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66)화 (66/120)

# 65화

그 말에 베렐은 주책스럽게도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정말이지 주책스럽게도.

어린 뮌제와 윌리엄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어느샌가 두 사람을 감히 제 아이들처럼 사랑해 왔던 기사는 방 밖으로 나와 문 앞에서 흐느꼈다.

베렐이야말로 에흐베 대공에게 감사했다.

* * *

그날 밤, 뮌제는 눈떴다.

좀처럼 내리지 않던 라파엘의 미열도 함께 내려갔다.

* * *

포퇴유에 앉아 눈 감고 있던 라파엘은 즉시 이변을 알아차렸다.

침대 근처를 어스름하게 밝힌 촛불 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는 숨소리도 없었다. 이불을 끌어당기는 작은 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라파엘은 눈을 떴다.

일하다 잠시 휴식하고 있던 그의 얼굴에 촘촘하게 닿았다가 흘러내리는 무형의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선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일순 숨을 멈추었던 라파엘은 팔걸이를 밀어내듯 짚고 튀어 나가는 것처럼 일어났다.

“뮈즈.”

멍하게 흘러나온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아직 붉게 핏줄 터져 있는 뮌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흘러내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가는 눈물이 보였다. 라파엘은 드물게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떨리는 손을 뻗었다. 허리를 굽힌 그는 베개를 적시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눈을 깜박이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일견 평소처럼 차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닌 눈빛이 뮌제의 얼굴에 머물렀다.

그의 아랫입술이 살며시 떨렸다.

그래도 라파엘은 어떻게든 말했다.

“울지, 마. 몸이 회복이 덜 되어서 힘들어.”

“나…….”

일주일을 활동하지 않았던 목 안이 가물어, 목소리는 거칠었다. 그 한 마디를 발음하기를 힘겨워하는 게 보였다.

뮌제의 상태를 본 라파엘은 금세 이성을 찾았다. 그는 아주 잠시 눈을 감고, 털어내듯 숨을 내쉬었다. 다시 눈 뜬 그는 먼저 잔에 물을 따랐다.

이불 위를 힘없이 더듬거리던 손끝이 힘겹게 허공을 향하기 시작했다.

손을 들 힘이 아직은 없어서 이불 바로 위에 간신히 떠 있던 손끝을 라파엘이 지그시 쥐었다가 놓았다.

대공은 단단한 팔로 뮌제를 안아서 부드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뮌제다. 시중을 드는 이 순간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뮌제였다. 비로소. 마침내. 그녀를 위즈라 부르는 사람 없는 이 자리, 그녀는 온전히 뮌제였다.

품속의 그녀를 더 안고 싶어서 뮌제의 등을 받친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 그마저도 왼손으로 뮌제의 등 뒤에 있는 베개를 세우는 그 잠깐에 비쳤던 욕망이었다.

대공은 베개에 등을 기댈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뮌제를 놓았다. 그리고 나서야 물을 따른 잔을 다시 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라파엘은 잔을 뮌제의 입술에 대고 기울였다.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꽤 긴 시간을 들여 뮌제는 히끅거리면서도 한 잔을 다 마셨다.

빈 잔을 베드 테이블에 내려놓은 라파엘은 뮌제의 턱에 흘러내린 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리고 그 손을 내리기도 전에 뮌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을 안은 뮌제에게 끌어당겨지다시피 한 탓이다.

그는 급하게 왼손으로 침대를 짚었다. 뮌제는 아직 그의 무게를 받아 낼 정도로 회복되지 않았다.

“뮈즈, 잠시…….”

“네가 보고 싶었어.”

뮌제가 무리할까 염려하여 일단 떨어지려 했던 그에게 뮌제는 속삭였다.

라파엘의 눈동자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뮌제는 웅크리듯 그를 조금 더 끌어당겨 안았다. 팔에 힘이 없었기에 시늉에 가까웠지만, 라파엘은 순순히 그녀에게 몸을 더 기울였다. 그런 친구를 안고 뮌제는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보고 싶었어…….”

조금 전 목을 축였음에도 축이지 않은 것만 같이 쉰 음성으로.

주홍빛 촛불에 비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드리웠다.

“…….”

뮌제는 보지 못하는 곳에서 라파엘의 표정은 변하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내려갔고, 힘주어 꽉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리하고 정리했다. 라파엘은 멈춰 있던 호흡을 짧은 들숨으로 재개했다.

옅게 빨려 들어간 숨을 깊게 내쉬며 에흐베 대공은 두 손을 들어 뮌제를 마주 안았다. 그녀에게로 기울은 자신은 스스로 지탱하고, 그에게로 기울은 뮌제는 그에게 기댈 수 있도록 지그시 그러안았다.

일하느라 소매를 접어 올려 드러난 팔뚝에 핏줄이 불거졌다.

인내하는 포옹이었다.

그대로 한참 침묵하던 그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살아 있을 줄 알았어.

네가 살아 있을 줄 알았어.

생명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 때부터, 네가 폭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시 처음부터, 나는 네가 살아 있을 줄 알았어.

뮌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으므로 앞으로 평생 토해내지 못할 시간이었다. 같은 시간에 뮌제는 라파엘보다 더 간절하고 절실하게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그의 고통은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별것도 아니었다.

괜찮았다.

네가 여기 있으니 무엇이든 괜찮다.

라파엘은 제 셔츠의 등이 눈물로 젖는 걸 느끼며 뮌제를 다독이고 다독였다.

“혼자 많이 힘들었지.”

“…….”

“수고한 거 알아. 노력한 거 알아.”

“……끅.”

숨죽이고 삼키던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 울음을 들은 라파엘은 목까지 올라온 진득하고 시퍼런 감정을 묵묵히 내리눌렀다. 죽은 것을 되살려서 다시 죽일 수 있다면 사지 말단부터 조각을 내며 으스러뜨릴 텐데.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가 풀렸다.

어째서 윌리엄에 한해서 그를 신뢰하지 못했는지 이제는 알았다.

뮌제의 눈이 가린 게 아니었다. 윌리엄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윌리엄이 어떤 상태인지 알았다면, 윌리엄 속에 있는 것을 죽이기 위해서 뮌제가 죽음도 불사할 것을 알았다면, 라파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윌리엄을 죽였을 것을 뮌제는 알았을 것이다.

라파엘에게 윌리엄은 뮌제의 동생이기에 그나마 가치 있으므로. 그리고 그 사실을 뮌제도 알고 있으므로.

저희 두 사람, 서로를 향한 그런 신뢰로 묶여 있었다.

그는 얼어붙어 끓는 속내는 내색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의 등을 계속해서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연신 차분하게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사랑하는 뮈즈. 내 사랑하는 뮈즈…….

결국 뮌제는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생전의 윌리엄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며 책임졌던 뮌제는 윌리엄의 시신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뮌제는 그저 펑펑 울었다.

아이처럼 펑펑.

윌리엄이 죽던 자리에서도 호흡처럼 삼켰던 눈물, 이때까지의 눈물, 모두 모아서 소리 내어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더는 참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은 책임이 끝났고, 그녀는 더는 로헤올 공작이 아니었으며, 이 자리에는 라파엘만이 있었다.

라파엘은 이러다 뮌제가 쓰러질까 염려하면서도 끝까지 가만히 그녀를 지켰다.

비가 그쳐 맑은 밤이었다.

* * *

사실 에흐베 사람들은 일련의 상황에 대해 처음에는 반발했다.

에흐베 대공이 아리오에서 예우를 충분히 받기는커녕 잠정적으로 범죄자 취급을 받는 것, 대공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아리오에서 보낼 뿐만 아니라 취침마저 아리오에서 하시는 것 등에 대해서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이제 그가 뮌제 로헤올의 곁에 더 머무르고자 국정과 관련된 중요한 서류를 타국으로 하루 몇 시간씩 반출하려 하시니 드비에 성의 신하들은 기겁했다.

그래서 차라리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을 에흐베로 모셔와 살피시라고 간청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어째서 아니 그러시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를 찾거든 당연히 에흐베로 데려오실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같이 생각을 바꾸었다.

알아서 하시리라.

그래,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흐베 대공이 보는 서류를 누가 능히 빼돌릴 수 있겠는가. 신분상으로든 무위상으로든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 공작의 곁을 지킨다 하여 에흐베를 놓고 계시는 것도 아니었다.

무슨 저세상에서 내려온 철인처럼 에흐베를 이끄신 것도 어언 16년.

그러니까, 촘촘하게 빽빽한 일정을 쉬운 듯 끝내고 틈틈이 뮌제 로헤올과 시간을 보내시며 휴식하시던 게 16년.

그 일정을 얼마간 조금 줄이신다고 에흐베에 문제 될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문제 될 일이 생긴다면 바로 나서서 능히 처리하실 것을 믿었다.

그들은 뮌제 로헤올을 욕하지 않았다.

아주 극도로 꼬인 시선으로 바라봐도 그간 뮌제 로헤올은 에흐베 대공에게 좋은 것만을 주려 한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대공이 죽은 사람을 찾아 헤맬 줄은 뮌제 로헤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다면 자기 사후 친구가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못하게 준비를 해놓고 갔을 터. 그 정도의 신뢰는 드비에 성의 신하들에게도 있었다.

물론, 산길에서 기습당하는 건 애초에 예상했던 일도 아니었을 테니 무얼 준비할 새도 없었겠지만.

저희 군주와 전 공작 간의 단단한 관계를 떠올리고 떠올리고 떠올린 그들은 마음을 편하게 고쳤다. 진짜 알아서 하시리라.

고백하자면, 조금 쫄기도 했다.

에흐베 대공께서는 본디 성정이 부드러운 분은 아니지만, 뮌제 로헤올에 대해서 제삼자가 간섭하는 것에는 더더욱 칼 같아지시는 분이었다. 더더군다나 지금 뮌제 로헤올은 근 3년이 다 되어 찾아낸 상태가 아니던가. 특수 상황이다. 지금 괜히 말 보탰다가 서릿발 같은 분노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뮌제 로헤올은 전 로헤올 공작이다.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놓고 보든, 신분을 보든, 그들이 쉬운 마음으로 왈가왈부 첨언하고 대적할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뮌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에흐베 대공의 측근 인사들은 기뻐했다.

그 어떠한 말을 보태도 대공께서 다정하게 받아들일 유일한 사람이 깨어난 것이다.

일주일이나 질질 끌고 있던 상황이 드디어 어떻게든 완결이 나겠구나 싶었다.

뮌제 로헤올은 그들의 주인이 에흐베로 돌아와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마 윌리엄 로헤올을 죽인 사람도 사실은 자신이라며 토설하고 대공은 에흐베로 돌려 보내려 하지 않을까.

……물론 대공께서는 뮌제 로헤올이 무어라 하든 듣고 흘리시며 그 곁에 남아 있으시겠지…….

옥타브는 생각했다.

그 어떠한 기대도 감히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알아서 하시리라.

때 되면 돌아오시겠지.

크게 염려하는 게 도리어 무례인 두 분이 함께 계시는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그래서 옥타브는 조금 결이 다른 궁금증에 마음 놓고 빠졌다. 그와 함께 대공을 보좌하는 루시안은 힐끔 옥타브를 보고는 펜 잡은 손에 콱 힘을 주었다.

세법 관련하여 확인할 게 있으니 이러저러한 것을 추리고 정리해서 올리라는 명령을 받은 게 그제였다. 다른 일들도 많으니 한 가지 일에만 매달릴 수 없다고는 하나 사흘은 너무 길었다. 반드시 오늘 내로 끝내야 했다.

그런데 저 망할 뺀질이가 일을 안 하네.

루시안은 음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경 팔을 부러뜨려 주지.”

“바론. 당신은 전 공작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연하게 주름진 루시안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저거 죽일까.

남작에게서 대답이 없자, 옥타브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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