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그녀는 능력 있는 가주였었고, 돌아오거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따라서 로헤올에게도 뮌제의 귀환은 좋은 일이었다.
자작은 긴장이 섞여 무거운 호흡으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제 폐하께 보고 올렸습니다.”
“…….”
“폐하께서 각하를 이대로 두시진 않을 겁니다.”
“그러겠지.”
뮌제는 태연한 얼굴로 인정했다. 그녀의 생존이 온느발레에 알려진 이상, 로헤올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했다.
뮌제가 아는 나네트라면 기뻐할 것이며, 한편으로 분노할 것이다.
로헤올의 가주가 아닌 자를 죽이고 감추는 건 훨씬 쉬우므로 기뻐할 테고, 뮌제가 온느발레로 돌아오지 않고 버리기를 택했다는 사실에 분노할 터.
황제가 여전히 뮌제가 아는 황제라면 그럴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전전 공작,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전 공작,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애초에 전 공작이 된 적 없이 항상 현 공작이었던 것처럼 여겨질 존귀한 사람은 퍽 온화한 눈으로 자작을 응시하며 물었다.
“내 안위가 염려되나?”
“예.”
“그래서 로헤올 공작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예.”
명확한 대답을 듣고 뮌제는 피식 웃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기에 나오는 반응이었다.
자작이 뮤니르를 가장 많이 염려하고 있다는 걸 그녀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전 공작은 굳이 자작의 속내를 들추려 하지 않았다.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것과 알고도 넘어가 주는 것은 이런 대화에서도 평범한 일이었다.
뮌제는 고개를 돌려 잠깐 서점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따라 자작의 눈길도 그쪽으로 움직였다. 그림자 냄새가 나는 듯하게 서늘한 어느 구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전 공작은 길게 숨을 쉬었다.
그녀는 다시 자작을 보고 입을 열었다.
“자작. 사람은 언젠가 죽지. 나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죽을 걸세.”
“…….”
쌓인 책들에서 시선을 거둔 자작이 그녀를 보았다. 중년 사내의 그 점잖은 눈을 들여다보며 뮌제는 또렷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황제의 손에 의해 일어날 일은 아니야.”
심지 있는 음성이 마치 숲속에 내리는 비처럼 차분하게 떨어졌다.
자작은 시선을 조금 떨어뜨렸다.
이는 젊은 자신감 따위로는 감히 표현하지 못할 위엄이었다. 자신만만하다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건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귀엽고 발랄한 표현이었다.
이 품위 있는 확신을 들은 자작은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리 고상한 뮌제 로헤올이 ‘어떤 사소한 감정’을 이유로 어리둥절하게 당하는, 그야말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자작은 뮌제의 턱끝까지 내려갔던 눈길을 다시 올렸다.
“각하. 폐하께서는.”
“…….”
그러나 정말이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입에 담는 것도 민망하고 수치스러웠다. 심지어 그의 일도 아닌데!
자작은 이마를 짚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정리한 호흡으로 단숨에 물었다.
“각하. 에흐베로 가실 의향은 아예 없으신 겁니까?”
“왜.”
“……폐하께서는, 그러니까……, 각하께서 거기로 가시는 걸 원치 않으실 겁니다. 이미 대공이 각하를 찾아와 머물렀다는 보고가……, 올라가서…….”
뮌제는 이 사람이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기에 이렇게 어려워하나 하다가, 그쯤에서 영문을 알았다.
확실히 ‘실은 황제가 간지러운 감정에 젖어 미친 짓을 했다’고 설명하려면 저런 반응일 만했다. 더더군다나 이 사람은 ‘그런 감정’이 지금보다도 더 어색한 세대에서 성장한 사람이었으며, ‘그런 감정’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뮌제는 불쌍한 자작을 구해 주었다.
“됐네. 황제와 에흐베 대공을 말하는 거라면 그만해도 되네.”
뮌제의 덤덤한 반응에 뮤니르 자작은 도리어 대경했다.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계셨습니까?”
“무얼. 소문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군.”
뮌제는 쓰게 웃었다.
뮤니르 자작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뮌제 로헤올은 황제의 감정을 모르는 채로 죽었다’는 황제의 연심을 짐작하고 있었던 귀족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자작은 혀로 윗입술을 훑은 뒤 더듬더듬 말했다.
“그야 각하께서 폐하의 앞에서도…….”
“그 앞에서도 대공과 가깝게 지내서?”
“…….”
황제와 대공은 단 두 번을 만났지만, 첫 번째 만남에서부터 황제는 대공에게 특별한 반응을 보였었다. 사실 뮌제 로헤올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황제 앞에서 태도를 삼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다들 긴가민가했던 것이다.
황제를 존중했다면 조금 조심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했을 텐데, 뮌제 로헤올이나 에흐베 대공이나 변함없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이쪽 방면으로는 눈치가 없거나 주변에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무시했던 건가!
자작은 핼쑥해진 얼굴로 전 공작을 바라보았다. 뮌제는 재미있어하는 얼굴로 낮게 웃었다.
“자작. 내가 대공을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음은 차치하고, 애초에 나와 대공이 정말 이성적으로 각별했다 한들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었겠나. 나는 온느발레의 공작이고 그는 에흐베의 군주인데. 내가 윌리엄과 로헤올을 버릴 수 있었을까, 그가 에흐베를 버릴 수 있었을까.”
“…….”
“그래서 나는 우리가 얼마나 친하든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었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이에 대해서 대공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안다면 알고도 모르는 척한 것일 테고, 모른다면 그가 관심이 없기 때문일 테지.”
……아주 그냥, 똑같은 사람끼리 친구구나.
자작은 할 말 없는 입을 꽉 다물고 다시 입가를 닦았다. 입가를 가리며 시간을 끄는 것에 이만한 행동이 없었다.
뮌제는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아까 보았던 구석을 다시금 담았다. 금세 고개를 바로 한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웃음기는 천천히 옅어졌다.
“그리고 자작, 아마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를 걸세.”
“예?”
뮌제는 묘한 얼굴로 잠시 침묵하다가 미간을 문질렀다. 오래전, 살롱에 앉아 대귀족 가주들과 대화할 때에나 하였던 손짓이었다.
짧은 숨이 새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물었다.
“자네.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황제가 날 적대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
“적대……까지는 아니고……. 아무래도 경계는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분이 심중을 감추시는 것에 능숙하셔서 확신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느낀 적 없단 말로 받아들이겠네.”
“…….”
“자작. 모든 아티팩트는 발견되자마자 각 국가의 왕실 소유가 되네.”
“그렇지요…….”
전 공작이 무얼 말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뮤니르 자작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대꾸했다.
뮌제는 한숨 쉬듯 짧게 푹 웃었다.
“그걸 앞장서서 회수하는 집단의 장은 보통 군주의 최측근이 맡지. 여기 아리오의 은여우단만 해도 그렇고.”
“그렇지요.”
특수 수사기관 장의 자리는 실상 아티팩트를 빼돌리기에 가장 용이한 자리였다. 따라서 다양한 마법을 지닌 아티팩트가 어떤 귀족에게라도 흘러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군주가 굳게 신뢰할 수 있는 최측근이 맡는 게 당…….
뮤니르 자작의 안색이 변했다.
뮌제는 그 반응을 보고 길게 숨을 흘렸다. 흐린 미소가 걸렸다.
“루미나리에단을 맡기 전에야 내 능력이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상식적으로 로헤올 공작이 루미나리에단을 맡는 것 자체가 황제에게는 큰 부담이 되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로헤올이니까. 게다가 뮌제 로헤올이 황위 계승 서열 2위라는 건 그때에 이미 확정되어 있던 사실이지 않았던가.
“황제가 진정 나를 적대했다면 내게 계속 루미나리에단을 맡겼을 리가 없지. 날 적대한 순간 가장 먼저 앗아갔을 게 루미나리에단인데. 내 생명도 앗으려 한 사람이 루미나리에단을 좋은 변명으로 못 앗아가겠나.”
“하.”
자작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민망할 수도 있던 순간이었지만 뮌제는 웃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내 사후,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윌리엄이 그다음 루미나리에 단장을 잇게 했네. 윌리엄은 그때까지 몸이 약해서 이렇다 할 능력은 보이지도 못했었고, 나 대신 황위 계승 서열 두 번째가 되었는데.”
“…….”
“자네들은 그게 윌리엄과 황제가 동맹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사라고 생각했겠지. 맞나?”
“아닙……니까?”
“아마도 아닐세. 윌리엄의 무얼 믿고 아티팩트를 맡기나. 날 배신한 윌리엄이 황제라고 배신하지 못할까.”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자작은 너무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하……. 이게 무슨……. 저는 이게 이해가…….”
“내가 황제와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야.”
“…….”
“내가 최근에 제이 왕자에게도 말한 적 있지만, 자작, 황제는 그럭저럭 불행한 사람일세. 그 왕자나 황제나 꽤 비슷하지.”
알 수 없는 연민이었다.
황제를 용서하려는 건가?
하지만 곧 그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눈을 가늘게 내리뜬 뮌제는 이렇게 부드럽게 조소했다.
“그리 비슷하게 한심할 수 있는 것도 재주일세.”
* * *
라파엘은 뮌제가 비밀리에 중앙탑 소속 학자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앙탑이 발표하는 논문 중 뮌제 로헤올이라는 이름은 없었으므로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으리라는 건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뮌제가 무슨 논문을 쓰는지를 구태여 찾아보려고 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뮌제가 악마에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어쩌면 악마에 대해서 논문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뮌제는 그걸 모른다.
대공이 그녀가 중앙탑 소속 학자임을 안다는 점도, 그가 무슨 짐작을 하고 있는지도, 그녀는 몰랐다.
그녀가 모른다는 걸 대공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공은 뮌제가 ‘사라진 후’, 어쩌면 그녀가 중앙탑과의 연결을 유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뮌제 로헤올이 중앙탑 소속 박사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으니 폐쇄적인 중앙탑만큼 몸을 숨기기에 좋은 곳이 없었다.
그럼, 거기까지 생각했으면서, 어째서 탑주에게는 뮌제가 죽은 뒤 2년이나 지난 후에야 뮌제에 대해 물었는가.
“어서 오십시오.”
2년 동안 대공이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이행한 후에 최후의 방법으로 탑주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에흐베에 온 탑주는 눈앞에 서 있는 청년을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네……. 자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
옥타브는 예의 바르게 미소했다.
왜 여기에 있고,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 한다면, 그 답은 간단했다.
애초에 대공의 명령을 받아 중앙탑 소속 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중앙탑의 비밀을 누출할 수 없게 하는 마법도 파훼된 지 오래였다.
옥타브는 그 상태로 중앙탑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그의 능력 안에서 더 찾을 수 있는 곳이 없을 때, 대공이 직접 나서서 다시 한번 중앙탑을 수색했고, 그 후에야 대공은 탑주에게 서신을 통해 물었다.
온느발레의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이 혹시 중앙탑에 몸을 의탁하였습니까?
거기에 탑주는 구구절절 정성스레 거짓말을 써서 답변을 보냈다.
하하.
하하하하하.
하하…….
노인은 회의실로 안내받으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에흐베 대공에게 유일하게 저지른 죄라고는 그것 하나뿐인데, 그 하나가 너무 크다. 제발 발각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권력 사이에 끼어서 부대끼며 살아가기 진짜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