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조금 전의 작위적으로 긴 소개는 온느발레 귀족들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음이 틀림없었다.
뮌제 로헤올은 입꼬리를 올렸다.
“윌리엄을 위해 물러났고, 윌리엄을 위해 아리오로 와서 조용히 살았네. 내가 내 형제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몰랐다 하지 말게. 바깥에서도 가감 없이 보였던 정신 나간 우애였던 바.”
“…….”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내 끝끝내 죽이려 했지. 거기까지 용납하기에는 내가…….”
로헤올 전 공작이 팔걸이에 걸치고 있던 오른손을 들었다. 그 맥락 없는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눈으로 좇게 되었다. 테이블 위로 올라온 손이 나긋하게 내려앉았다.
검지 끝이 똑똑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녀의 장갑 낀 손끝을 보고 있던 페레이라 백작이 퍼뜩 눈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로헤올의 전 주인이 입꼬리를 조소하듯 올렸다가 내렸다. 단숨에 식은 표정으로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간 참 많이 참아 줬거든.”
“…….”
“온느발레는 날 단죄하지 못해. 해서도 아니 되지. 이건 로헤올 가 내부 문제네.”
오전. 맑은 하늘.
햇빛도 맑고 투명하여, 회의실로 들어오는 볕도 딱 기분 좋으리만큼 연하고 서늘했다.
그러나 오전에만 느낄 수 있는 가볍게 어두운 정적이 있는 게 문제였다. 말과 말 사이 잠시 지나가는 정적의 순간, 그 한순간에 이명이 들렸다. 가슴이 뛰게 소름이 돋았다.
전 공작이 잔잔하게 들이켠 숨조차 정적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의 검지가 다시 한번 테이블로 뚝 떨어졌다. 그 또한 정적이었다.
“하극상을 일으키고도 부족하여 나를 죽이러 온 자를 죽였으니 이는 정당방위이며, 나는 마땅히 로헤올의 어른으로서 할 일을 한 걸세. 감히 가주를 죽이려 들다니 처음부터 내가 너무 봐줬지.”
“…….”
“하등 죄 될 것 없네.”
“…….”
“에흐베의 대공이 제국의 공작을 죽인 것도, 아리오의 일개 평민이 제국의 공작을 죽인 것도 아니야. 아리오는 조금도 염려할 것이 없고, 온느발레는 감히 간섭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아리오가 염려할 것 없다 할 때에는 뮌제는 발롬브로사를 잠시 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바로 페레이라로 돌아갔을 때, 발롬브로사는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조용히 들이마셨다.
이게 뮌제 로헤올이었다. 온느발레의 방패로 위명 높았던 뮌제 로헤올.
처음으로 마주한 온느발레 귀족의 최정점을 앞에 두고 왕은 호흡조차 평범하게 할 수 없었다. 이는 나이와 상관이 없었다.
이게 제국의 귀족이구나.
이 나라 아리오에서 이 정도 위압감을 지닌 귀족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어떠한 힘 있는 귀족이든 그는 귀찮아하거나 골치 아파했을 뿐, 이리 긴장하거나 두려워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제국의 귀족이다.
제국의 실세로 분류되는 이런 대귀족이 제국에서 벗어날 일이 없으니, 이 나이 되도록 겪을 일 역시 없었다. 발롬브로사는 크게 충격 받았다.
아리오 왕의 앞에서 아리오어가 아닌 온느발레어를 쓴다는 건 사실상 왕을 무시하는 것인데도, 그것에 신경 거슬리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 젊은 전 공작에게 압도당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불쾌하지도 못했다. 그저 멍했다.
뮌제 로헤올이 말하는 것, 그녀의 눈가, 눈, 입가, 움직임을 절로 감각으로 좇았다.
제게 집중한 시선을 느끼며 뮌제는 온화하게 미소했다.
“그리고, 내가 이를 로헤올 내부 문제라고 선 그을 때 온느발레는 손 떼는 게 좋을 걸세.”
“…….”
그건 무슨 말이냐고 아르망 페레이라의 눈이 움직였다. 뮌제는 미소한 얼굴로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대가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생각해 보게. 여기에서 할 말은 아니니.”
페레이라 백작은 바로 이해했다.
페레이라가 모시는 주군이 쳐내려 한 로헤올 공작. 살아 돌아온 로헤올 공작. 그 때문에 지금 이렇게 머릿속이 새하얗게 마비된 게 아닌가.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마저 제거한 사람이 황제 주위로 손 뻗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해했다.
“이제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걸 알겠지.”
“……폐하께……, 폐하께 직접 그리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것 역시 그대가 상관할 바가 아니군.”
뮌제가 부드럽게 잘랐다.
페레이라 백작은 긴장으로 굳은 입술을 다물었다.
순순히 죽은 자가 잘못이었다. 그렇게 뮌제 로헤올을 모욕했다.
그러나 그리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으니, 이제는 그때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못한 이들이 잘못이었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는 많은 게 변화한다.
백작은 팔걸이 끝을 움켜잡았다.
목이 탔지만, 그래도 그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저희 사신단이 할 일은 그럼 없군요. 저희와 함께 귀국하려 하십니까? 모시겠습니다.”
“음?”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로헤올 전 공작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턱을 들었다. 우아하지만 극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곧바로 살짝 떨어졌다.
공작은 말했다.
“어딜 가려고.”
“……예?”
“아. 일이 이렇게 될지 몰라서 공을 아리오에 넘기려 했건만.”
아직 테이블 위에 머무르던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재미있어서 견딜 수 없는 것만 같이 짓궂은 웃음이 걸린 입가였다. 엄지로 턱을 짚고 검지로 입꼬리를 문지르듯 당겼다가 놓았다.
전 공작은 그대로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리오의 다섯째 왕자와 관련하여 죽은 귀족 있잖은가. 디온 보이터 경이었던가.”
이 자리에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그것 때문에 귀국이 지연된 중에 로헤올 공작 살인 사건까지 터져서 귀국길이 더 기약 없어지지 않았는가.
그러나 페레이라 백작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어디에서 죽었지?”
어디라니, 서점에……서…….
묘하게 눈을 피하고 있던 뮤니르 자작마저 고개를 들었다.
전 로헤올 공작은 이 상황이 정말 재미있는 듯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흐베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내내 무표정이던 대공은 한숨 쉬듯 낮게 웃었다.
눈을 부릅뜬 페레이라 백작이 입을 뻐끔거리는 가운데, 마찬가지로 눈에 힘이 들어간 뮤니르 자작은 고개를 잘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
“각……하. 그게 그럼.”
“제이 왕자를 죽이려 드는데 어떻게 하겠나. 그 자리에 내가 없었으면 왕자는 꼼짝없이 죽었을걸.”
“…….”
“그 버릇 없는 자와 대화를 조금 나눌 시간이 있었네. 백작, 무슨 상황인지 그자에게 잘 들었네.”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페레이라 백작은 모른다.
창백한 백작에게서 고개를 돌린 로헤올 공작은 발롬브로사에게 살짝 묵례했다.
“그때는 제 신분을 숨겨야 했으므로 상황을 거짓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원하신다면 제가 기꺼이 증언해 드리지요.”
“어? 아.”
“아리오 왕실을 고의로 어지럽히려 든 죄, 작지 않습니다. 이후 온느발레의 누가 윌리엄 로헤올을 대신하여 오든 제가 비호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오에서 원하시는 대로 수사하십시오.”
“각하.”
페레이라 백작이 이 악문 발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음?”
“로헤올을 찾으셨습니까?”
“찾을까?”
“되찾지 못하실 겁니다.”
“로헤올이 나를 외면할 것 같나?”
“…….”
“말해 보게. 복권復權이 어려우리라 생각하나?”
“…….”
“내가?”
뮌제 로헤올은 나라에서 존경받는 가주였다. 루미나리에단의 단장으로 움직이며 받은 온느발레의 방패라는 별칭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높았던 로헤올의 위세는 더 올라갔다. 윌리엄 로헤올은 뮌제가 다진 정상 위 정상에서 로헤올을 이끌었다.
윌리엄이 사망하여 빈 가주 자리를 노리는 방계들도, 뮌제가 나타나면 즉시 물러날 것이다. 아니, 물러날 수밖에 없다.
불미스러운 일로 살해당했다는 뮌제 로헤올이 살아 있는 이상, 사실상 이 자리에 있는 뮌제 로헤올은 현 공작이었다. 전 공작도, 전전 공작도 되지 않고. 그게 뮌제 로헤올이 가진 위상이었다.
페레이라 백작을 가소로워하는 저 반응은 현실에 부합했다. 그러나 백작은 무겁게 뮌제 로헤올을 쏘아보았다.
“마법사이신 듯합니다.”
뮤니르 자작은 포기하지 않은 백작을 듣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듣는 게 곤욕이었다.
그리 아끼던 윌리엄마저 처리하고 개새끼로 몰고 가신 분에게 도대체 무엇이 문제 될까. 그냥 이쯤에서 좀 닥치지. 그런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왔겠나. 저분이. 왜 사서 내리 찍히려 하나.
과연 로헤올 공작은 누긋하게 대답했다.
“마법사이면서도 마법사를 앞장서서 탄압했지. 문제 있나?”
“돌아가신 윌리엄 로헤올 공작도 마법사이셨던 듯하고.”
그 말을 들은 뮌제는 말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재야의 마법사들이 각하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 천하게 여기는 마법사들에게 희망을 거는 건가…….”
말끝을 늘린 뮌제 로헤올은 물끄러미 백작을 응시했다.
연한 색의 눈빛은 몰정했다. 입가에 걸려 있던 의미 없는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
“여기가 아리오라고 안심한 건가, 아니면 아직도 실감이 안 된 건가.”
“뭐라고요?”
“언제부터 로헤올을 페레이라 따위가 협박할 수 있게 되었지?”
따위로 멸칭될 가문은 아니었다. 페레이라도 대영주이므로.
그러나 확실히, 로헤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귀족에 분류되지 않는 가문이 페레이라였고, 대귀족 중 대귀족이 로헤올이었다.
앞에 있는 로헤올은 하필이면 뮌제 로헤올이며.
그 단 한 줄의 질문에서 느껴지는 어떤 기색이 아르망 페레이라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제압당한 중년 사내를 보며 로헤올 전 공작은 선선히 말했다.
“알리고 싶다면 알리게. 그보다 백작, 그대에게 세를 바치는 벨린 남작이 고발당했던데 마음 아프겠군.”
페레이라 백작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공작은 양 팔걸이를 손으로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흐베 대공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뮤니르 자작은 일어났다. 로헤올의 가주가 자리를 뜬다 하면 당연히 일어나 배웅해야 했다.
일어나 옷깃을 정리한 전 로헤올 공작은 페레이라 백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나라, 서점 구석에 앉아서도 황제에게 편지 한 장 꽂아 넣는 것쯤은 할 수 있었네.”
분노와 충격으로 창백해진 백작에게 공작은 부드럽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다시 묻겠네.”
“…….”
“황제의 측근께서 어딜 가려고, 그대.”
페레이라 백작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감히 뮌제 로헤올을 적대한 황제의 측근이라는 게 문제다.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아들었다.
공작은 발롬브로사에게 예를 갖추었다.
“윌리엄 관련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은 마쳤으니 지금은 물러가겠습니다.”
“아, 그래. 그러시게.”
얼떨떨한 화답을 들은 뮌제는 아직 앉아 있는 라파엘을 보며 의아하게 물었다.
“계시려고요?”
“미안합니다. 먼저 가십시오.”
“뭐……. 예, 전하.”
뮌제는 지나쳐 가며 라파엘과 손을 가볍게 마주 잡았다가 풀었다. 수고했다는 느낌이다. 다 보이는 접촉이었다.
그들이 어릴 적부터 하던 대로 한 것이다. 뮤니르 자작은 그 익숙한 우정에 크게 놀라지 않고 뮌제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 * *
복도 끝에 있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던 뮌제는 문득 손을 올려 목을 매만졌다.
분으로 가려 지금은 보이지 않으나 상처가 난 곳이었다.
그 부분을 더듬는 데에 머리카락을 헤칠 일이 없었다.
들쑥날쑥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다듬기가 어려워, 오늘 아침 에흐베에서 데려온 하녀에게 부탁해 간만에 시원하게 기장을 쳐낸 덕분이었다. 단발을 모아 묶은 머리 모양이 썩 잘 어울리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이 머리 모양을 보고 무얼 짐작한 듯, 잘 어울린다 하는 다정한 말을 하기 전 잠시 침묵했다.
온느발레 귀족 사회는 머리칼에 꽤 보수적인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