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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65)화 (65/120)

# 64화

그녀가 루미나리에단의 일로 멀리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의 오후였다. 그의 왼팔에 등을 기대고 조용히 있던 뮌제가 불쑥 그렇게 말했다.

책을 읽고 있던 라파엘은 눈을 들어 뮌제의 머리를 보았다.

이번 출장에서 심적으로 흔들릴 일이 있었을까. 그런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고, 이어서는 쓴웃음이 들었다.

그녀가 말한 그 ‘한 번’이 언제였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설령 뮌제가 많이 아플 때 마법으로 뮌제를 살릴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할 수 없을 터. 그는 뮌제 역시 같은 마음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다.

뮌제는 죽어 가던 라파엘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설명한 적 없다. 어떻게 그가 건강하게 회복했는지, 어째서 뮌제가 잠시라도 죽어 갔던 건지, 아무것도 말한 적이 없었다. 라파엘 역시 그녀에게 물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서로는 서로가 무얼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느낌만을 가지고 어영부영 넘어가고 넘어갔다.

뮌제가 그 일화를 분명하게 입에 담은 적은 오로지 한 번뿐이었다.

[내가 널 살린 일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그 마음을 이성적 사랑으로 착각한 것일 테지.]

다정하게 그를 거부하였던 날.

[나중에, 진심으로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애매한 친구로 남아야 했던 날.

[널 사랑하고 있어.]

[착각이야.]

희미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그의 마음을 한 마디로 잘라 낸 뒤, 그녀는 차분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살린 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마라. 나중에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거다.

두 사람은 전처럼 계속 친구로 남았다.

그 누가 보아도 뮌제에게는 라파엘밖에 없고 라파엘에게는 뮌제밖에 없는데 두 사람은 친구였다.

아팠지만, 그는 관계를 변함없이 유지하고자 애썼다.

가장 신뢰하는 친구. 잃고 살아간다는 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친구. 평생 함께할 친구. 서로 사랑하는 친구.

서로의 유일.

아프지만 일단은 이렇게라도 뮌제의 곁에 있고자 했다.

이미 한계까지 치달은 마음인 줄 알았더니 날이 갈수록 더 커져 가는 마음에 겨워하면서, 그는 뮌제의 곁을 지켰다.

뮌제에게 그의 사랑을 심었으니 지금 당장은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며.

라파엘은 자신이 뮌제에게 많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서로를 향한 그런 신뢰 어린 사랑은 마침내 반지가 되었다.

마음을 담은 반지, 우정을 담은 반지라며 나누어 꼈다. 두 사람 모두 기껍게. 몹시도 기쁘게.

그 반지, 그가 여전히 끼고 있었던 것과 같이, 다시 만나지 않을 각오로 떠나간 뮌제도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라파엘은 베렐이 테이블에 올려 둔 반지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베렐이 테이블에 올린 것이 편지 두 통과 열쇠들, 그리고 반지였음에도 라파엘의 시선은 반지에만 박혔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 고민이 길어 너무 늦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기사의 말은 넘겼다.

라파엘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반지를 집어 올렸다. 손끝에서 굴러떨어진 반지가 그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대공은 그걸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

어쩔 수 없이 목소리에 감정이 담겼다.

“경의 주군이 가지고 있었다고.”

마치 쉰 것처럼 갈라졌다.

그는 확신을 이런 식으로 확인받을 때면 숨이 잠시 멈추었다. 뮌제의 사랑은 그의 것과는 결이 다른 감정이라 해도, 그녀의 사랑을 이리 확인할 때면 라파엘은 감정에 겨웠다.

행복하고, 그만큼 고통스럽고, 그만큼 사랑스러워서 미쳐 버릴 것 같다.

돌아오지 않고 죽을 작정이었는데도 계속 가지고 있었구나. 가진 모든 걸 다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이건 가지고 있었구나.

깊은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손을 오므렸다.

같은 반지를 낀 손으로 반지를 쥐는 대공을 바라보던 베렐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주군께서 쓰러지신 날에 목에 걸고 계셨던 작은 주머니를 보셨습니까? 전투 중에 잘려서 날아간 물건입니다.”

“…….”

“거기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니셨다 합니다. 다른 아티팩트들이나 간식도 거기에 넣어 두셨다고 듣긴 하였습니다만.”

그 말을 들은 라파엘은 옅게 웃었다.

“그래, 그랬군요.”

“……전하, 사실 이 편지는.”

편지 하나를 가리킨 베렐은 한 번 멈춰 침을 삼키고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이 편지는 각하께서 제게 보내시는 당부입니다. 전하께는 드리지 말아야 할 편지입니다.”

“…….”

“이 편지를 제외한 나머지 물품은 전하께 드리도록 이 편지에 당부하셨습니다.”

대공은 시선을 내려 새삼스럽게 테이블 위의 물건을 확인했다. 베렐 앞으로 보낸 편지를 제외하면 편지 한 통. 열쇠 세 개. 손안에 있는 반지.

“사실 이 모든 게 각하의 별세를 가정하고 하신 당부라, 과연 지금 이행해도 되는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

별세. 라파엘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기가 스몄다. 지나가는 말로 듣는 것만으로도 노여운 단어였다.

베렐은 긴장했다. 약간 흐려진 눈에서 묻어나는 연회색 경고가 사람을 녹일 것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에흐베 대공은 뮌제 로헤올의 사람에게 관대했다. 대공은 자연스럽게 무정하게 변한 얼굴로 침묵했고, 침묵하며 왼손을 뻗었다. 베렐이 가리키지 않았던 편지를 끌어와 봉투를 열었다.

다행히 베렐도 모든 용건이 끝난 상태였다. 기사는 정중하게 대공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몸을 물리고자 한 발을 뒤로 빼는데, 편지의 첫 줄을 읽기 시작한 대공이 말했다.

“편지, 가져가야지요, 경.”

“전하께서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읽으면 안 될 편지라 경 스스로 말했을 텐데…….”

서신에서 눈을 든 대공이 베렐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경 주군도 이 편지가 내게 읽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고.”

“…….”

“가져가야지요.”

기사가 뮌제의 뜻을 거스르는 건 그를 그녀에게로 이끌어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라파엘은 기사가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뮌제보다 저를 앞서 생각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베렐의 주군은 여전히 뮌제다.

노하여 형형한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베렐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주군의 뜻을 거스른 죄가 반복되고 있음을 제 스스로 잘 압니다.”

두 기사는 크게 잘못했다.

주군의 뜻을 유출하고 명령에 크게 대섰다.

베렐은 대공의 사람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뮌제에게로 올라와, 결과적으로는 대공을 뮌제에게로 인도했다.

젊은 기사도 대공의 사람이 베렐을 지켜보고 있을 것을 짐작하여 마구 악을 질렀다 했다. 그리하여 대공의 허락을 얻어 모습을 드러낸 대공의 사람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뮌제의 계획과 윌리엄 로헤올에 대해 전달했다고 했다. 뒤늦게 베렐을 찾아와 넌지시 고백한 죄였다.

두 기사의 행동이 모두 뮌제의 생명을 위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이제 더는 뮌제가 그들을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 또 있게 될 때 이들을 다시 기용하기에는 불안이 있을 수밖에.

주인과 기사 간에 한 번 깨어진 신뢰는 회복되기 어려웠다. 다루는 정보가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최고위 귀족이라면 더더욱. 전 로헤올 공작이었던 뮌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베렐은 일개 기사이지만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간 뮌제와 뮌제의 부친에게 과분한 신뢰를 받아 몇몇 기밀을 공유받은 바 있었다. 그런 일을 통해 그는 로헤올 공작이 곁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막중한 위치, 범인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치, 하여 더욱 신중하고 조심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약간이나마 경험하고 느꼈다.

“각하께서는 저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용서하시더라도 더는 곁에 두지 않으실 겁니다. 전부 각오하고 저지른 일입니다.”

때마침 기사의 눈밑이 약간 경련했다.

“그 편지는 주군을 향한 제 마지막 항명이고 마지막 배신입니다. 전 그 편지를 전하께서 읽어 주시기를 감히 바랍니다.”

“…….”

“그리고 감히, 정말 감히 부탁드립니다. 주군을 살게 해 주십시오.”

살려 달라는 게 아니었다. 살게 해 주시라.

윌리엄이 없는 이상 이제 라파엘만이 남았다.

대공은 로헤올이 아닌 뮌제라는 사람을 붙잡을 유일한 존재였다.

베렐은 주군이 이대로 살아서 눈 뜬다고 해도 과연 계속 살아가실지 확신이 없었다.

그러니 부디 주군이 사는 의미를 잃고 말라 죽어 가시지 않게.

육신만 숨 쉬는 게 아니라 정신도 숨 쉴 수 있게.

살게 해 주시라.

[한 분만이라도 살아남으시길 원해. 그리고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경, 두 분 각하께서 각각 가시는 길을 지키고 싶네.]

한 분만이라도 살아남으시길 원하나 두 분 다 같이 죽겠다 하면, 각각 가실 길을 지키고 싶었다.

윌리엄은 악마와 함께 죽는 길, 뮌제는 살아남는 길.

윌리엄은 진정으로 죽는 길. 뮌제는 진정으로 살아남는 길.

뮌제 로헤올은 윌리엄에 사로잡혀 윌리엄에게만 목적을 두고 살아 온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대공을 불렀다. 뮌제를 그곳 현장에서도 살려야 했고 미래에도 살려야 했다. 베렐이 생각하기에 대공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그리고 그건 일개 기사가 가지기에는 지나치게 분수를 넘은 생각이었다.

라파엘은 물끄러미 베렐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경의 실족에 대해서는 경 주군이 치죄하겠지만, 경, 한 가지만 말을 얹겠습니다.”

목소리에 색을 빗대어 본다면 이 음성은 연회색이다.

적당히 습기를 머금은 무채색으로, 무미건조하지는 않으나 뒷목이 서늘할 정도로 막연하고 흐렸다. 제대로 알 수 없어 두려울 만큼 녹녹했다.

베렐은 긴장한 어깨를 폈다.

기사가 자세를 가다듬는 걸 보며 대공이 말했다.

“경도 알고 있겠지만, 처벌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이라 하여 경이 하는 일의 무게가 덜어지는 건 아닙니다.”

“…….”

“알고 있겠지만, 진심으로 주군을 위한 일이라 하여 경이 하는 일이 정당성을 갖거나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베렐이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숨쉬기가 어려웠다.

에흐베 대공은 나른한 모양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고, 이었다.

“경이 만일 내 사람, 내 최측근이었으면 경은 이 자리에서 엄중하게 단죄되었을 겁니다.”

애초에 라파엘의 사람이었으면 이리 사근사근하게 대우하지도 않았다. 연속하여 일어난 배반이 아무리 사소하다 하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지켜봐 줄 만큼 에흐베 대공은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그의 최측근이 이보다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대공은 처단도 고려했을 것이다.

하지만 뮌제는 그러지 않을 터.

뮌제가 평소에 자기 사람에게 워낙 자상했기에 베렐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뮌제를 거슬렀으리라 짐작했다. 주군이 자상한 만큼 주군을 더 사랑하게 되어, 저도 모르는 새 분수에 넘치는 염려까지 하게 되므로.

뮌제를 지키고자 했던 두 기사의 마음은 갸륵했으나 선을 넘은 건 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서 그가 말했던 대로 뮌제가 단죄할 일이다.

라파엘은 베렐에게 잠시 쉴 틈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서신의 첫 줄에 다시금 시선이 갔다. 반지를 쥔 오른손을 가볍게 열어 검지 끝으로 그 첫 줄을 매만졌다. 사랑하는 라파엘. 그의 눈에 사랑을 장작 삼은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대공은 다시 눈을 들었다.

베렐과 눈이 마주쳤다. 기사가 곧바로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다. 에흐베 대공은 그런 기사를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리고, 경.”

“예, 전하.”

베렐이 시선을 올렸다.

라파엘은 말했다.

“나를 뮌제에게로 안내해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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