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산길에서 기사들과 함께 ‘죽은’ 후 한동안 중앙탑에 몸을 의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리오에 정착하기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 탑에서 반년이나 쉬었음에도 여행까지는 무리인 상태였다.
호문클루스 없는 마법사가 기사들과 함께 몸을 피하는 마법을 쓴 직후 멀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법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여전히 호문클루스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황제에게 익명으로 투서할 때에도 새로운 아티팩트를 만들지 못하고 굳이 중앙탑에서 아티팩트를 빌려야 했었다. 언젠가 악마와 싸워야 하는 그녀는 마법을 낭비할 수 없었다.
윌리엄의 일이 없었다면 언젠가는 결국 호문클루스를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마법을 쓴 만큼 사라진 생명을 채울 방법이 없다는 건 마법사에게는 큰 약점이니까. 지금보다는 마법에 유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마법을 위해 다른 생명을 앗는 것을 적어도 지금보다는 덜 혐오했을 것이다.
윌리엄의 일이 없었다면, 마법사를 이토록 증오하고 경멸하지도 않았겠지. 악마도 이토록 증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윌리엄의 일이 없었다면.
윌리엄의 일이 없었다면.
윌리엄의 일이 없었다면.
그러나 윌리엄의 일은 이미 일어났다.
마법사든 악마든 매한가지로, 남의 생명을 앗아 가면서까지 자기 안위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들이었고, 뮌제에게 있어서는 똑같이 혐오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뮌제는 그녀 자신도 마법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두 존재는 악마와 뮌제 자신인 것도 그래서였다.
윌리엄을 윌리엄이 아니게 한 데에 가장 큰 일조를 한 자들, 악마 하나와 마법사 하나.
혐오에 혐오를, 증오에 증오를 거듭 쌓기에 부족하지 않은 요소들이지 않은가.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러니 두 존재가 함께 가면 된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녀는 가야 했다.
윌리엄을 살려서 구해 낼 수 있든 없든, 그녀는 악마와 함께 가야 했다.
어차피 죽을 각오였다.
어차피.
“컥.”
바닥에 무릎 꿇은 뮌제는 피를 토했다.
* * *
입에서 흐른 진득한 피가 투둑투둑 늘어졌다.
한 번 크게 피를 토한 그녀는 한동안 켁, 콜록, 콜록 기침했다. 입을 가렸다. 입안까지 넘어온 피가 계속 손바닥에 튀었다.
호문클루스가 없다는 건 어쩔 수 없이 마법사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마법사의 생명이 사라진다는 건 그저 일찍 죽는다는 게 아니었다.
몸속의 무언가가 닳아 갔다. 처음에는 그저 거슬리는 느낌에 그치지만, 방치하면 그 닳은 부분을 채우기 위해 몸은 스스로를 쥐어짰다.
악마를 홀로 상대하면서 멀쩡하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마법을 반드시 써야 할 것을 알고 있었고, 전투가 길어지지 않게 최대한 초반에 제압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법을 퍼부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마구잡이로 마법을 쓴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두 번 다 이 악마를 상대하며 있었던 일이라는 게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얼마나 지났나. 오 분은 지났나. 십 분은 지났나.
“흐으.”
“켁…….”
그 짧은 시간, 서로에게 마법과 요술을 쏟아붓느라 양쪽 다 멀쩡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까지 서로에게 쏟아부은 그 힘이 각자의 전력이었느냐.
그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뮌제는 확실히 아니었다.
전투하며 서로를 밀고 밀다 보니 움직임이 컸다. 서점이 있는 골목에서는 이미 벗어난 상태였다. 그건 그만큼 이 전투에 휘말릴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피하던 예술가들 중 몇은 검을 들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사람이 서점의 위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을 비명 지르듯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리오인들이었다.
단 한 번도 로헤올에 속했던 적 없으며, 단 한 번도 뮌제에게 중요했던 적 없는 이들이었다.
전투에 휘말려 죽는다면 유감일 뿐. 뮌제에게는 저들을 위한 그 어떠한 책임감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고 보호하며 전투할 수 있는 계제도 아니었다. 상대는 악마였다.
뮌제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절대 그럴 여유가 없는데.
마법의 반이 수시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흘러갔다. 사람들을 보호하랴, 치명타를 피하며 윌리엄을 제압하랴, 그녀의 정신이 세세하게 쪼개지고 쪼개졌다. 칼날같이 날 선 주의를 유지하는 게 점점 어려워졌다. 얼마나 지났나. 오 분? 십 분? 십오 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이 꼴이었다.
저것이 얼마나 아득바득 회복해 왔는지 체감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체감하는 만큼, 모래 몇 알만큼 남아 있던 망설임도 한 알씩 사라졌다. 악마가 회복할수록 윌리엄이 버티는 것도 힘겨워짐을 알기 때문이다. 윌리엄이 이미 죽었을 수도 있다는 짐작도 점점 형체를 갖춰 선명해졌다.
“크, 쥐새끼가……. 많이 컸다.”
“…….”
“그때보다도 많이 컸어……. 히히.”
하지만 의문인 것은, 저것의 움직임에 주춤거리는 기색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뮌제만큼이나 주변을 신경 쓰는 듯했다. 처음에는 막 나가며 자유롭더니 어느 순간부터 쓰는 힘의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심지어 점점 줄어들고 있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한계인가 싶었다.
참 빠르게도 한계에 도달했다 싶었다. 겨우 이 정도 회복했으면서 그녀를 찾아다녔냐는 기막힘도 올랐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순간에는 또 폭발적으로 방어했다.
한계에 도달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왜 저러나.
혹시 아직 윌리엄이 살아 있나. 이럴 수가 있나? 잡아먹힌 이가 악마의 힘을 억제하고 조종할 수가 있어?
뮌제는 검을 쥔 채로 땅을 짚고 있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에 바닥의 작은 돌멩이들이 파고들었다. 그 옆에 피가 떨어졌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켁. 뮌제는 다시 기침했다. 입을 막고 있던 왼손이 떨어져 바닥을 짚었다.
비틀비틀 다가오는 윌리엄이 실실 웃었다.
“한계지?”
“…….”
“호문클루스 없이 덤비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언젠가부터 온느발레의 전국에 넘쳐 나기 시작했던 거의 모든 아티팩트가 그의 호문클루스였다. 아리오에 점점 많아지던 것들의 주인도 그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회복해 온 악마를 호문클루스가 없어 생명력이 많이 닳은 채로 있는 마법사 따위가 상대하려 하다니 말이 안 되지.
그의 자신감은 그러했다.
하지만 뮌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저것을 이길 수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지만 않았다면 이 정도로 급격하게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뮌제는 계속 욕지기가 오르는 것을 견디다 못해 다시 입을 가렸다. 일 분. 아니, 삼십 초만. 삼십 초만. 뱃속의 이 고통에 적응할 시간이 있다면.
바로 옆에 선 윌리엄의 신발이 보였다.
힘겨운 곁눈질로 구두의 발등을 본 뮌제는 웅크리듯 고개를 더 숙였다. 뱃속이 불타는 것 같았다. 땅을 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윌리엄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 일순 총기로 빛났다. 검을 잡은 손이 한 번 크게 경련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윌리엄은 웃었다. 정말 쥐새끼가 살려고 기는 것 같다. 아, 그래. 이 몸을 빼앗는 것도 좋겠지. 본디 원했던 건 이 몸이 아니었던가. 그는 피가 질질 흐르는 왼팔을 뻗었다.
이 정도라면 뮌제 로헤올을 삼킬 수 있다.
그 손끝이 뮌제의 머리와 겨우 종잇장 몇 장 겹친 만큼의 거리를 남기고 있을 때, 그 사이를 얼음 같은 무언가가 갈라냈다.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휭 하는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피가 튀었다.
“아……, 아으…….”
윌리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까지 이 남자를 전투에서 배제하기 위해 썼던 요술이 전조증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다.
준비할 시간도 없이 몰려온 이 격통은 쉽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순간 숨도 쉬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그러나 뮌제는 제 등에 부드럽게 올라온 어떤 손에 그대로 굳었다. 돌연 나타나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사람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났다.
수년이 지났건만 버릇처럼 구별해 냈다. 구름 낀 듯 흐리게 얼얼하던 머리로도 뮌제는 피 냄새 중의 그 무거운 향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왜……. 그녀는 눈을 잔뜩 찡그렸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눈의 실핏줄이 새빨갛게 터져 있었다.
“각하. 각하……. 괜찮으십니까?”
뒤이어, 마침내 주군의 곁에 다가올 수 있게 된 베렐이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손이며 목소리며 형편없이 떨렸다. 기사는 그리 한결같이 태산 같았던 주군이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있음에 많이 충격을 받았다.
분노한 존귀한 이에 의해 요술이 파훼되지 않았다면 조금 전 뮌제는 죽었을 것이다.
뮌제는 이 기사 역시 알아보았다. 고통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그녀는 피 묻은 입술을 움직였다. 목소리는 없는 움직임이었다.
경이…….
경이 불렀나.
이 사람을 경이 불렀나.
그러면 안 되는데.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적어도 이 사람의 앞에서는 죽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 주는 베렐의 손길을 받으며 다시 기침했다. 그래도 조금 전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다.
반대로 윌리엄은 고통에 숨을 헐떡거리는 중이었다.
“이……. 씨이, 발 새끼가…….”
“이번에는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을 텐데, 여전히 이해를 못했군.”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에흐베 대공은 잔잔하게 얼어붙은 음성으로 말했다.
* * *
윌리엄은 눈이 찢어질 것처럼 에흐베 대공을 노려보다가 눈을 들었다.
뮌제는 그 시선의 끝을 확인한 뒤, 긴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뮌제가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남에 따라, 그녀의 등을 데우고 있던 단단한 손도 떨어져 내려갔다. 뮌제는 그 손이 허공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제 추운 손끝을 한 번 잡았다 놓는 것을 느꼈다.
에흐베 대공은 굳이 뮌제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고, 뮌제 역시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 한 번 걸지 않았다. 괜찮냐는 걱정 어린 질문도 없었다.
뮌제는 피가 닦여 한결 쉽게 뜰 수 있게 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경, 물러나.”
베렐이 한 수 섞을 수 있는 수준의 전투가 아니었다.
그러나 베렐은 자기 한 몸은 그럭저럭 보호할 수 있는 기사였다. 그 정도로도 뮌제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것에 힘써 주게.”
“……예, 각하.”
악마가 베렐이나 다른 자의 몸을 삼킬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럴 확률도 낮을뿐더러 만일 악마가 그런 미련한 짓을 한다면 사실 고마운 일이었다. 윌리엄의 몸이기에 여태 뮌제가 놔둔 것이지, 그 이외의 육신이었다면 이미 십 년도 전에 죽였다.
뒤죽박죽으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에서 피를 털어 낸 뮌제는 물러나는 베렐에게서 시선을 돌려 윌리엄을 보았다.
일어난 에흐베 대공은 윌리엄이 아니라 바닥을 눈에 담았다. 뮌제가 토한 붉은 것이 고인 바닥이었다.
“…….”
뮌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했던 짧은 전투 중에 저것이 어째서 자꾸 약해졌었는지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대공을 배제하고 싶었으리라.
에흐베 대공이 기어이 참전하니 악마는 비로소 겁을 집어먹었다.
뮌제로서는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