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살펴 가십시오.”
“당신도. 수고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후작.”
그러나 클리포드 후작에게 인사하는 음성은 담담했다.
뮌제가 후작에게 ‘그대’나 ‘자네’를 대신하는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음을 바로 인식했음에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계단을 내려와 건물을 나오고 나서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익숙한 침묵이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마냥 편안하지는 않았다. 아닌 척 뮌제도 라파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가 회의실에서 한 말이 무슨 뜻인지 그가 알아차리리라는 걸, 알아차렸다는 걸 그녀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다.
그는 옆에서 걷고 있는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전반적으로 화사하고 건강하게 보였다. 나아지지 않은 안색은 화장으로 가린 것뿐이라 사실 무리하고 있는 것인데도.
그녀의 몸이 언제, 얼마나 회복될지 아직도 모른다.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상태가 나빴던 눈부터가 실은 멀쩡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 완전히 건강해지지는 못할 것이다. 생명의 근원을 옮기는 도중에 다른 힘이 개입하여 기적적으로 중단되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벌써 두 번이나 시도했다.
생명의 근원을 다른 이에게 옮기려 했던 적이 있는 사람이 멀쩡할 수는 없다.
또한,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사람과 모든 게 같을 수는 없었다.
뮌제와 라파엘은 멀쩡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의 경우는 뮌제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뮌제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나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뮌제의 상태가 지독하게 나쁘다는 뜻이었다.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증언을 하겠다는 건.”
“라파엘. 나, 한 번은 황…….”
“아리오에 남겠다는 거지.”
제를 만나야겠지. 뮌제가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라파엘은 따라 주지 않았다.
그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장갑을 벗어 한 손에 몰아 잡고 나서, 눈이 부신 듯 눈을 찡그린 그녀의 이마에 빈손을 대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다시 말했다.
“온느발레에서 누가 오든 아리오를 보호하겠다는 건.”
“…….”
“뮈즈. 여기에 남아 있겠다는 거지.”
뮌제는 침묵했다. 머리를 짧게 자른 걸 보았을 때부터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였을 터다.
온느발레 대귀족 가문의 현 가주들 모두가 어느 정도 기장이 있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짧게 자르는 것은 머리가 희게 세기 시작하여 그 흰색이 남에게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나 가능했다. 그게 그들이 가진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으며, 어떤 예의이기도 했다.
그런 사회에 이 머리 모양으로 돌아가면 쓸데없이 말이 나올 것이다. 그녀는 로헤올이고, 따라서 그 누구보다도 더더욱 그 권위의 상징을 지켜야 마땅하므로.
마찬가지로 장갑을 벗던 그녀는 뜨거운 물기가 어린 숨을 흘리고 대답했다.
“맞아. 나 전 공작으로 여기에 남을 거야.”
“뮈즈. 너 아까 온느발레에 전쟁하자고 했어. 온느발레 안에 온느발레인으로 있어야 황제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해.”
“찾아오거든 상황에 맞춰서 대응하면 돼.”
“그 몸으로.”
라파엘이 한순간에 잠겨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몇이나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이러지 마.”
멈추지 않고 걷는 걸음은 여전히 태연했다.
뮌제는 여전히 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손을 잡고 내렸다.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친구. 사랑하는 친구. 윌리엄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유일했던 사람.
보고 있는데도 그립고, 이미 사랑하는데 계속 사랑하게 되는 친구.
로헤올의 역사가 만든 짐과 그녀의 실수가 만든 짐에 의해 짓눌려 가는 그녀를 끊임없이 건지고 건지며 제정신으로 버티게 해 줬던 유일한 사람.
지치거든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구원자.
그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라파엘은 모를 것이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신발 아래에 고였다. 뮌제는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라파엘.”
“…….”
“친구야.”
“응.”
어린 날 장난스럽게 불렀던 그대로 그를 불렀다. 침묵하던 라파엘도 그때처럼 대답했다.
뮌제는 손을 잡고 있는 라파엘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다. 말했다.
“끝났으니 돌아가. 다 해결했으니 이제 네가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잖아.”
“…….”
“윌리엄이 없으니 온느발레는 이제 내게 가치가 없어. 로헤올도 그렇지.”
로헤올, 그 더러운 가문.
기원후 931년까지 약 삼백 년간 로헤올의 소유였던 더러운 땅은, 같은 해 기원후 931년 그녀가 공작이 되자마자 포기했다. 황제에게 반납한 것이다. 현재 중앙탑 옆의 영지가 로헤올이 가진 유일한 영지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로헤올의 방계들과 로헤올을 대영주로 섬기는 소영주들이 찾아와 결정을 재고해 주시라며 어린 공작에게 빌었음에도 소용없었다.
로헤올의 권위며 로헤올 영지민이며 로헤올의 세력이며 전부 소용없었다. 뮌제는 마법과 윌리엄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를 원했다. 마법에 진저리쳤다. 더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후 세대, 마법이 없는 탓에 로헤올이 몰락해야 한다면 기꺼이 몰락하라.
그 결정은 여전히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땅을 버렸음에도 로헤올이 여전히 더러운 가문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악마. 그 더러운 것에 물든 땅. 마법. 역겨운 것. 욕심. 권세. 마법. 마법. 마법사.
그녀의 죄.
더는 로헤올을 감당할 수 없었다. 버텨야 하는 이유가 죽어 버렸으니, 이제 되었다.
“전 공작으로 남을 수 있으면 됐어. 그 정도만 찾으면 됐어. 충분해. 로헤올을 지키기 위해 머리싸움하고 싶지 않아. 지킬 이유 없는 것을 위해 버티고 싶지 않아.”
차기 공작이 로헤올을 이끌 것이다.
로헤올의 비밀은 이제 승계되어 봤자 쓸모가 없으리라. 차기 공작이 과연 어떤 심정, 어떤 분노로 그녀를 보게 될지는 알 바 아니었다. 무책임한 전 가주를 처단하러 올지도 모르지. 그리하여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때에 처리하면 된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책임에서 완전히 물러나서 쉬고 싶을 따름이다.
붙잡고 있어야 했던 윌리엄에 대한 책임이 끊겼으니, 잠시라도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쉬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며칠이고 멍하게 누워 있어 보고 싶었다. 그런 사치를 잠시라도.
죽은 윌리엄에게는 염치없게도.
그녀는 말없는 라파엘을 보지 않고 계속 앞서서 느긋하게 걸었다.
“황제가 보내는 자들쯤은 막을 수 있어. 이제 다 알려졌으니까 보이는 데에 제한도 없지.”
마법 이야기다.
제한도 없다 할 때 건물에 들어섰다. 기분 좋게 말간 볕이라고 생각했는데 볕은 볕인지,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몸이 조금 식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파엘은 그녀를 불렀다.
“뮈즈.”
“어? 아.”
반사적으로 그를 돌아보았던 뮌제는 직후 그에게 부드럽게 끌어당겨졌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품 한가득 오가는 온기와 향기에 뮌제의 몸이 풀려 갈 때쯤, 라파엘은 그녀를 안은 채로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네가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 오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뮌제의 마법을 거론하는 건 처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뮌제는 흠칫 굳었다. 라파엘이 무얼 말했는지 인지하는 건 그다음 일이었다.
라파엘은 낮은 목소리로 이었다.
“써서도 안 되지.”
“…….”
“마법을 쓰다가 죽으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뮌제는 호문클루스가 없었다. 악마가 떠드는 그 말을 라파엘은 분명하게 들었다.
“죽으려 하지 마.”
그가 기어이 입에 담은 ‘그녀의 죽음’은, 두 사람 모두 어제 하루 간 피해 왔던 화제였다.
라파엘의 목소리로 들으니 여태 곁에 두어 왔던 죽음보다 끔찍하게 들린다. 뮌제는 어지간해서는 이 단어를 말하지 않으려 했을 그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무얼 말하는 것보다 라파엘이 빨랐다.
“뮈즈. 나는 너를 놓을 생각이 없어.”
“……나도 널 놓지 않아. 너는 내게 유일한 친구야.”
“…….”
“라파엘. 전에 한 번 말했지만, 내가 널 살린 것에 의미를 두지 마. 그 한 번 때문에 내게 잡혀서 네 시간을 허비하고 있, 잖아…….”
말하는 도중에 더 꽉 안겼다. 뮌제도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주었다.
라파엘은 깊은 해구에 추락한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내가 널 사랑하는 게 왜 내 시간을 허비하는 거야?”
“…….”
“오히려 네가 내게 잡혀 있는 거야. 내가 널 몇 번 위로한 것에 붙잡혀서 네 시간을 허비하는 거야.”
“그렇지 않아.”
“나도 그렇지 않아.”
마시지 않은 술에 취할 것 같다.
뮌제는 저야말로 탕몰하여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조금 아득해졌다. 눈앞이 따끔따끔 아팠다. 통증이 어리는 눈을 꾹 감았다. 긴 숨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에게 라파엘은, 그녀가 일방적으로 수많은 의미를 가지고 사랑하는 친구였다.
그녀에게 라파엘은, 그녀가 목숨을 구했다는 이유로 친절하게도 그녀에게 잡혀 줘 있던 친구였다. 그 이유 하나로 다정하게도 그녀를 붙들어 주었던 친구였다.
그 이유 하나로, 서로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둔 무언가를 털어놓지 않고도 신뢰를 주고받도록 허락해 주었던 친구였다.
“네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넌 나를 구했어.”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기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구원을 그가 말했다.
“난 네가 내게 생명을 주려 했던 그 일 전부터 너를 사랑했고, 사랑했어.”
이것도.
“네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줄 때에도 너는 나를 구해.”
이것도…….
점차 짙어지는 목소리가 그녀를 밧줄처럼 휘감았다. 진흙 늪처럼 옥죄었다.
“네가 너 스스로를 끌어내려 나와 같이 진창에 있어 주니 기뻤고, 네가 너 스스로를 끌어내려 같이 진창 수준에 머무르려 하니 싫었어. 네가 널 더 사랑하길 바랐어.”
“무슨 소리야. 난 너와 있는 게 진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 알고 난 지금도 나는 네가 널 더 사랑하길 바라.”
라파엘은 진창에 있지 않았다. 진창 수준의 사람도 아니었다. 진창은 그녀가 서 있던 곳이지. 진창은 그녀가 책임져야 했던 모든 것이지. 진창은 마법이지. 라파엘은 진창과 상관이 없었다.
떨리는 뮌제의 말을 들었을 텐데도 듣지 않은 것처럼 그는 계속 말했다.
“너는 행복하게 네 삶을 살 권리가 있어. 태어났잖아.”
로헤올 공작으로 수고했잖아. 실수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려 했잖아. 죽으려고 각오도 했었잖아.
그런 말이 나왔다면 어땠을까. 방금 들은 말보다는 마음에 덜 박혔을까?
아니면 그 말들도 라파엘이 말했으니 지금과 같은 깊이로 마음에 박혔을까.
마법사로 태어났고, 로헤올 공작이 될 마법사로 태어났다. 태생이 그토록 더럽고 혐오스러웠다. 행복하게 내 삶을 살 권리는 그때부터 없었을 텐데 라파엘은 태어났기에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뮌제는 그녀의 머리 뒤를 한 번 쓸어내리고 목뒤를 감싸는 단단한 손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라파엘의 등을 토닥거렸다. 눈꺼풀을 올려 드러난 눈은 새빨갰다.
라파엘은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의 왼손은 그녀의 오른팔을 타고 흘러내렸다. 뮌제의 오른손을 지그시 올린 그는 그 손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그녀가 죽은 뒤 라파엘에게 전해 달라 베렐에게 맡겼던 그 반지였다.
그러나 뮌제는 돌아온 반지 자체보다, 그 반지를 끼워 주는 그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있음에 주목했다. 그는 본디 이 반지를 오른손 약지에 끼고 있었다. 우정을 표하는 반지이므로 그게 당연했고, 실은, 그녀가 기억하기로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오른손에 있었다.
뮌제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 약간 번지는 시야로 보이는 라파엘은 희미하게 미소하고 있었다. 이 그늘.
우리의 그늘.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
“잊지 마. 우리는 서로를 가졌어.”
[나는 너를 놓을 생각이 없어.]
바로 조금 전에 주고받은 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