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70)화 (70/120)

# 69화

“…….”

뮌제는 두 시간 전의 라파엘을 떠올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무어라 말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손 그늘을 만들어 빛을 일부 가리고, 창턱에 허리를 기댔다. 오른 장골에 단단하게 부딪혔다. 생각에 잠긴 연회색 눈동자는 화창한 바깥과 오가는 사람들을 의미 없이 담았다.

그 눈은 곧 깨어났다.

그녀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나온 듯한 기색이 있었다. 먼저 가겠다고 한 사람을 따라잡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다. 가까이에 선 단정한 남자는 그녀에게 인사했다.

“로헤올 공.”

얼마 전까지 평민인 줄 알았던 사람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도 한 점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리오어로 그녀를 불렀다.

손 그늘을 내린 뮌제는 온화하게 미소했다.

“후작.”

그녀는 변하지 않은, 유창한 아리오어로 화답했다.

그러나 달랐다.

위즈가 짓던 순진한 미소나 어리숙한 느낌의 미소와도 달랐고, 뭇사람이 짓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와도 달랐다. 확실히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것처럼 짓는 미소였다.

엘르시어의 앞에 있는 사람은 로헤올 전 공작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비스듬하게 그늘을 그렸다. 연한 색의 속눈썹에 빛이 내려앉아 빛났다. 표정과 차림도 달랐고 몸가짐도 달랐다. 창에 기대어 있는데도 우아하게 보이는 건 그 탓일 터다.

카운터에 기대어 눈을 동그랗게 뜨던 위즈에게서 느껴지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잠시 그녀를 보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상은 어떠십니까.”

“…….”

그에 눈썹을 치켜올린 전 로헤올 공작은 이내 어쩔 수 없는 걸 보는 듯 웃었다.

“처음 하는 말이 그겁니까?”

“…….”

“속여서, 미안합니다. 엘르시어 클리포드 후작.”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불려 본 적 없었던 이름이 마침내 들렸다.

그가 너그러웠던 위즈의 것과 같은 음성으로.

엘르시어는 숨이 떨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미소했다. 그 버릇인 미소를 본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 역시 떨리는 숨을 들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전 공작은 잠깐 잠잠히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만날 사람이 있었습니다. 만나서 불러 볼 이름도 있었고요. 그때까지는 그 누구도 제대로 인식하고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

“별 해괴한 단어들을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기느라 나도 고생 많았고, 해괴한 무례를 견디느라 당신도 고생 많았습니다.”

그렇지. 생각해 보면, 어쩐지 말이 안 되었다.

암호도 만들어 내고 중앙탑의 학자로 논문도 쓰는 사람이, 누구를 소개받든 듣자마자 잊어버린다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언제부터 이리 되었나.

어쩌다 그녀를 믿게 되었나. 언제부터 이리 되었었나.

“……중앙탑 소속 학자이신 건 진실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진실입니다.”

“…….”

“후작. 짐작하겠지만, 제이 왕자는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엘르시어는 제이가 어째서 그리도 서점에 들락날락거렸는지 이제 이해했다. 그의 미소가 약간 사라졌다.

그 반응을 무어라 해석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뮌제는 덧붙였다.

“내가 아니라 해서 긴가민가했던 모양입니다만.”

제이를 변명해 주는 것 같았으며,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제 앞에서 그 무가치한 쓰레기를 감싸지 마세요, 손님.]

이제 깨달은 바, 이 사람은 제이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리 비난했다. 그리 신랄하게 경멸하였던 제이를 이제 와서 진심으로 다정하게 변명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엘르시어는 눈앞의 전 공작을 살피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분께서 서점에 찾아가시는 게 거리끼셨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렇군. 견디기가 어려워서 당신 앞에서 못 볼 꼴도 보였었지요.”

제이가 돌아가자마자 사탕을 뱉고 구토하였던 그 일을 말하는 것일 터다.

[당신. 온느발레의 귀족과 인연이 있습니까?]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스쳐 지나간 사람이 귀족 분인지 아닌지는 저도 구별해 낼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날 그가 받은 대답은 사실이 아니었음을.

이번에는 그걸 깨달았다.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알아 가는 중이었다. 사실도 거짓도 아니었던 그 대답을 그 저녁의 엘르시어는 믿었다. 더 추궁하거나 묻지도 않았었다.

[농노는 아니었을 테고, 그럼.]

[아. 무슨 일을 했었냐는?]

[예.]

[평범한 삯일이요. 바느질도 하고. 밭일도 하고. 정원사 보조도 하고. 짐승도 돌보고. 정말 이것저것 했습니다. ……동생을, 음, 돌봐야 했거든요. 돌아가신 부모님이 단단히 부탁하셔서.]

루미나리에단을 이끄는 중, 혹은 로헤올을 다스리는 중, 어떤 식으로든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일을 그리 포장하는 것도 재주였다.

작고한 부모에게 단단히 부탁받았다는 동생은 윌리엄 로헤올이었을 터.

후작은 ‘위즈’의 발언을 생각나는 대로 되짚어 가다가, 어떤 얕은 감정에 발목까지 빠졌다. 사소하게 스쳐 지나가고도 남을 시간들이 제 머리에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에 잡혀 이리 왕을 두고 나온 건 또 어찌 된 일인가.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입가와 턱을 아래로 밀듯 잠시 가렸다. 미소가 힘들었다.

뮌제는 가려지지 않아 보이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웃음 없는 눈이었다. 저 가면 같은 버릇. 죽은 이가 뇌리를 스쳤다. 실은 매일 매시 저주를 쏟아낼 수도 있을 만큼 미워 죽겠는 형제에게, 그러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던 사람.

아.

그녀는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디론가 걸어가는 어떤 시종의 머리와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손을 내린 엘르시어는 뮌제의 옆얼굴을 보았다.

“공.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그는 파도치지 않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로 고개를 돌린 뮌제는 어째서인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오전의 햇빛을 서늘하게 받은 얼굴은 여전히 온유했다.

“네. 말하세요.”

“제가 공께 왕자를 소개하기 전날 저녁, 왕자께서 외출하셨습니다. 그때 혹시 서점에 들르셨었습니까?”

“글쎄요. 그런 것까지 어찌 기억하겠습니까.”

고집을 피워 기어이 서점의 주인을 소개받은 후 순순히 돌아갔던 왕자를 기억한다. 엘르시어에게 소개받고 위즈와 통성명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하는 행동이 묘했던 것도.

그 자리에서 위즈를 처음 만났을 리가 없었다. 그랬다면 왕자가 그리도 그리워했던 뮌제 로헤올과 닮은 얼굴을 보고 어떤 식으로든 동요했을 터. 그러나 그날 저녁 왕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통성명했었다.

만일 그 전날 이 두 사람이 만나 이미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왕자가 로헤올 공작 운운하는 말을 들은 은여우단 기사의 존재를 아티팩트를 통해 느꼈다면.

클리포드 후작은 재차 천천히 물었다.

“왕자를 호위하던 은여우단의 기사가 지금까지도 행방불명입니다. 혹시 이에 대해 아십니까?”

뮌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모릅니다. 후작, 날 추궁하는 겁니까?”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되물었다. 엘르시어는 고개를 한 번 숙였다.

“거슬리셨다면 실례했습니다. 갑자기 떠올라 혹시 아시는 게 있는지 여쭈었을 뿐입니다. 아직까지 종결하지 못해 막막하였기에.”

하지만 아마도 당신이 ‘치웠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앞에 있는 사람은 위즈가 아니라 뮌제 로헤올이었다. 왕자가 거슬렸다는 온느발레의 대귀족. 그녀는 아리오의 안녕에는 태무심한 사람이었다.

[다시 묻겠네.]

아마도 그랬다.

[황제의 측근께서 어딜 가려고, 그대.]

페레이라 백작을 신문하는 데에 아리오를 보호하겠다는 것도, 아리오를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온느발레나 황제가 관련 있기 때문이리라. 혹시 백작이 로헤올의 측근이었다면 이번 일에서 무사히 빠져나갔을 것이다.

엘르시어는 얼어붙은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회의실에서 페레이라 백작을 찍어 눌렀던 뮌제는 엘르시어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온유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후작. 내가 이 무례를 넘어가는 건 그간 당신이 내게 꽤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치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정치가이기에 진심으로는 하지 못할 말이었다.

하여 엘르시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신 역시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저리 말하는 뮌제가 그녀의 속내를 내색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한동안 아리오에 머물게 될 테니 혹 도움이 필요하다면 찾아와요. 이번에는 좀 진득하게 도와주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긴, 내가 이제는 온느발레인이라 도움 요청하기가 꺼려질 수도 있겠군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망설이며 침묵하던 그가 가만히 물었다.

“머무르실 곳은 있으십니까?”

“찾아봐야지요. 왜요. 또 호의를 베풀어 주시려고?”

“저는 상관없습니다.”

“…….”

뮌제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전 공작은 그를 관찰하는 것처럼 날카롭게 살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갔던 위즈와는 달랐다. 엘르시어는 그 시선을 조용히 견뎠다.

뮌제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작. 우둔해 보였던 내게 많이 너그러웠던 것은 알지만, 이제 나는 한때 로헤올의 가주였던 사람입니다. 당신이 너그러웠던 사람과는 다릅니다.”

“알고 있습니다.”

엘르시어는 미소하고 덧붙였다.

“위즈 씨도 공께서도 제게 충분히 호의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도 그만큼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하면서도 전 공작은 후작을 살폈다. 미묘한데.

하지만 더 캐낼 생각은 없었다. 피곤했으며, 무엇보다 라파엘이 있었다. 뮌제는 엘르시어의 어깨 뒤 먼 곳을 보면서 옅게 웃었다.

* * *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온 라파엘은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뮌제를 곧바로 찾아냈다.

클리포드 후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얼굴을 잠시 지켜보았다. 라파엘을 대할 때와는 당연히 다르지만, 다른 귀족을 대할 때와도 달랐다. 역시 그랬다. 어째서 그런 건지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뮌제의 저 감정이 이상한 길로 자라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일단은 지켜보고만 있지만 라파엘이 인내할 한계는 분명했다. 가늠할 것도 없었다.

뮌제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말갛게 웃었다.

라파엘은 걸음을 옮겼다.

대공은 저를 돌아보고 옆으로 물러난 후작의 인사를 받고, 뮌제를 향해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먼저 가서 쉬지.”

“이 정도 기다리는 건 괜찮아. 같이 돌아가고 싶었어.”

뮌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바로 잡았을 라파엘은 그대로 서서 뮌제를 들여다보기만 했다. 뮌제는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라파엘은 그 손을 맞잡았다.

각자의 장갑으로 온기는 막혔을지언정 서로를 잡고 있다는 감각은 전해져 왔다.

다 성장한 귀족끼리 사이좋게 손을 잡고 움직이는 광경은 꽤 목격하기 힘들다. 그 귀족들이 체면과 품위를 지켜야 하는 권세가라면 더더욱. 그러나 온느발레나 에흐베에서나 그들은 꽤 자주 이랬다. 이런 각별한 표현은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정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각별함이기에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였다. 역설적이게도 그랬다.

그래서 라파엘은 이 스스럼없는 접촉이 가끔은 상당히 아팠다.

지금도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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