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옥타브는 주군을 쫓아 걸어가며, 사악 차가워진 두 손을 등 뒤에서 잠시 맞잡았다. 온기가 돌도록 손끝을 주물렀다.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은 에흐베에 오지 않았다.
새벽 같은 아침부터 옷과 장신구, 치장을 도울 사람들을 챙겨 아리오로 보낸 뒤 좋은 소식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이는 대공 한 분뿐이었다.
주군의 표정이 야릇하게 차가운 것이야 언제나 있던 일이다.
그래서 옥타브는 지금 대공의 진짜 내심을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표정은 같아도 속내가 같을 수는 없다는 것만은 알아서.
힐끗 확인한 루시안은 완전히 무표정이었다. 예상했다는 듯 온전히 평온한 얼굴이다.
옥타브는 주군께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하지만, 정말 그 성정, 그 자존심, 그 상황에 설마 온느발레로 귀향하시겠다 할 줄은……. 에흐베에 돌아오지 않은 건 분명 그런 것일 텐데.
“온느발레 황실의 승계 서열이 어찌 되었었지?”
갑자기 들린 낮게 나른한 목소리에 옥타브는 흠칫 떨었다. 그건 루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앞에서 걸어가는 대공의 넓은 등을 바라보던 눈길이 옆을 보았다. 옥타브와 눈이 마주쳤다. 두 보좌관은 그리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대답한 사람은 옥타브였다.
“현재로서는 전전 로헤올 공작이 두 번째…….”
“그 사람 전에. 황제의 다른 사촌이었던가. 그 후작이.”
몰라서 묻는 게 아니었다.
당연히 다 기억하시겠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지금 찾아오겠습니다.”
현 황제의 고모가 로헤올로 가서 공작과 결혼하여 뮌제와 윌리엄을 낳고 죽었고, 현 황제의 백부는 본디 선황이 황위에 오르기 전 황태자로 유력했었음에도 황위를 스스로 포기하고 후작과 결혼하여 남아를 남긴 뒤 병에 걸려 죽었다.
그 남아가 황위 승계 서열 첫째이고 뮌제가 둘째다.
선황의 유일한 자식인 나네트가 황제이며 그녀가 아직 무자하므로 황실 방계가 승계 서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황제가 서열 첫째인 후작은 두고 보고 있으면서, 뮌제 로헤올은 쳐낸 이유는 복합적일 것이다. 그 자체는 두 보좌관도 대략 짐작했다. 정확히 어떤 이유들이 얽혀 있을지 세세하게는 딱히 짐작할 수가 없지만, 그 이유 중 무엇 하나 대공이 이해해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두 사람은 대략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대공이 먼저 꺼낸 이 화제가 두려웠다. 바로 어제 저녁에도 생각해 봤던 일이긴 했지만, 정말 현실이 될 것 같기에.
온느발레는 이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고, 나네트는 그 제국의 황제였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신분의 정점에 서 있는 이를 떨어뜨린다는 건 당연히 어색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 감정은 그들이 온느발레 황제에게 가진 반감과는 별개의 것이며, 에흐베 대공이 무리 없이 해내리라는 믿음과도 별개의 것이었다.
긴장한 눈으로 주군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대공은 ‘필요하시면 지금 가서 찾아 오겠다’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 다음으로는.”
이 또한 알고 계실 터.
짧은 시간 머뭇거리던 옥타브를 대신해 루시안이 대답했다.
“그 촌수는 거기에서 끝나고, 황제의 종숙으로 넘어갑니다. 기억하기로 백작입니다.”
“…….”
돌아오는 대답이나 질문은 없었다. 대공은 묵묵히 움직였다.
그늘진 침묵이 서늘했다.
걸어가는 소리와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희미한 활기마저도 차갑게 느껴졌다.
비단 오늘만의 느낌은 아니었다. 드비에 성은 본디 추울 정도로 침묵 어린 곳이었다.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녀도 어째서인지 그 소리나 활기가 먹먹하거나, 건조하게 차갑거나, 그늘진 것처럼 춥게 느껴졌다. 날이 좋아도 본성 건물에 들어서면 좋은 날씨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건물이 커서 서늘할 수밖에 없다 하는 실제 현상을 말하는 게 아니라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성내 분위기는 성의 주인을 따라가게 된다고 하는, 그런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드비에 성은 그야말로 현 대공 그 자체를 건물로 바꾼 것처럼 그늘졌다. 물론, 그렇다고 전 대공이 활기 넘치던 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게 된 옥타브는 별세한 전 대공과 현 대공의 사이까지 떠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새삼스럽게 주군을 보았다. 그리고, 그래서.
그래서, 문득 그는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황제를 도륙 내고도 남음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가 에흐베 대공과 같은 배경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유배 간 것처럼 반쯤 버려지게 된 곳에서 뮌제 로헤올과 같은 사람을 만나 버티게 되었다면.
한 줄기 빛, 유일한 구원, 눈보라 속 햇살 같을 그 단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면.
옥타브는 그 누군가에게 이미 달려들고도 남았다. 달려들다 뿐인가, 곱게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참살한 후에도 더, 더 죽이려고 애썼으리라.
에흐베 대공의 경우에는 그 누군가가 황제라서, 옥타브가 보기에 범접하기 힘들도록 너무도 까마득하게 높은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이 옥타브는 기겁했었다. 본능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상황을 자신에게 대입해 보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아니, 다르다 정도가 아니었다.
옥타브는 숨이 막혔다. 가정을 해 본 것뿐인데도. 상상만 해 본 것뿐인데도.
……어떻게 여태 참으셨지?
그는 대공이 느낄 마음을 제대로 알 수도 없었다. 그는 대공이 아닐뿐더러, 훨씬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수리가 불붙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여 이렇게 열이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참으셨지?
와. 그는 순수하게 의아했다.
죽은 이를 살아 있다 하시며 찾아 헤매실 때 제정신으로 계시긴 했던 건가?
아니, 아니다. 죽은 이를 살아 있다 하는 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옥타브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대경하지 않았던가.
끝이 보이지도 않고 끝이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것.
상상만으로도 아득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뮌제 로헤올이 정말 살아 있었던 것도 놀랍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는 주군이 이성을 유지하고 계신 것처럼 보이는 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살아 있는 뮌제 로헤올을 기어이 찾아낸 것도. 마침내 찾아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도. 그 사람을 순순히 놓고 오신 것도.
다 놀랍지만, 그 긴 시간 중 미치지 않으신 게 가장. 새삼스럽게. 진심으로.
집무실에 도착하자, 얼빠져 있는 옥타브를 대신하여 루시안이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주군이 먼저 들어가시는 뒤에서 루시안은 옥타브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찔렀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허리를 뒤로 접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베렐을 전담하여 감시했던 조의 조장인 캠벨이 넓은 보폭으로 그 뒤를 따라붙어 입실했다.
옥타브와 루시안은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옆으로 물러섰다. 빈자리에 캠벨이 섰다.
대공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
겉옷도 장갑도 벗지 않고 유리장으로 간 그는 손수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얼음 없는 스트레이트로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가만히 있던 그는 깊게 한숨을 흘리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존귀한 이는 책상 쪽으로 돌아와 책상에 기대듯 걸터앉았다.
시선을 받은 옥타브는 자세를 고쳤다.
“경. 그 사람이 아리오에서 편히 지낼 수 있게 필요한 걸 준비해. 저택이든 사용인이든. 경이 직접 가서 그 사람을 며칠 간 보필하도록 해.”
“예?”
“…….”
“그럼 온느발레로 돌아가시는 게 아니라……. 아리오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그래.”
왜?
이제 생존 소식이 온느발레에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온느발레로 화려하게 복귀하지 않으면 황제가 반드시 손을 댈 텐데.
왜?
어제 루시안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공작께서 지쳤는지 아직 지치지 않았는지가 관건일 것 같네.]
아니, 그럼. 아리오에서 머물다가 황제에게 순순히 살해당하겠다고?
충격을 받은 옥타브의 입이 벌어졌다.
에흐베 대공은 캠벨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보좌로 옮긴 옥타브와 다르게 현재 현장을 돌아다니는 무인인 기사는 옥타브보다 훨씬 단단한 눈빛으로 주군을 보았다. 대공은 나직하게 말했다.
“지켜라.”
담담하여 외려 냉혹하게 울리는 명령이었다.
“그 사람의 기사들은 이 이상 그 사람의 뜻에 반하지 않을 테지. 그 사람이 이대로 죽고자 한다면 살수가 와도 물러나 있을 자들이다.”
“…….”
“그 기사들을 제물로 죽이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을 지켜.”
대공은 그 말을 한 뒤 잔을 입가에 올렸다. 위스키가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목울대가 한 차례 움직였다.
잔을 내린 그는 분명하게 음성을 떨어뜨렸다.
“누가 죽어도 상관없다. 무슨 일이 있든 내가 경들의 뒤에 있다. 그 사람만 지켜.”
“예, 전하.”
“삼십 분 내로 준비해서 출발해. 아티팩트를 주겠다.”
“예.”
캠벨은 한쪽 무릎을 꿇어 왕에게 인사했다. 기사가 할 수 있는 경례 중 가장 깍듯하게 경외를 담을 수 있는 경례였다.
옥타브는 캠벨을 따라 나가려다가 멈춰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혹시 공작께서 돌아가라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는지.”
“그럴 일 없다.”
에흐베 대공은 서늘하게 잘랐다.
그의 지시로 온 이들이니 뮌제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를 놓을 생각 없다 했고, 그녀도 그를 놓지 않겠다 했다. 그가 뮌제를 이대로 두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도 알리라. 설령 몰랐다 하더라도 이제는 알게 될 것이다. 알아야 했다.
홀로 남은 루시안을 두고 대공은 침묵했다.
잡고 있는 잔과 그 안의 위스키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이 무정했다.
루시안은 잠잠히 주군을 기다렸다.
사실, 그의 머릿속은 긴장한 만큼이나 아득했다. 보좌 하나가 며칠간 자리를 비우니 다른 보좌는 죽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대공도 바빠지실 테니 무어라 말씀드리기도 어려웠다. 지금보다 더 바빠질 걸 아시면서도 옥타브를 뮌제 로헤올에게 보내셨을 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고, 대공은 문득 입을 열었다.
“에흐베와 교역하는 국가 중 가장 중요한 상대국이 어디지?”
“온느발레입니다.”
정확히는 ‘아직은’ 온느발레였다. 아직은. 아주 묘한 말이었다.
에흐베는 황제와 윌리엄 로헤올이 경계하지 않도록 조용히 움직이면서, 변화의 기반은 쉬지 않고 다져 왔다.
루시안은 대공이 뮌제 로헤올을 찾지 못할 것이라고 비로소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에나, 정말 하늘이 허락한 기적처럼 살아 있는 뮌제 로헤올을 찾은 후, 그 기반을 기반으로 정국政局과 판도版圖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지금, 뮌제 로헤올이 살아서 돌아왔다.
무언가는 바뀌게 될 것이다.
아까부터 질문을 반복하시는 건 생각을 정리하시기 위함이거나 어느 정도 보좌들에게 언질을 해 놓기 위함이실 것이다.
교역 이야기까지 나와 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이 들자, 루시안은 주름진 입가에 한 번 힘을 주었다가 풀고 입을 열었다.
“전하. 감히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공이 잔에서 눈을 들었다.
루시안은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공작 각하를 새 황제로 추대하려 하십니까?”
아니겠지.
전 로헤올 공작이 황실과 엮이는 것은 물론, 아예 온느발레 자체와 엮이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실 것 같았다.
적어도 온느발레의 새 황제로 전 로헤올 공작을 추대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주군의 생각을 조금만 더 알아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