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보십시오. 생존 사실이 온느발레에 알려지면 황제는 필시 대경할 겁니다. 기겁하겠지요. 그건 확실합니다.”
루시안은 결국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리고 전 공작을 죽이려 하겠지.”
“하지만 전 공작이 죽…….”
이제 윌리엄 로헤올도 전 공작이었다. 한 번 인상을 쓴 옥타브는 말을 이었다.
“전 공작이 죽었으니 이제 전전 공작의 약점이랄 게 남지를 않았습니다. 전처럼 순순히 죽어 줄 이유가 없지요. 쉽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이제 곁에 전하께서도 계시니…….”
“그렇지……. 전하께서도 계시지…….”
“…….”
대체로 점잖은 두 사람의 표정이 조금 핼쑥해졌다.
에흐베 대공이 죽은 친구를 버렸다는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대공은 지금까지 조용히 뮌제 로헤올을 찾아 왔다. 그런 분이 과연, 뮌제 로헤올을 해하도록 손잡았을 황제와 윌리엄 로헤올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을까.
대공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옥타브와 루시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신 적이 없지만, 분명 황제와 윌리엄에게 이를 갈고 계셨을 거다.
그런데 황제가 또 뮌제 로헤올을 죽이려 한다?
“……솔직히 그 두 분이 연합하시면 황궁에 잠입해서 온느발레 황제를, 어, 떨어뜨리는 것도 꽤 쉽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떨어뜨린다 하는 말을 하기 전에 옥타브의 엄지가 목 앞을 긋고 지나갔다.
“로헤올이 숨기고 있는 아티팩트도 만만치 않게 있을 테고, 설령 없다 하더라도 에흐베에 있는 아티팩트로도 충분히 황궁의 아티팩트에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티팩트만 어떻게 하면 그 이후는, 뭐, 그 유명한 뮌제 로헤올 공작에, ‘저희가 아는’ 에흐베 대공이신데, 뭐…….”
“…….”
“…….”
새삼스럽게 생각하건대, 무서운 분들끼리 둘도 없는 벗이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옥타브는 말을 돌렸다.
“아무래도 역시 전전 공작께서 로헤올을 다시 장악하시겠다 할 가능성이 제일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루시안은 고민하지 않고 동의했다.
뮌제 로헤올은 로헤올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에흐베 대공을 이번 사건에서 배제시킨 후에 그녀 자신도 큰 문제 없이 빠져나오려면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로헤올 공작으로 돌아가면 다시 온느발레에 귀속되어 황제의 제후가 되는 건데……. 그걸 과연 전하께서 두고 보실지 모르겠습니다.”
“공작의 결정이니 존중하시겠지.”
“글쎄요……. 그리고 저는 애초에 공작이 그렇게까지 온순하신 분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을 해서…….”
아무리 윌리엄에게 집중하였다고 하더라도 하여간에 그녀는 로헤올 공작이었다. 자존심이 아예 없을 리는 없다.
상황에 따라 서슴없이 자존심을 굽힐 능숙한 정치가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제거하려고 한 황제에게 순순히 굽히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옥타브는 그랬다.
그러나 루시안은 다시 펜을 바로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쯤 되면 성정은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예?”
“그리 귀하게 여기던 윌리엄 로헤올에게 배신당하고, 축출당하고, 이제는 윌리엄 로헤올을 잃은 상태이시지. 공작께서 지쳤는지 아직 지치지 않았는지가 관건일 것 같네. 내 생각은 그래.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팔 부러뜨리기 전에 펜 들게.”
* * *
로헤올 공작의 사망에 대해서는 에흐베가 일체 책임지겠다는 확언이 있었으니, 온느발레와 에흐베가 직접 소통하면 되었다.
그러나 현재 아리오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아리오의 땅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혹시라도 온느발레와 에흐베의 소통 과정에서 아리오에 불리한 합의가 있어서는 아니 되므로 이 자리에는 아리오의 인사도 들어왔다.
발롬브로사였다.
에흐베의 군주가 있으니 아리오의 왕이 들어와야 그럭저럭 구색이 맞았다. 헛짓거리하기도 어려울 테고.
발롬브로사는 언젠가 중앙탑의 탑주를 벗겨 먹었던 회의실의 상석에 앉았다. 그의 뒤에 엘르시어가 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느발레 측이 들어왔다. 페레이라와 뮤니르였다.
발롬브로사에게 인사한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문이 다시 열린 건 바로 그때였다. 이 중에서는 가장 늦었지만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저희가 늦었군요.”
입실한 이는 둘이었다.
저리 부드러운 말을 한 이도 에흐베 대공이 아니었다. 대공은 그들이 아는 것과 다르지 않게 나른한 무표정이었다.
회의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은 대공의 옆에서 걸어오는 사람에게로 가서 박혔다.
“전하.”
“너는 분명…….”
위즈 스미스.
직접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음에도 발롬브로사는 그녀를 알아보았다.
정복을 잘 차려입은 위즈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익숙한 듯 인사했다. 애스컷에 꽂은 작은 핀 끝의 보석이 반짝 빛났다.
단정하고 근사한 옷차림과 정돈하여 묶은 머리, 틀리지 않은 예의, 여유 있는 태도.
전부 어우러져서 위즈에게 몹시도 잘 어울렸다. 심지어 품위가 느껴지는 듯도 했다.
발롬브로사가 기억하는 위즈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성장한 건가. 낯익은 사람을 생소하게 살피던 왕은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
위즈는 대답 없이 희미하게 미소했다.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무례는 느끼지 못했다. 발롬브로사는 직전보다 심각해졌다. 이상하다. 마치 귀족 같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이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니 대공께 부탁을 좀 드렸습니다.”
그녀는 대답하며 왕의 뒤에 서 있는 엘르시어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 아주 잠시였다. 시선은 움직였다. 라파엘은 그 잠깐의 얽힘을 보았으나 묵묵히 지켜보았다.
뮤니르 자작은 차마 그녀를 보지 못하고 눈길을 내렸다. 자작의 머리를 스친 그녀의 시선은 페레이라의 위에 멈췄다.
입실하던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경악하여 얼어붙은 페레이라 백작을 보며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표정은 뭔가.”
“아니……, 아니,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조금 정신을 차린 아르망 페레이라는 무의미한 말을 반복하다가 뮤니르 자작을 휙 돌아보았다. 그제야 뮤니르 자작의 반응이 눈에 들어왔다.
알고 있었나!
숨이 막혔다. 호흡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공기가 부족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했다. 숨길이 막힌 것 같다.
믿을 수 없어서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아 주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예를 갖춰 주는 게 어떤가. 내가 지금 그대를 존중하는 것처럼.”
아.
더듬더듬 일어난 아르망 페레이라는 다릿심이 풀려 한 번 비틀거렸다. 너무 놀란 탓이었다. 테이블을 짚어 지탱했다.
수년 전에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왔다. 눈을 부릅뜬 그는 자신이 짚은 테이블을 노려보듯 내려다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서 뮤니르 자작도 일어났다.
온느발레의 두 귀족은 이 아리오에 온 뒤 가장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덜덜 떨리는 숨을 어떻게든 감추려 애쓰며 페레이라가 말했다.
“각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뮌제 로헤올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만일세. 백작. 로헤올 공작을 죽인 자를 찾는다고?”
‘생전’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칼날 같은 온화였다. 냉철한 시선도 변함없이 위엄 있게 싸늘했다. 정말 뮌제 로헤올이다. 살해당한 온느발레의 방패. 페레이라 백작은 경련하는 숨을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털어 냈다.
* * *
“내일 마무리 짓자. 자리를 만들어 줄래?”
어젯밤에 깨어나 다시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났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인해 잠이 쏟아질 텐데도 뮌제는 버텼다. 제발 누워 있어 달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뮌제는 듣지 않았다. 어지간하면 그의 말을 들어 주었을 텐데도. 다친 적 없다는 것처럼 당당하게 서서 움직였다. 대신, 나른해 보일 만큼 움직임이 부드럽게 느려졌다.
근육이 아픈 탓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 통증을 기회로 삼아 여태 놓고 지냈던 몸가짐을 빠르게 되돌리는 중이었다.
적응되거든 다시 선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움직임으로 변할 터다. 사실 벌써부터 그런 기미가 보였다.
라파엘은 안색이 좋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보다가 웃듯 눈을 찡그렸다.
“그래. 그러자.”
그는 곧바로 문밖으로 나가 무어라 지시하고 들어왔다.
뮌제는 자신이 말하고도 그 상황이 어색하여 눈을 깜박거렸다. 어라.
역시 아침부터 이상했다. 전 같으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방심시키고는 수면초라도 태워서 재웠을 사람인데? 라파엘은 다정하게도 그녀에게 곧잘 져 주지만, 그게 뮌제의 모든 말에 져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의 일신에 해 될 것 같은 일이라면 가차 없이 거절했다.
심지어 그런 일에 대해서는 웃는 얼굴로 뒤통수를 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수면초 일도 포함하여.
어디까지나 로헤올 저택이나 드비에 성 내에서만 하는 배신이었다.
그는 결코 밖에서 그녀를 당황시키지 않는다. 둘만 있을 때와 밖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는 다르기 때문이다. 바깥의 뮌제는 로헤올 공작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두 사람만 있을 때였다.
며칠 더 푹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함께 들은 사람치고는 아침부터 상당히 포용력 있었다.
여기가 아리오 왕궁이라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렇다. 라파엘은 그가 여기에 혼자 남는 한편 무슨 수를 써서라도 뮌제를 에흐베로 보내 치료받게 했을 사람이었다. 에흐베의 의사를 불러오느니 그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
“…….”
뮌제는 기억을 더듬었다.
윌리엄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정신없이 감정을 삼키는 와중에도 그녀는 라파엘에게서 주의를 거둔 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라파엘이었다.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라파엘.
그래서 되새겨볼 수 있었다.
라파엘은 재회했던 날부터 묘하게 ‘두고 보는’ 태도였다.
다정하게 가차 없는 친구답지가 않다.
뮌제는 물끄러미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시를 마치고 들어와, 자리에 앉기 전 손수 뮌제의 빈 물잔에 물을 따라 주고 있었다.
라파엘은 그녀의 시선을 받아 주며 살짝 웃었다.
“왜?”
“반대할 줄 알았어.”
“반대? 무스……, 아.”
되묻는 도중에 눈치챘다.
그는 뮌제에게 물잔을 쥐어 주고 투명한 물 주전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셰즈 롱그의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뮌제는 그 자리에서 꾸물꾸물 비켰다.
라파엘은 웃음으로 몸을 떨었다. 그가 등받이에 기대게 하고 뮌제는 그의 다리에 눕겠다는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라파엘은 사양하지 않고 앉았다.
그러나 뮌제는 바로 눕지 않았다.
몸을 틀어 그의 쪽을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하루라도 더 쉬게 할 줄 알았어.”
“맞아. 전이었다면 그랬을 거야.”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 대답을 하는데 그의 나른한 눈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 뮌제가 아는 라파엘이었다. 뮌제는 말을 이었다.
“네가 끝까지 죄를 지고 가겠다고 밀어붙이지도 않고.”
“그럴 준비는 되어 있어.”
괜히 말했다. 뮌제는 그의 대답을 무시하고 다른 말을 했다.
“내가 의식 없을 때 에흐베로 데려가지도 않았고.”
“그거야……. 네가 깨어나서 어떤 계획을 세울지도 모르고…….”
그건 확실히 라파엘이 할 법한 존중이었다. 뮌제는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그들은 둘도 없는 친구이지만 서로 다른 나라의 대공과 공작인지라, 치밀하게 내린 정치적 판단과 계획이 상충할 때도 있었다.
그 한 번의 까닥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본 라파엘은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