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과연 대공은 놀란 것처럼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짧게 웃었다.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그 사람을?”
“…….”
“기울어 갈 나라의 군주로?”
황제는 죽을 것이다.
아주 처참하게 죽을 것이다. 이분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루시안은 책상에서 일어난 대공을 눈으로 좇으며 확신했다. 의자 뒤로 돌아가, 아직 위스키가 남아 있는 잔을 책상에 내려놓은 대공은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탑주에게 연락해. 내가 만나고자 한다고.”
“…….”
크게 숨을 들이켠 루시안은 고개를 숙인 뒤 퇴실했다.
어째서 부르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물 많고 꾀 많은 노인은 연락을 받고 발작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비록 뮌제 로헤올을 위한 일이었다 할지라도 탑주가 에흐베 대공에게 대놓고 거짓을 말했다는 건 변하지 않기에 지레 찔리리라.
로헤올 전 공작이 중앙탑 소속 학자라는 사실을 대공은 알고 계셨다.
대공이 알고 있다는 걸 전 공작은 아마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탑주도 모를 테며…….
그래도 찔리겠지.
와서 또 거짓을 늘어놓으면서도 찔릴 것이다.
말이 꼬이지 않도록 의논하겠다고 로헤올 전 공작에게 달려가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것에 대공이 더 노여워하실지도 몰랐다.
남작은 복도를 걸어가며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했다.
* * *
잡동사니의 길은 공사 중이었다.
뮌제는 잡동사니의 길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전과 같지 않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쉽사리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서 있거나 외면하거나 도망쳤다.
뮌제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며 이 길을 부수고 태운 사람이었고, 심지어 마법사였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그들이 보던 평소와 다르게 화려하기도 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이 길의 거주자들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기에 충분한 이유를 갖춘 사람이 된 것이다.
상관없다.
그녀가 그들을 보호했던 건 그들이 평민들이기 때문이었다. 권세 잡았던 자의 도리와 양심, 버릇이었을 뿐, 저들에게 정이 들어 하였던 조치가 아니었다.
뮌제는 용케 무너져 내리지도, 불타지도 않은 서점을 라파엘이 돌려주고 간 열쇠로 열었다.
“…….”
작게 한숨을 쉰 그녀는 뒷목을 주물렀다.
제이를 지킬 때 쓰러졌던 책장이나 흩어졌던 책은 은여우단이 깔끔하게 정리해 준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다시 꺼낼 테니 결국 필요 없는 정리가 되었지만.
그녀는 제발 저희가 다 하게 해 주시라는 기사들의 애원을 물리쳤다. 어차피 아주 무거운 건 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못 움직일 때마다 사지의 근육이 아팠다. 그제 저녁에 일어난 몸으로 이만큼 움직이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여, 무리하지 않고 쉬엄쉬엄할 테니 염려 말라고 다독였다.
그렇게 한동안 기사들과 함께 책들을 꺼내 분류하고 있자니, 피트가 들어와 카운터 앞에 섰다.
책을 잔뜩 안고 있는 뮌제를 물끄러미 보던 피트는 머뭇머뭇 물었다.
“……괜찮냐?”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투에 뮌제는 빙긋 웃었다.
“손님이신가요? 책은 팔지 않습니다.”
“…….”
적어도 그가 손님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는데…….
피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뮌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왜일까요? 손님의 얼굴을 보자마자 배가 고프네.”
“…….”
일 초 기억력을 가진 놈한테도 몸에 새겨지는 기억은 존재하는 모양이다. 확실히 그랬다. 피트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지난 열흘도 그의 뇌리에서 아련하게 사라져 갔다.
뮌제는 휘청휘청 다가와 카운터 옆 바닥에 책 무더기를 올려놓았다. 피트는 손이 가벼워진 뮌제와 눈을 마주치고 또박또박 말했다.
“내 이름은 피트다.”
“음?”
이 소개도 오랜만에 하니까 어색했다. 이쯤 되니 피트는 자신에게 어떤 자부심이 있었던 걸 인정해야 했다. 이 길에서 그녀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그 자괴감 드는 자부심.
한숨을 푹 쉰 피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설명했다.
“손님이 아니라 옆옆집에 사는 화가야.”
“…….”
“네가 매일같이 끼니 챙겨 먹는 곰처럼 습격했던 옆옆집의 불쌍한 화가. 피트.”
“……아, 그, 매번 멍청하게 습격당했던 피트 씨?”
“너 좀 죽여도 돼?”
피트는 진지하게 물었다.
투지가 먼저였기 때문에, 그녀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건 뒤늦게 깨달았다.
피트의 눈이 한발 늦게 휘둥그레졌다.
“너…….”
“그런데 왜 오셨나요, 손님. 청소하느라 바쁜데.”
“손님 아니라니까. 그러고 보니 책은 왜 이렇게 다…….”
장갑을 끼고 곱게 다루는 것 같긴 하지만, 책을 바닥에 쌓고 있었다.
많이 빈 책장들을 휙 둘러본 피트는 눈을 찡그리고 말했다.
“엄청 귀한 책이라면서. 이렇게 쌓아도 돼? 맨 밑에 깔린 책에 하중이 실릴 텐데.”
“아. 문제이긴 하네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엄청 귀하기도 할 테고.”
“그 말은…….”
“저한텐 쓸모없는 쓰레기들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쓸모도 없었는데 적어도 이 무게 정도는 버텨야지요. 아, 이 광경을 보면 학자들은 미치려 들 텐데. 생각만 해도 재밌네.”
“……?”
무슨 쓰레기 같은 말을 들었는데.
피트는 극적으로 귀를 후비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충격 받은 얼굴로 말했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인성이 그 모양이 됐냐…….”
“날 때부터 이랬습니다. 착하다고 엄청 칭찬 들으면서 자랐죠. 제가 생각해도 저는 정말 유쾌하고 좋은 사람 같아요.”
“인성은 그 모양이고 양심은 탈출했고. 이야. 너 진짜 세상 살기 편하겠다.”
“어휴…….”
“칭찬 아니거든?!”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울컥 소리쳤다.
안쪽에서 책 몇 권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책장에서 책을 빼내다가 실수한 모양이었다.
피트는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을 잠시 살폈다. 이 자식과 함께 책을 정리해 주고 있는 저 의문의 사람들은 누굴까. 솔직히 딱 봐도 보통 사람들은 아니었다. 혹시 은여우단 기사들인가. 하지만 제복은 입고 있지 않은데.
얼굴이라도 한 번 제대로 보고 싶었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쪽에는 실수로라도 한 번 시선을 주지 않았다.
피트는 실제로 그들이 귀와 눈을 잠깐 없애고 싶어한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점잖은 주군의 저런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죄송하고 민망한 탓에. 동료들과 함께 보니 더 민망했다.
“진짜로. 책들 어떡할 거야?”
“…….”
“서점 접는 건 아니지? 이 길에 남을 거지?”
“책은 친구에게 떠넘길 거예요.”
“친구?”
그녀는 서점 접는 일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책에 대해서만 대답했다.
피트는 답답한 심정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래, 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네 요리 먹고 체한 그 친구만 아니면 돼.”
“그 친군데.”
“이제 이 책들도 떠넘기고?”
“네. 애초에 그러려고 몇 년간 장갑 끼고 귀하게 다뤄 준 건데요. 내 걸로 남길 거였으면 열 받을 때마다 한 권씩 불태워서 이미 다 불타 없어졌을걸.”
“……쓸모없는 건 다 떠넘기는 거냐?! 쓰레기 같은 요리도 떠넘기고? 쓰레기 된 책들도 떠넘기고? 그 친구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를 친구로 뒀지? 그 불쌍한 친구는 도대체 어디 사는 무슨 현자야?”
“그러게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
그녀는 피트와 함께 그 친구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복장 터지는 사람은 피트였고, 울고 싶어진 사람은 기사들이었다. 그녀를 주군으로 모시는 기사들과 아닌 기사들 모두.
다만 베렐은 한 번 힐끔 주군의 표정을 확인했다.
그녀는 살짝 웃었다.
“뭐, 비슷한 맥락으로, 당신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 인질이 된 걸까요?”
“인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내가 자발적으로, 너를 불쌍히 여겨서, 그래서 음식을 만들어 주는 거다.”
당연히 이해 못 했겠지.
진짜 인질인데.
뮌제는 인질이란 단어를 다른 쪽으로 생각한 피트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보다가,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황망해 하는 얼굴이 보였다.
이미 알고 있었던 그녀의 기사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책을 정리했다. 뮌제는 빙그레 웃었다.
“자작.”
피트는 자신의 뒤를 보고 있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뒤를 본 직후 얼어붙었다.
누가 봐도 귀족인 남성이었다. 그리고 방금…….
직전까지 자신과 만담을 나누던 바보가 저 귀족 나리에게 무어라 했는지를 똑똑히 들었기 때문에, 피트는 차마 그녀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목덜미에 사악 소름이 끼쳤다. 뒤통수의 피부가 얼얼하게 저렸다. 긴장으로 온몸의 살갗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묘하게 신체적 공격력이 엄청나.]
[예?]
[실수로 정수리 때려서 사람 쓰러트리고, 실수로 사타구니 때려서 반쯤 죽여 놓고. 이번에는 뒷목 때려서 기절이잖아. 단 한 대로 기절시키는 일이 흔할 것 같진 않다. 혹시 일부러 기절시킨 거냐?]
정말 목숨을 건 전투를 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서점의 그 바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바보이길 바랐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드 세네허.”
아니었던, 모양이다.
남성은 온느발레어로 무어라 말하며 가슴에 손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피트는 철렁 내려앉은 가슴으로 가까스로 뮌제를 돌아보았다. 여태 애써 무시하고 있었던 그녀의 질 좋고 단정한 옷차림과 가슴에 꽂은 보석 브로치를 이제 더는 못 본 척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방긋거리는 웃음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미소하고 있었다. 그건 위즈의 미소가 아니었다.
위즈가 아닌 그녀는 자상하게 말했다.
“가라. 이 세상에 내게서 널 지켜 온 네 가족이 있음을 마지막으로 알려 주마.”
“…….”
“그간 날 감당하느라 수고 많았다. 아리오의 아이야.”
피트는 겁에 질린 숨, 멍한 숨을 들이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정신없이 서점을 빠져나온 화가는 제 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주저앉았다.
* * *
뮌제는 먼저 기사들을 서점 밖으로 물렸다.
뮤니르 자작은 뮌제가 가리키는 흰색 윈저체어를 끌어와 앉았다. 불편했지만 불평할 상대도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보게 된 서점 내부를 멀거니 살폈다.
이런 곳에서 지내셨다. 그 뮌제 로헤올이.
서점 전부를 통틀어도 로헤올 저택의 가장 작은 방보다 작을 것 같은데.
“자네가 올 거라 생각했네. 오늘 돌아가나?”
자작은 뮌제의 부드러운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가 아직 서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미치자, 즉시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야. 앉게.”
그를 만류한 그녀는 카운터 뒤에 있던 의자에 좌정했다. 자작도 다시 앉았다.
뮌제는 다시 물었다.
“오늘 귀국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겠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작은 마른 침을 삼켰다.
윌리엄이 사망한 이상, 뮌제가 로헤올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로헤올은 현 방계로 넘어간다. 아마 뮌제 로헤올의 숙부가 가져갈 것이다.
뮤니르의 권력을 이 상태 이대로 이어 가기 위해서는 뮤니르를 알고 뮤니르에 호의적인 가주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남자는 뮤니르에 밍숭맹숭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뮤니르를 위해서 뮌제가 돌아오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