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58)화 (58/120)

# 57화

뮌제가 가까워진다.

그 뿌리 없는 희망에 에흐베 대공의 숨길은 조금씩 트였다.

온느발레 사신단이 아리오로 향하고, 제이를 보호하던 에흐베의 기사는 살해당했다.

라파엘의 짐작대로 기사를 뮌제가 살해했다면, 제이의 동선과 뮌제의 동선이 겹쳤다는 뜻과 같았다. 해서 제이의 뒤에 다시 기사를 붙였건만 그 기사는 몇 번이고 따돌려졌다. 길을 잃었다. 제이만을 바라보며 따라가는데도 어느 지점에서 제이는 사라지고 기사는 길을 잃었다.

해괴한 일이었다. 마법이 관계있는 게 분명했다.

얼숍에 아티팩트가 넘쳐나고 있으니 그 탓일지도 모른다는 보좌의 말도 있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다른 생각을 했다.

이것 역시 너이기를.

그의 숨길이 더 트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직 에흐베의 사람들만 아는 참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사실, 뮤니르 자작이 은여우단의 단장에게 부탁하던 자리를 몸 가린 채로 지켜보던 사람이 죽은 남자 외에도 한 명 더 있었다.

뮤니르 자작을 매시 좇고 있던 에흐베의 기사였다.

온느발레의 황제가 할 수 있다면 에흐베의 공왕 역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뮤니르 자작과 클리포드 후작의 그 대화 내용은 당연히 라파엘에게로 보고가 올라갔다.

필시 윌리엄 로헤올에게 명령 받았을 뮤니르 자작이 ‘연회색 눈을 가진, 마법과 아티팩트에 잘 아는 여성’을 찾았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리오에 그녀가 있다.

정말, 뮌제가 있다. 네가 정말 그곳에 있다.

온느발레 사신단이 아리오로 향하고, 제이를 보호하던 그의 기사는 살해당하고, 뮤니르 자작의 부탁은 저랬다.

뮌제는 얼숍에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 라파엘은 뮌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리고 이제는 베렐이 갑자기 밤에 아리오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까지 왔다.

그 기사는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전히 라파엘의 기사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을 터.

라파엘은 아티팩트를 통해 온 짧은 보고를 내려다보다가 책상에 내려놓았다. 확실히 급하게 쓴 듯 서체가 엉망이었다. 뮌제에게 무슨 일이 있나. 그가 그녀의 감정으로 물들었던 게 바로 그제였다.

잠시 생각하던 대공은 고개를 들었다. 이 보고가 오기 직전 입실했던 옥타브에게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말해라.”

“전하. 온느발레의 상황이 아리오와 맞물려 심상치 않은 듯합니다.”

라파엘의 연회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렸다. 희미하게 찌푸린 한쪽 눈가를 보며, 옥타브는 보고를 이어 갔다.

아리오에서 일어난 일, 뒤집어진 아리오 왕실, 온느발레와의 연결고리.

불타 죽은 자의 이름을 들은 라파엘은 입을 열었다.

“그자, 혹 루미나리에단에서 로헤올 공작의 직속이었던 자인가?”

그가 말하는 공작은 뮌제 로헤올이다.

뮌제 로헤올이 죽은 이후, 라파엘은 신하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뮌제를 전 공작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옥타브는 그런 주군을 알아서 의아해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예.”

“죽었다고?”

“예. 증인의 증언대로라면, 건물에 불을 지르려다가 실수했는지 자신에게 불을 붙였답니다.”

옥타브는 자신이 보고하면서도 무슨 이런 바보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사람을 불태우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촉진제를 뒤집어쓰거나 작정하고 화형하지 않는 한 인간의 육신은 그리 쉽게 타지 않았다.

“그 증인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평민 여성인 것 같습니다. 귀족은 확실히 아닙니다. 희귀한 고서들을 가진 서점으로 꽤 알려져 있다는 점 외에 아직까지는 특이한 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대공은 팔걸이 끝에 걸치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그의 눈이 가늘게 날카로워졌다.

“……서점?”

“예? 예.”

“거기에 그 왕자가 있었다고?”

“예. 정황을 살피면 그렇습니다.”

뮌제는 책과 떼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로헤올 가주로서 바쁘게 일정을 소화해 내면서도 틈틈이 꼭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거의가 고서였다. 그녀가 비밀리에 중앙탑에 소속된 학자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는 연구 활동의 일환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읽는 책들의 공통점은 금세 알 수 있었으므로, 라파엘은 종종 그녀에게 책을 선물하곤 했었다.

단순히 고서가 보이는 족족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악마를 주제로 한 서적과 자료가 보이면 입수하여 그녀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뮌제도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라.

모를 수가 없었다. 뮌제의 일이니까.

정말, 모를 수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라파엘은 보좌에게 물었다.

“그 증인은 어디에 있나.”

“증인……, 말씀이십니까? 미처 주의가 닿지 않았습니다. 바로 찾아보겠습니다.”

중요한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라 하여도 평범한 평민이니 현 소재까지 캐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옥타브는 당황하여 얼른 대답했다.

라파엘은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말없이 책상 위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주군을 잠시 기다리다가, 옥타브는 본래의 큰 흐름으로 돌아왔다.

“하여, 상황이 이러하니 이건 페레이라 백작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 여긴 모양입니다.”

여차할 시 아리오를 찍어누를 힘을 지닌 귀족이 나서야 했다. 페레이라는 그 수준까지는 못 되었다.

온느발레의 그 자존심으로는 ‘여차할 시 사과’는 고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선 사람이…….”

옥타브는 눈치 보듯 주군을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보고를 이었다.

“윌리엄 로헤올 공작이 나섰습니다. 준비가 대대적이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황제에게 허가를 받아 아티팩트를 기동하거나 마법사의 마법으로 텔레포트할 듯합니다.”

“…….”

“그, 이게 도저히 로헤올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이 나설 일은 아닌데…….”

“언제 출발한다 하던가.”

묵묵히 듣고 있던 라파엘은 담담하게 물었다.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분의 무채색 무감한 눈동자에 시퍼렇게 나른한 감정이 서렸다. 옥타브는 반사적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답하는 목소리가 주춤거렸다.

* * *

얼숍을 감싸고 보호하는 성벽 바깥에서, 새벽, 두 기사는 만났다.

“각하는 찾았나? 어디 머무르시는지?”

“아니요. 아직. 경은 연락 받으셨습니까?”

“나도 아직일세.”

“아니, 근데, 저기, 경.”

청년은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각하께서 달가워하실 것 같지가 않은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항상 주군의 곁을 지키지는 못해도 아홉 기사들 중 가장 자주 주군을 뵙고 살피는 청년은 진심으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것을 위해 얼숍과 얼숍 주변 지방만을 돌아다니기로 다른 기사들과 합의한 바였다. 공작도 그 모종의 합의를 아는 눈치였지만 다른 말 없이 기사들의 염려를 받아들였다.

기사들끼리 만든 그 체계를 갑작스럽게 뒤집으려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들의 주군은 베렐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면대면으로 접촉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셨었다. 본디 산길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아니었던 베렐을 조용히 불러 끌어들이셨을 정도로, 베렐은 공작의 믿음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뮌제 로헤올 공작의 최측근.

그만큼 베렐은 뮌제 로헤올 공작을 연상하기 쉬운 사람이었으므로, 그들의 주군께서 선을 그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명령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베렐이, 이리 정면으로 대서려 하다니 청년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이거 정말 이래도 되나. 안 될 것 같은데.

같은 기사로서 베렐을 존경하고, 지금 베렐에게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만, 청년에게 우선은 단연코 주군이었다.

“게다가 지금 여기에 도련님이 계십니다. 경이 얼숍에 있는 건 정말 위험합니다.”

베렐은 처음 듣는 소식에 표정을 달리했다.

“그분이 왜?”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게 온느발레와 얽혀 있던 모양입니다. 저도 자세한 건 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도련님 오셨다는 것도 소문이 파다한 덕분에 알게 되었고요.”

“언제 오셨다 하던가?”

“그건 모릅니다. 경. 뭔가 이상합니다. 각하께서 일부러 온느발레를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끌고 들어오셨을 리가 없습니다.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는 온느발레는 그 누구보다도 멀리하려 하시던 분이지 않습니까.”

“그와 동시에 온느발레를 추락시키는 것에 별 유감이 없으신 분이기도 하지. 부탑주 내려놓으실 때도 거리낌없이 온느발레를 연결시키지 않으셨던가.”

베렐은 그의 주군이 이미 끝을 직감하셨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감하였으나 포기하지는 못하고, 그러면서도 끝은 보이고. 사람을 미치게 하고도 남는 그 희망고문.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싱숭생숭해하는 젊은 기사를 보다가, 베렐은 문득 낮게 웃었다. 따뜻하게 주름진 웃음을 본 청년이 한숨을 쉬었다.

“웃지 마십시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경.”

“예.”

“경은 각하를 위해 목숨을 걸었나?”

“예?”

“…….”

“예……. 물론입니다.”

“하지만 현 공작 각하를 위해서는 그렇지 않고.”

‘현 공작 각하’라 하니 누굴 말하는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말한 사람이 베렐이기 때문에 사고 처리가 더 늦어지기도 했다.

한 박자 늦게 윌리엄 로헤올을 떠올린 청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경.”

“경. 난 두 분 각하께서 함께 행복하시길 바라네. 그러나 그게 안 된다면, 한 분만이라도 살아남으시길 원해.”

“…….”

“그리고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면, 경, 두 분 각하께서 각각 가시는 길을 지키고 싶네.”

오래도록 로헤올을 섬겨 온 기사는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청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말고삐가 조금 당겨졌다가 풀어졌다.

새벽 별이 저물어 가고 먼 곳에서 서서히 해가 뜨는 새벽 아침. 이 아침 새벽. 너무도 잠잠한 성벽 아래에서 너무도 잔잔한 것을 듣고 있었다.

“각하께서 로헤올로 귀환하실 생각이 조금도 없으시고, 시간은 이제 없는데 그 어떠한 방법도 찾지 못하셨다면, 그럼 결국 이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하나야. 경도 알고 있겠지.”

“…….”

“내게 로헤올은 두 분 각하로 끝일세. 난 이 끝에 두 분과 함께 있고 싶네. 두 분이 함께 계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두 분의 마음고생을 알고 있으니만큼.”

어린 시절의 두 남매를 기억하고 있으니만큼.

침묵하던 청년은 붉어진 눈으로 물었다.

“각하께서는 정말 별세하실 생각이십니까?”

“…….”

베렐은 미소했다.

“시간이 없다 하셨으니 정말 시간이 없을 걸세. 그래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마지막 1초까지 자료를 찾아 주게. 각하를 위해 그리해 줘.”

주군은 일이 끝난 후 생존하려 하지 않으시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최측근이란 기사는 주군을 막지 않는다.

베렐이 가까이에서 봐 온 무언가가 있기에 주군을 막지 않기로 한 거라면…….

아니, 그 무언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상관없다. 이러면 안 된다. 기사는 이래서는 안 된다. 로헤올의 기사는 이래서는 안 된다. 뮌제 로헤올 공작을 모신 기사는 이래서는 안 돼.

성벽을 돌아 성문 쪽으로 가는 베렐을 뚫어져라 보던 청년이 이를 사리물었다.

세상이 밝아지고 있었다.

* * *

베렐과 젊은 기사가 한 이 대화 역시 대공은 보고 받았다.

* * *

위즈는 책을 안고 서 있었다.

엘르시어가 가져다 준 그 책이었다. 시간이 없어서 더는 그 어떠한 책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마지막 희망처럼 또다시 왔던 한 권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녀가 찾는 내용은 없었다.

끝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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