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그리고 널 보내려면 내가 여기 남아야 하잖아. 에흐베에 다녀오기가 쉽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건 곤란하지. 에흐베에서 난리 날 걸.”
아리오가 보기에, 의식 없이 아리오에 누워 있는 위즈는 에흐베 대공이 아리오로 돌아올 거라는 일종의 보증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위즈를 에흐베에서 치료하게 되면, 에흐베 대공이 잠시라도 에흐베에 들렀다가 아리오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잠길 수밖에. 위즈가 아리오에 남지 않았다면 라파엘을 향한 감시도 아마 지금보다 엄중했을 터다.
그럼 에흐베의 군주가 에흐베를 돌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는 뜻이다.
뮌제는 이해했다.
그러나 라파엘은 난처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곤란해하며 웃는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던 그는 입을 열었다.
“그것도 있지만, 내가 널 못 보잖아.”
“…….”
“그건 불안해서.”
일이 번거로워지더라도 그녀를 그의 시야에 두고 싶었다.
두어야 했다.
대공은 뮌제의 갈색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치다가 검지에 감았다. 전보다 약간 거칠어진 머릿결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 머리 색, 염색을 한 걸까. 그는 문득 든 의문에 몸을 기울였다.
검지에 감은 머리카락에 코를 가져다 댔지만 염색약 냄새는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염색을 했더라도 한참 전에 했을 테니.
뮌제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염색했어?”
“아, 이거……. 비슷해.”
뮌제가 머리를 뒤로 뺐다. 라파엘의 손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풀렸다.
원치 않는 화제였는지 대답이 어정쩡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이 화제를 여기서 끝내려는 생각으로 물잔을 내려놓고 라파엘의 다리에 머리를 뉘였다. 그런 기색을 느낀 라파엘은 더 말하지 않았다.
한동안 평화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창문을 통해서는 어두운 햇빛이 들어오고, 방은 조용했다.
그 가운데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방 안에는 그늘이 졌다.
고요한 시선에도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담겼다.
뮌제는 제 것과 같은 색의 눈동자와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가만히 손을 올렸다. 라파엘이 고개를 조금 더 숙여 주었다.
“……라파엘.”
“응?”
“보고 싶었어.”
라파엘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라파엘의 살짝 어두워진 눈 밑에 섬세한 속눈썹 그림자가 진 것이 보였다. 그리 묘하게 비껴 간 시선으로 그의 눈 밑을 보면서, 그녀는 나지막하게 고백했다.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을 테고 네게 알리지 않기를 선택한 건 나니까 널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가끔 생각이 났어.”
그의 머리카락을 놓고 내려간 손이 가슴께의 무언가를 잡으려는 시늉을 했다.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도 잡지 못했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지 뮌제는 라파엘과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목에 건 주머니에 반지를 넣고 다녔다고 했었지.
라파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잡지 못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구부린 그 손의 네 개 손가락 첫 마디에 지그시 입을 묻었다. 바로 앞에 그가 있을 때에는 반지로 그를 대체하려 하지 말기를.
이건 확실히 야릇한 접촉이었다.
뮌제의 눈이 약간 커졌다. 아직 입 맞추고 있는 라파엘의 눈이 휘었다. 장난기가 담긴 눈웃음에 뮌제는 금세 식은 표정을 지었다.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태연하게 고백을 이었다. 대신 더는 라파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공작 후계자도 아니고 공작도 아닌 채로 살아가는 것도 어려웠어. 편하지 않은 주거지 같은 건 이미 익숙했는데, 가끔 높은 사람을 대해야 할 때……. 그게 힘들더라.”
노숙도 많이 해 본 편이었으니 중산층으로서의 생활에 극도의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높은’ 사람.
그녀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곤 황제를 비롯한 황실뿐이었고, 그 황실마저도 뮌제를 찍어누르지는 못하고 존중했었다. 그런 경외와 존중이 당연했는데 귀족이라고 오는 이들에게 자세를 낮추어야 했다. 라파엘에게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구타 당하거나 무릎 꿇려진 적도 여덟 번이었다. 아니, 일곱 번인가. 다섯 번 이상인 건 기억했다.
“다른 건 다 그럭저럭 익숙해졌는데 그게 힘들었어.”
그 누구라도 당장에 무릎 꿇릴 수 있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구타하고 무시하는 자들이 가소롭기도 가소로웠다.
노여움이 치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때면 그녀는 주먹을 쥐어서라도 참았다. 자존심을 꺾고 꺾었다. 윌리엄을 위한 이 길에 자존심은 필요 없다 하며.
신분의 중요성은 충분히 체감했다.
개인 능력은 신분 앞에 무력하다.
무장은 신분으로 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그게 가장 편했다.
로헤올이 필요했다.
뮌제는 다독이듯 그녀의 손을 좀 더 힘주어 잡는 손을 느끼고 잠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손이 놓였다.
뮌제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은 그녀의 이마에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치우고, 그 이마를 손으로 덮었다. 두꺼운 손이 온기로 그녀를 데웠다. 이미 평온하였는데 더 평온해졌다.
대공은 피로와 졸음에 잠기기 시작한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로헤올의 이름을 가져오겠다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로헤올은 온느발레의 귀족이다.
그는 잠잠히 엄지로 뮌제의 미간을 쓸다가, 입을 열었다.
“뮈즈.”
“음?”
“에흐베로 와.”
나른하게 반쯤 감겨 있는 눈에 한순간 반짝 총기가 돌아왔다가 빠져나갔다.
뮌제는 금방 다시 나른해졌다. 해가 저물어 감에 슬금슬금 영역을 넓히던 그늘이 그녀의 노곤한 얼굴을 덮었다. 밝게 어둡다.
눈꺼풀이 조금 더 내려갔다.
“같이 있자.”
“…….”
“나와 있자.”
뮌제는 묵연하게 있었다.
라파엘은 다정한 음성으로 유혹했다.
“너와 있고 싶어.”
“…….”
뮌제는 말없이 옅게 웃었다.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실내화를 벗고 셰즈 롱그에 발을 올렸다. 본격적으로 잠에 들 준비로 편한 자세를 찾는 듯 허리를 뒤틀었다.
보고 있던 라파엘은 옆으로 길게 팔을 뻗었다. 티 테이블 의자에 걸쳐 두었던 그의 겉옷을 그렇게 끌어와서, 뮌제의 몸에 덮어 주었다. 뮌제는 순진하게 기뻐하는 얼굴로 그의 옷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 위로 보이는 눈은 여전히 뜨여 있었다. 오히려 직전보다 잠이 깬 것 같았다.
라파엘은 살며시 웃었다.
“자야지.”
“친구야.”
“……응?”
“내일 네가 필요한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여름밤처럼 덥게 다정한 그 선언에 라파엘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어이가 없어서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정확히는, 거의 없게 하려고 애를 쓰겠지.”
“…….”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이번에는 네가 했다는 둥 끼어들지 마.”
“글쎄. 일단 내일 가서 보자. 네가 어떻게 할지를 모르니까 나도 무어라 약속을 해 줄 수가 없어.”
그들은 격 없이 친했던 소년 소녀 때처럼 유치하게 말씨름했다. 약 올리는 사람치고는 표정과 어조가 부드러워서 그때나 지금이나 뮌제는 화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졸린 눈으로 어찌어찌 그를 노려보았다.
“너 싫어.”
“그래.”
짓궂게 대답한 라파엘이 뮌제의 왼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뺨에서 떨어지기 전 손끝이 미끄러져 그녀의 입꼬리에 실수처럼 닿았다. 느리게 떨어진 손을 거둔 라파엘은 낮게 웃었다.
“자.”
어르는 음성이 뮌제에게는 자장가와도 같았다. 사실, 이럴 때면 라파엘 자체가 그녀에게는 자장가다.
더 버티기가 힘들어 뮌제는 선선히 눈을 감았다.
* * *
뮌제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
그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그 손끝에 관자놀이를 기대었다. 잠든 뮌제를 지켜보는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뮌제를 향한 감정에 깊이 잠긴 눈에만 온기가 돌았다.
라파엘은 생각했다.
뮌제가 실로 온느발레로 돌아가기를 선택한다면, 황제를 어찌해야 할까…….
관건은 뮌제의 마음이었다.
그는 지금 뮌제가 자포자기한 상태인지, 살아가겠다는 상태인지 좀처럼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제 피로하다 하며 황제에게 기꺼이 당해 죽어 주겠다는 건지.
로헤올의 세력을 가지고 황제를 대적하겠다는 건지.
뮌제는 깨어난 이후 윌리엄의 시신과 심장의 상태나 행방, 혹은 윌리엄의 장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그 뮌제가. 그게 과연 무슨 의미일지 짐작할 수 없어서 라파엘은 불안했다.
그는 물끄러미 뮌제를 보며 그녀의 숨소리를 들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을 보는 눈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피칠갑이었다. 라파엘은 다정한 사람이 결단코 아니었다.
황제를…….
대공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황제는.
황제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뮌제를 찾았으니, 이제 숨죽일 이유가 없다. 그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미 정해졌다. 윌리엄과 손잡고 뮌제를 해하려 한 날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그런데도 또다시 뮌제를 건드리려 한다면, 기필코 그 영혼도 평온하게 잠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
라파엘은 잠든 뮌제를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너는 무엇이든 해.
* * *
“오랜만일세. 백작. 로헤올 공작을 죽인 자를 찾는다고?”
“…….”
“내가 죽였는데 문제가 있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무엇이든 해.
죽으러 가지만 않으면 된다.
라파엘은 로헤올 공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 * *
부드럽게 물은 뮌제는 한숨을 삼킨 에흐베 대공이 이끄는 대로 자리에 착석했다.
“어……. 잠깐만.”
그때 왕이 온느발레어로 어설프게 이 자리의 분위기를 끊었다.
뮌제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페레이라 백작과 다르게 뮌제는 쉽게 발롬브로사를 보았다. 왜 그러시냐는 표정으로 그녀는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실 그게 더 엿 같았다.
발롬브로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이와 비슷한 상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저기, 아가씨가 뭐라고? 부……탑주? 부탑주? 그 부탑주? 중앙탑 부탑주?]
[전前 부탑주이지요.]
그때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각하?’”
“예?”
“각하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전 부탑주는 물론, 탑주까지도 각하라는 호칭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게다가 조금 전 페레이라 백작은 태도뿐만 아니라 말로도 이 여자를 높였다. 아리오에 와서 보인 그의 태도 중 가장 납작 엎드린 태도였다. 온느발레 귀족으로서 아리오에 보이던 그 오만함이 온데간데없었다.
파리하게 질린 사신단 대표를 힐끔 확인한 왕은 다시 여자를 보았다.
아리오 왕을 앞에 두고도 입실 직후부터 당연하다는 듯 온느발레어를 쓰는 이 여자.
위즈 스미스라는 아리오식 이름을 가진 아리오인이 절대 아닐 여자.
여자는 대답했다.
“실례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전하를 뵈었을 때부터 전하께서 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심에 놀랐습니다. 아직도 못 알아보셨군요.”
놀란 적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 엿 먹이고 있는 게 맞겠지?
“내가 너……, 그대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건가?”
“자녀분을 보호하는 사람의 외견은 파악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아니, 야, 아니, 잠깐.”
중간의 야는 실수였다.
뒤통수부터 등허리까지 순식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진심으로 당황한 발롬브로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잠깐. 설마. 아니, 그럴 리가. 아니, 그런데.
“공작……?”
“예.”
“로헤올 공작?”
“예. 사랑하는 형제가 일으킨 하극상에 순순히 자리를 비워 주었던 그 로헤올 공작입니다.”
긴 소개를 하며 전 로헤올 공작은 다시 페레이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왕을 위해 지었던 웃음을 지운 얼굴로 맞은편의 귀족을 보았다.
앉아서 거의 같은 눈높이에서 보는 것뿐인데도 백작을 꿇어앉히고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