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엘르시어는 위즈가 저택을 나갔다는 전갈을 받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근무 시간이었음에도 탑을 나오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급히 나온 그는 걸어가면서 겉옷을 입었다. 그렇게 위즈의 서점으로 향했다. 홀로 있으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미루고 미루었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 이 짧은 시간에 온느발레 사신단 측이나 다섯 째 왕자 측이 그녀를 ‘처리’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온느발레에서 급하게 찾아온 윌리엄 로헤올 공작이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보고 싶다고 서점으로 향한 게 바로 십여 분 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환궁하는 온느발레인들과 마주쳤다.
충분히 시찰할 시간이 없었을 텐데도 벌써 환궁하는 그 일행에 로헤올 공작이 없었다. 엘르시어의 버릇 같은 미소가 조금 변했다.
다니엘은 조용히 귓속말로 보고했다. 로헤올 공작이 위즈와 함께 남았다는 보고였다.
엘르시어는 순간적으로 평소보다 힘주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호위를 겸하고 있으니 다니엘까지 데려가서는 아니 되었다. 그는 온느발레인들을 호위하는 일이 끝나면 즉각 서점으로 오라고 다니엘에게 일렀고, 온느발레인들에게 묵례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뮤니르 자작이 불쑥 말을 꺼냈다.
“후작. 지금 서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같이 갑시다.”
엘르시어는 멈춰서 자작을 돌아보았다.
뮤니르 자작은 굳은 얼굴로 미소했다.
“지금 그리 급히 가시는 게 혹시 그 서점 주인장을 위해서라면. 같이 갑시다. 아무래도 저도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
“…….”
“공작께서 혼자 계시니 염려가 되어 그럽니다.”
“……그러시죠.”
전 로헤올 공작의 뒤를 이어 루미나리에단까지 이끌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을 염려한다니 실은 어이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잘라 내기에는 이 상황을 보는 온느발레인이 많았다. 엘르시어는 예의 바르게 허락했다.
가는 내내 뮤니르 자작은 조금 숨을 가빠하긴 했지만, 엘르시어의 빠른 걸음에 불평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가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적극적으로 엘르시어를 한두 걸음 앞지르기도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공작을 염려하는 건가.
수라장은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위즈의 서점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기도 전이었다. 큰길에서 잡동사니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입구처럼 여겨지는 골목을 지나쳐, 다음 골목으로 틀기 직전.
“…….”
엘르시어는 급하게 오던 걸음을 늦추었다.
한데 묶여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무기. 피. 울음. 까맣게 불탄 벽. 무너진 건물 몇 채.
위즈.
“……위즈 씨.”
엘르시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피에 젖고 죽음에 젖은 위즈는 울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피가 가득했다. 주저앉아 어떤 남자를 안은 채로 그녀는 뚝뚝 울고 있었다. 엘르시어의 눈에는 그 모습만이 들어왔다. 이 골목에 위즈만 있는 게 아니었음에도.
그 옆에서 뮤니르 자작은 헐떡거렸다.
“가…….”
“…….”
“각하…….”
위즈의 품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로헤올 공작이었다.
엘르시어는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그는 위즈에게로 다가갔다. 무릎 꿇고 있는 그녀의 바로 오른쪽에 검이 떨어져 있었다. 공작의 오른손 있는 방향에도 다른 검이 하나 있었다.
“위즈 씨.”
위즈의 곁에 서 있는 남자를 힐끗 확인한 엘르시어는 위즈의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위즈는 엘르시어의 부름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울고만 있었다. 엘르시어는 애써 미소했다.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괜찮아요? 어디 다쳤습니까?”
일단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파엘의 연회색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위즈는 엘르시어의 질문을 듣고 공작을 더 끌어안았다. 엘르시어는 그 알 수 없는 처절함을 보고 긴장한 숨을 조용히 들이켰다.
공작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장갑을 벗고 손을 뻗었다.
라파엘은 엘르시어의 그 손을 제지했다.
두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라파엘은 무감한 음성으로 말했다.
“손대지 마시지요, 클리포드 후작.”
차림을 비롯한 외견이 누가 보아도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니었다. 엘르시어를 존중하는 듯이 말을 올렸으나 그 짧은 말에서 어떤 무거운 권위가 느껴졌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그의 미묘한 언어보다는 비언어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서늘하게 권태로운 시선이나 무감한 표정 같은 것들이.
엘르시어는 옅게 웃는 얼굴로 눈을 찡그렸다.
“누구십니까?”
“아무도 아니에요.”
울음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엘르시어는 위즈를 보았다.
“…….”
라파엘은 옅은 숨을 쉬었다. 뮌제를 부르려던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금 한숨을 흘렸고, 엘르시어의 손 가는 길을 막았던 손을 거두었다.
엘르시어를 막는 건 이제 없었다. 그러나 엘르시어는 이번에는 먼저 위즈에게 일방적으로나마 양해를 구했다.
“위즈 씨. 이분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죽었어요.”
위즈는 잘라 말했다.
엘르시어의 호흡이 일순 멈추었다. 로헤올 공작의 어깨 즈음으로 이미 내려가 있던 시선을 천천히 올렸다. 그는 위즈의 피눈물과 마주쳤다. 붉은 눈물로 번져 있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웃는 것처럼 다시 말했다.
“내가 죽였어요.”
그리고는 로헤올 공작을 고쳐 안았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죽인 자를 그리도 소중하게 보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잠깐 올라갔던 입꼬리조차 비웃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위즈의 이 모든 모습이 조금도 위선처럼 보이지 않았다.
웃음조차 참담하다.
눈물은 처절하였다.
그래서 엘르시어는 그녀를 보다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공작이 아니라 위즈에게로였다. 위즈가 안고 있는 공작을 사이에 두고 엘르시어는 위즈의 두 뺨을 감쌌다.
그 모습을 라파엘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표정 변화 없는 무표정이었다.
엘르시어는 침착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위즈 씨. 잠깐, 잠시만 저를 보십시오. 울지 말고 침착하게.”
“…….”
“이분을 누가 살해했다고 했습니까?”
“내…….”
“내가 했습니다.”
완성된 대답은 위즈의 것이 아니었다.
베렐과 살아남은 노마법사, 노마법사를 붙들고 있는 두 에흐베 기사, 뮤니르 자작은 에흐베 대공을 보았다.
라파엘이 누구인지 대답하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그렇게 정신없는 와중에도 뮌제가 라파엘을 보호했던 것처럼.
라파엘은 뮌제의 답을 앗았다. 누가 죽였는지 대답하지 못하게 했다.
이쪽을 보는 엘르시어에게 대공은 차분하게 확언했다.
“로헤올 공작이 이 사람을 죽이려 하기에 내가 죽였습니다.”
베렐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러실 줄 알았다.
에흐베 대공이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의 주군을 살리고 보호하실 줄 알았다.
“그러니 일단 이 사람, 치료부…….”
“그러지 마.”
그리고 그런 대공을 보호할 주군 역시, 그는 알았다.
엘르시어의 손을 떨어낸 뮌제는 라파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지 마.”
“괜찮아.”
라파엘은 엘르시어가 온 이후 지금까지 제삼자처럼 차갑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게 무색할 만큼 바로 뮌제에게 반응했다.
아리오어로 말하는 뮌제에게 맞춰 주며, 그녀의 진짜 이름 한 번 부르지 않고, 지그시 누르듯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뮌제는 빨리 치료받아야 했다. 지금 그의 걱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때마침 엘르시어와 뮤니르 자작이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무조건 뮌제를 에흐베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 일방적인 이동에 대한 원망이든 분노든, 일단 치료를 하고 나서 얼마든지 받으면 된다. 설령 두드려 맞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뮌제는 피범벅인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지 말라고 다시 한번 말리고자 입을 열었다.
나온 것은 피였다.
켁. 욱.
뮌제는 다시 피를 토했다. 눈알이 터질 것 같이 아팠다. 눈을 가렸다. 라파엘의 표정이 변했다.
베렐은 즉시 달려왔다.
“가……!”
바로 이를 악물어서 발음을 끊었다. 전 공작이신 것을 저 아리오 귀족에게 좀처럼 말씀하시지 않으니 일단은 거기에 따라야 했다. 에흐베 대공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일단 지켜보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터다. 뮌제가 죽였다는 말만은 곧바로 차단했지만.
라파엘에게 안긴 뮌제는 한쪽 눈을 가린 채로 뮤니르 자작을 찾았다.
갑작스럽게 시선으로 지목당한 자작은 굳었다.
노려보는 게 아님에도 노려보는 것처럼 압박감이 있었다. 손 밑으로 새빨갛게 흘러내리는 저것은 피인가 눈물인가. 소름이 끼친 자작은 숨을 멈추었다. 뮌제는 말했다.
“마지막 명령……대로 함……구를…….”
“예, 예.”
동생을 살해하고 조금 전까지 슬퍼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확한 명령이었다. 아. 뮌제 로헤올이다. 여전히 뮌제 로헤올이다.
뮤니르 자작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의 시선이 자작을 스쳐 지나갔다.
뮤니르 자작은 스쳐 지나간 그 시선 한 번으로 뻣뻣하게 긴장했다.
윌리엄의 시신과 심장은 베렐이 챙겼다.
* * *
라파엘은 뮌제의 곁을 되도록 떠나지 않았다.
일국의 왕이 자리를 길게 비우기는 어려우므로 수시로 에흐베에 다녀와야 했지만, 그럴 때도 솜브헤로 지칭되는 그의 기사를 뮌제의 곁에 두었다. 뮌제의 기사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뮌제의 기사들은 라파엘의 결정에 반발하지 않았다.
뮌제가 누운 침대 옆에 마련된 포퇴유에 앉아서 집무를 보고 있던 라파엘은 문득 그녀를 보았다. 뮌제는 눈뜨지 않았다.
가만히 그 옆얼굴을 보던 시선은 우중충한 파란색으로 물든 창밖으로 옮겨 갔다.
토독,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연신 창유리를 때리고 있었다.
“…….”
물끄러미 그 비를 보고 있자니, 정말 어째서인지, 이유도 알 수 없이 뮌제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다시 뮌제를 보았다.
너무나도 고요하게 눈 감고 있는 그녀를.
라파엘은 서류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뮌제의 미지근한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이 미열로 인해 뜨거워 더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한동안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은 곧 약간 무너졌다. 대공은 침대 쪽으로 더 상체를 기울였다. 뮌제의 손을 올려 제 뺨을 감싼 그는 눈을 감았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날 두고 가지 마.
여전히 거죽 거친 이 손에 힘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조금만 더 온기가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녀가 ‘죽었다’고 하던 때에도 두렵지 않았는데, 지금은 두려웠다. 정말 뮌제를 잃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때처럼.
뮌제가 그를 위해 목숨 전부를 걸었던 그때처럼.
그때처럼 뮌제는 누워 있었고, 그때처럼 그는 뮌제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 소년 시절에 느꼈던 그 불안감보다도 지금 느끼는 절망이 더 심했다.
그가 이토록 무력감을 느낀 적이 몇 번 없었다.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윌리엄이 없는 세상이라고, 책임을 다했다고, 이제 더는 눈 뜨려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이곳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뮌제가 잊어버리면 어떡하나.
가지 마. 너만 놓고 내가 갈 수도 없고, 나만 놓고 네가 가서도 안 돼. 우리는 같이 있어야 해.
지그시 눈 감고 있는 라파엘의 속눈썹이 떨렸다.
사실상 순수 무위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남자는 이 무력함 앞에서 이렇게 조금씩 무너졌다. 빗소리가 들렸다.
먹먹한 잿빛이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나 이 기약 없는 기다림이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을 때가 오면, 그럼 최후의 방법을 쓸 것이다. 뮌제가 마법과 관련해 남의 생명을 거는 것에 진저리를 친다 하더라도 일단 살리고, 살리고 나서…….
뮌제를 눈뜨게 하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