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조용히 호흡하던 그는 고개를 조금 움직여, 그녀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뮌제를 살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든, 그의 생명을 거는 것이든, 무엇이든.
가려거든 같이 가자던 말은 진심이었지만,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뮌제를 살릴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눈떴을 때 그가 없다 하더라도.
눈뜨자마자 뮌제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처럼, 그녀가 눈뜨자마자 죽어 가는 그를 보게 되더라도.
에흐베 대공은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 그대로 숨 쉬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났다.
몸을 세운 그는 보고 있으면서도 그리운 사람의 미지근한 손끝을 감쌌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부디 조금이라도 더 온기가 돌기를.
[그러지 마.]
“…….”
환상 속에서도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말이라도 되새겼다. 그게 가장 최근, 그녀가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드디어 다시 만났는데 서로 이름 한 번 불러 보지 못했다. 서로의 눈을 보면서 이름 한 번 불러 보지를 못했다. 라파엘은 미열에 얽혀 뜨거워진 숨을 조금 흘렸다.
곧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은여우단의 장이 알현을 청합니다.”
베렐이었다.
놀라지 않고 천천히 일어난 대공은 허리를 숙였다.
뮌제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맡에 속삭임을 놓았다.
“사랑해.”
거칠게 잠긴 연회색 눈길이 그녀의 감은 눈꺼풀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고 이불을 약간 더 올려 준 뒤 방을 나섰다. 대공을 대신하여 베렐이 들어왔다.
베렐은 주군을 지키는 내내 대공이 놓고 나간 서류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응당 그리해야 했다.
* * *
“전하.”
엘르시어는 라파엘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제 그는 라파엘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아니라 했던 위즈의 말과는 다르게 한 나라의 군주인 남자.
에흐베 대공은 담담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후작. 수고하는군요.”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네 번째 만남이지만 여전히 예의 있는 말투였다.
아리오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취하는 경어라기에는 대공의 아리오어는 놀라우리만큼 완벽할뿐더러, 엊그제 페레이라 백작을 만나 온느발레어로 대화할 때에 대공은 경어를 쓰지 않았다.
흐리고 나른해 보이는 눈을 보며 엘르시어는 미소를 유지했다.
앉지 않은 채로 빠르게 용건을 끝내기를 원하는 대공에게 용건 아닌 것을 물었다.
“위즈 씨의 상태는 어떤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아리오인이니 아리오가 치료하는 게 당연하며, 게다가 위즈는 클리포드 저택에서 며칠 머물기도 했으니 클리포드에 머무는 게 편할 거라고, 왕실과 왕궁이 불편하다면 클리포드에서 전적으로 치료를 지원해 주겠다고 해도 대공은 위즈에게서 아리오를 배제했다.
위즈를 살피는 의사조차 아리오의 입김이 들어갈 수 없는 자를 데려왔다. 에흐베 대공가의 의사라 하는 자였다.
시중을 드는 이들은 에흐베의 기사들이라 그쪽에도 파고들 여지가 없었다.
결국 아리오는 위즈의 현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아리오에 필요한 내용이 아니라 엘르시어의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감정 없이 담백하게 묻기 위하여 표정을 의식적으로 정리해야 했을 정도로 개인적인.
에흐베 대공은 엘르시어를 잠깐 응시하다가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요청해 주십시오.”
엘르시어는 이 자리에 흐르기 시작한 긴장감을 인지했다.
비가 와서 축축하게 젖어 있던 공기 곳곳에 서리가 언 것 같았다. 거슬릴 정도로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이다.
음성과 음성 사이의 적막에마저도 무겁게 습기가 어려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에흐베 대공은 건조하게 마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용건은.”
“위즈 씨가 아니라 전하께서 아리오의 영토에서 로헤올 공작을 살해하셨다고 시인하셨던 바. 관련하여 진행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상황이 급박한데도 이미 사흘을 드렸습니다.”
관련자가 에흐베 대공이고, 심각하게 부상당한 사람이 있고, 온느발레 사신단 측에서 이상할 정도로 침묵해서 가능했던 시간이었다.
대공은 신분이 높다 하나 살인 혐의가 있는 피의자였다.
어떠한 신문도 없이 지금까지 편의를 봐준 것도 꽤 극진한 대우였다.
그 사실을 알 에흐베 대공은 침묵하다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엘르시어가 등지고 있는 창밖을 보는 듯했다.
고요해지자, 비 내리는 소리가 새삼스럽게 들려왔다.
엘르시어는 생각에 잠긴 듯한 대공을 살피다가 문득, 그 눈동자에 주의가 쏠렸다. 그 연한 색채가 대공의 야릇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한몫하는 것 같다는 차분한 감상과는 별개로, 저것과 꼭 닮은 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간의 막막한 감상에 젖을 새가 없었다.
어느새 대공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엘르시어가 무얼 보는지 알아차린 것처럼 대공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엘르시어는 미소를 고쳤다.
어째서인지 멈칫했던 에흐베 대공은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입가를 쓸어내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뒤 입을 열었다.
“이리 아리오에서 조바심 낼 것 없습니다, 후작.”
“…….”
“이 일에 대해서 온느발레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아리오는 죽은 온느발레 귀족과 다섯째 왕자에 집중하면 됩니다.”
“……로헤올 공작의 죽음 일체를 에흐베에서 책임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외람되지만, 전하, 진심으로 염려가 되어 말씀드립니다. 공국이 제국에 맞선다고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습니다.”
‘로헤올 공작의 호위를 더 치밀하게 하지 못했다,’ ‘사신단이 머무는 중인데도 수도의 치안이 좋지 못했다.’는 등 온느발레가 아리오에 꼬투리 잡을 게 아예 없어진다면 아리오에는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에흐베에는 짐이 가중되는 것이다.
엘르시어는 아리오의 귀족임에도 도의적으로 한 번 만류했다. 그에 내내 무심하던 대공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희미하지만 가볍지는 않은 웃음기가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떠나갔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엘르시어에게 호의가 생겨 보인 웃음은 아니었다. 냉담하기는 거의 마찬가지였으므로.
라파엘 에흐베는 차분하게 화답했다.
“후작의 걱정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문하십시오.”
“그 사람과 자주 교류를 했습니까?”
맥락 없이 나온 질문이었고, 느닷없이 나온 ‘그 사람’이었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길게 헤매지 않았다. 대공이 누굴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위즈 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업무 관련으로 도움을 받곤 하였습니다.”
“…….”
예의 바르게 미소 지은 엘르시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라파엘은 조용히 숨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 * *
엘르시어는 별궁 1층 정문 앞에 섰다.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우산을 내밀었다.
여기까지 쓰고 오느라 푹 젖어 있던 우산인데도 물기가 거의 없이 말라 있었다. 하인이 수고했을 터다. 그는 부드럽게 치하한 뒤 우산을 폈다.
젖은 돌길을 밟자마자 우산 지붕에 빗방울 부딪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는 피곤한 숨을 내쉬었다.
에흐베 대공을 마주할 때면 정신력이 지나치게 소모되는 경향이 있었다.
대공을 자연스레 두려워하며 몸을 사리는 다른 귀족들과는 꽤 다른 방향의 소모였다.
은여우단을 이끌며 마주하게 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유지했던 정신력이 지금은 허물어졌다가 쌓이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거슬리고 지치고 불쾌해하며 끓기를 반복했다.
그건 아마, 대공이 이 나라에 남기를 택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무도 아니라 하는 위즈를 놓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면 정말 누구인지 몰랐겠으나, 에흐베 대공은 위즈와 함께 이 나라에 남았다. 로헤올 공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달려온 페레이라 백작에 의해 정체가 밝혀졌을 때도 라파엘 에흐베는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흔들린 이는 에흐베 대공을 제외한 전부였다.
상황을 파악한 아르망 페레이라는 입을 닫고 물러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후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한마디라도 던져 놓았을 정치가가.
심지어 로헤올 공작이 죽이려 했다는 서점 주인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요구도 없었다.
처음에는, 에흐베 대공이 페레이라가 섣불리 건드리기 쉽지 않은 신분이라 그런가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엘르시어는 에흐베 대공과 현재 로헤올 간의 악연을 떠올렸다. 이제 선선대 공작이 된 뮌제 로헤올과 에흐베의 군주 간의 관계는 유명하다면 유명했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윌리엄 로헤올을 죽이고 싶어 할 것만 같은 사람을 꼽으라면, 많은 이가 에흐베 대공을 말했을 터다. 하지만 뮌제 로헤올이 죽은 이후 이렇다 할 분노 없이 그 죽음에 수긍한 것 같아서 제이도 분개하지 않았던가.
[새 공작과 에흐베 대공이 움직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 공작은 제 누이를 외면했고, 그 대공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녀가 가장 사랑한 사람들이 그 꼴이야.]
물론 보이는 대로만 믿어서는 안 되겠지만 하여간에 잠잠했었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 대공은 내가 로헤올 공작을 죽였다 하며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제 모든 책임을 에흐베가 지겠다고도 확답했다.
대공이 어째서 난데없이 아리오에 나타났는지, 하필이면 위즈와 로헤올 공작 있는 자리에 나타났는지 정확한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다.
[로헤올 공작이 이 사람을 죽이려 하기에 내가 죽였습니다.]
그러나 로헤올 공작임을 알면서도 공작이 아리오의 평민 한 명을 죽이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로헤올 공작을 처참하게 죽일 리가 없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대공에게 있어 위즈는 그저 평범한 학자가 아니리라는 것도.
적어도 그 두 가지는 알았다.
“…….”
엘르시어는 이 며칠간 익숙해진 불쾌감을 받아들이며 차분하게 호흡을 골랐다.
심장이 명치 빈 곳에 떨어져 뛰었다.
비가 멈추지 않는다.
* * *
언젠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어릴 때와 다르게 매일 만날 수 없음을 힘들어하던 라파엘이 먼저 운을 띄웠던 대화였다.
아티팩트를 사용한다면 매일 같이 그녀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로헤올 저택에서 아침 인사를 하고, 에흐베에서 하루 일과를 처리하고, 로헤올 저택에서 저녁 인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하여 그녀에게 넌지시 말해 보았지만, 뮌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단단히 경고했다.
[마법과 가까이 지내지 마. 더럽고 끔찍한 거야.]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을 터다. 하지만 뮈즈. 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게 끔찍하게 싫었어. 네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 네가 뭐가 돼.
두 사람은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주제로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서로는 서로가 무얼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법이 싫고 마법사가 싫다 하는 말이 뮌제에게 있어 자기혐오라는 것을 서로가 알았다.
그래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그가 인상을 찡그려도 뮌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뮌제는 마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경멸하고 혐오했다.
자기 자신조차 혐오하는 태도는 로헤올 공작으로서 기꺼이 보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바깥에서는 자기 확신이 있어 당당하고 대담한 모습으로 있었으나, 라파엘의 앞에서만큼은 자기혐오를 보이고는 했다.
그러다 어느 오후에 뮌제는 이렇게 말했다.
[마법과 관련한 일로 온전히 행복했던 적은 딱 한 번밖에 없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