다는 건 힘을 쏟아부어 깨뜨리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아주 강한 마법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탑 소속 마법사는 그렇게 말했다.
뮌제 로헤올도 그렇게 마법을 깨뜨렸으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