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57)화 (57/120)

# 56화

절대 뮌제 로헤올 공작이 당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확신과 신뢰는 그런 비현실적인 망상으로 뻗어 나갔다. 곧 정신을 차리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누군가가 골로 갔다는 건 알겠는데.

청년의 눈이 새벽 푸른 빛이 감도는 골목의 벽, 거기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담았다. 지금 저기 서점 안으로 언뜻 보이는 흰 것은 시신을 덮은 무언가가 분명했다.

“…….”

……설마 온느발레와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

‘그것이 내가 아리오에 있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없다.’ 하시던 주군의 말씀이 그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길에 마침내 염려와 긴장이 깃들었다. 물끄러미 현장을 보던 청년은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엘르시어는 그 청년을 알아보았다.

마침 서점에서 나와 기사들이 하는 일을 한 바퀴 둘러보던 그의 시선은 청년의 위에서 멈추었다.

눈이 마주쳤다.

차림은 여전히 남루하지만 여전히 자세가 단단하게 좋고 눈 역시 잔잔했다. 엘르시어는 옅게 미소했다.

청년 역시 엘르시어를 알아보았다. 엘르시어의 정체를 알아본 것은 아니며, 그때 서점에서 마주쳤던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엘르시어는 청년에게로 다가오며 청년이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주었다.

청년은 고개를 까닥였다. 건성인 인사였으나 엘르시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책 때문에 왔나?”

“예…….”

“사정이 있어서 여기 주인은 잠시 다른 곳에 머물고 있다. 책을 전해 주러 온 거라면 내가 전해주지.”

“무슨 사정이요?”

“…….”

“책은 내가 직접 전하고 싶은데, 어디 계시는지 압니까?”

“…….”

엘르시어는 턱을 약간 들었다. 눈에는 의외라는 빛이 덮였다.

기사를 대하는 평민치고는 태도가 특별했다. 그러나 위즈도 다른 느낌으로 굉장히 특별했었고, 그 위즈의 지인인 이 남자에게 엘르시어는 꽤 온건하게 대답했다.

“내 저택에 있으니 네가 직접 전하기는 어려울 텐데.”

“…….”

그러자 청년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런 그를 살피던 엘르시어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혹시 온느발레 출신인가?”

말을 섞을수록 어딘가가 걸리는 발음이다 싶었는데, 혀를 말아야 하는 발음이 문제였다. 억양도 딱 온느발레인이 아리오어를 할 때에 들을 수 있는 억양이었다. 페레이라나 뮤니르가 말할 때의 억양과 거의 같았다.

청년은 멀뚱하게 엘르시어를 보다가 짧게 대답했다.

“예.”

그는 제 아리오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아리오를 돌아다닐 때면 이와 비슷한 질문을 몇 번이고 듣게 된다. 당황하지 않은 청년은 엘르시어에게 책을 내밀었다.

사실, 주군을 직접 뵐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는 아티팩트로 전하면 된다. 그리하라고 주신 아티팩트였다. 그러나 주군이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섣불리 아티팩트를 쓸 수가 없었다. 중앙탑 소속 학자가 아닌 민간인은 아티팩트를 소지할 수 없으므로.

이 남자에게 이 책을 들키지 않았다면 아티팩트로 책을 보낼 수도 있었을 터다. 탑에서 보낸 책이라고 사기 칠 수 있으니까. 주군께서 끼북이를 쓸 때처럼 기동 시 꽃이 피는 아티팩트를 나눠주셨던 까닭도 그래서였다.

“부탁합니다. 그분께 최대한 빠르게 전해 주십시오.”

“…….”

청년은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바로 자리를 떴다. 엘르시어는 청년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시선을 내려 책 제목을 확인했다. 온느발레어.

《악마에게 ‘육신’은 어떠한 의미인가. 3권》

그야말로 연구자들이나 찾을 법한 주제였다.

가볍게 넘기고 도로 서점 쪽을 보았다. 책을 든 손이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언젠가의 기억은 문득 떠올랐다. 눈이 가늘어진 엘르시어는 다시금 제목을 확인했다.

언젠가 그가 제목을 본 바 있던 고대 온느발레어로 쓰인 책. 《악마의 땅에 관한 고찰》.

그리고 위즈는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는 자들을 연구한다 했었다. 그래서 마법사들을 연구한다고 생각했었는데…….

“…….”

그녀가 말했던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는 자들’이 ‘마법 등을 쓸 수 있는 자들’이 아니라 ‘마법 같이 보이는 걸 쓸 수 있는 자들’이었다면?

악마란 전설이나 신화 같은 존재라서, 현대의 사람들은 마법과 마법사를 주로 공부한다. 엘르시어도 악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실로 연구하는 게 악마라면, 그건 아무래도 마법사와는 꽤 결이 다른 연구 주제였다.

그런 것치고 위즈는 마법사에 대해 상당히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티팩트의 특징만 듣고 아티팩트의 제작자를 추리해낼 수 있는 건 어지간히 마법사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마법사에 대해서는 전문가에 가까운 은여우단 기사들마저 몰랐던 재야 마법사까지 알고 있지 않았던가.

“…….”

엘르시어는 책을 열어 잠시 훑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하나 읽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몇 장을 빠르게 읽어 내린 후 책을 닫았다.

그의 저택에서 쉬고 있을 위즈가 떠오르자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각하께 무슨 일이 있으셨던 듯. 현재 아리오의 어느 귀족 저택에 머무르신다 합니다. 여기 분위기가 이상. 서점 앞의 골목 벽이 그을려 있고 피가 튄 흔적이 있습니다. 서점 안에 누운 시신도 본 듯. 은여우단이 조사 중. 각하께 연락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뵈었을 때 그것이 각하 계시는 곳을 알았다 하시며 더는 시간이 없다고 하셨기에 염려됩니다.

보고도 아니고, 그렇다고 책을 보내는 것도 아닌 이런 어려운 연락은 베렐을 통하는 게 최선이었다.

젊은 기사는 쭉쭉 써 내려간 짧은 서신을 베렐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현재 헤본에서 머무는 중. 나흘 후 얼숍 성벽에서. 교대.

막 답장을 보낸 베렐은 펜을 내려놓았다. 굳은살이 박인 두터운 손이 이마를 쓸었다.

부디 잘못된 선택이 아니기를.

부디.

에흐베 대공을 만난 이후로 만족할 만큼 움직이지 못하였던 기사는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았다. 여전히 추적당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현재 뮌제 로헤올 공작을 모시는 아홉 기사 중 가장 뮌제를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이 바로 저였다. 잊지 않았다.

에흐베 대공은 뮌제 로헤올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분이라는 점도.

그러니 부디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기를 바랐다.

노기사는 ‘얼마 전 뵈었을 때 더는 시간이 없다고 하셨기에 염려된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없다고 하셨으니 정말 시간이 없는 것일 터다. 베렐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뮌제 로헤올 공작은 돌아가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의 주군의 각오였다.

주군을 따라 베렐 역시 죽기를 각오했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칠 목숨이었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그 핑계로 내린 이 결정, 주군의 뜻에 반하는 이 결정이 부디 잘못된 선택이 아니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겨우 수 분 후, 베렐은 이 지역을 떠나기 위해 말에 올랐다.

* * *

저녁. 바쁜 와중에 저택에 들른 엘르시어는 가장 먼저 위즈를 물었다.

“그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가씨는 아직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예. 아직. 이십 분 전에 초에 불을 붙이러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

집사의 대답에 엘르시어는 입가를 쓸었다.

그는 겉옷을 집사에게 맡기고 위즈의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짧게 망설였다.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망설임이었다.

곧 노크했다.

“위즈 씨. 저 엘르시어입니다. 혹시 깨어 있으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들엉옹셍용.”

“…….”

문을 연 엘르시어는 위즈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미소했다.

이럴 줄 알았다.

촛불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입술 아래로 젤리 여러 개가 늘어져 있었다. 야무지게도 우물거리고 있다.

끼니 때가 되면 위즈가 옆옆집을 습격하여 식사를 챙긴다는 보고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옆옆집 주인이 울부짖는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는 다니엘의 비공식적인 첨언도.

그런 사람이 종일 한 끼도 먹지 않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쯤 되면 배가 고플 때도 되었고.

엘르시어는 위즈에게 다가가며,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를 힐끔 보았다. 저 알 수 없는 주머니. 그는 저 주머니가 아티팩트라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위즈가 앉은 의자 옆에 선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군것질을 하지 말고 식사를 해야지요.”

“움.”

“마침 저도 식사를 해야 하니 같이 하겠습니까?”

사실 그럴 여유는 없었다.

위즈가 여기에 없었다면 애초에 저택에 들르지도 않았을 터다. 그는 매우 바빴다. 그럼에도 제안했다. 이 서점 주인에게 그는 많이 너그러웠다. 아주 많이. 그녀가 이렇게 충격적인 일을 겪기 전부터 이미.

지금에 와서 더해진 것은 그녀의 마음 상태에 대한 염려뿐이었다.

엘르시어는 그의 얼굴을 되도록 보려고도 하지 않고 식사 권유에도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드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이 책.”

“…….”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위즈의 눈이 커졌다.

그가 내민 책과 그의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았다. 엘르시어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우는 줄 알고 눈을 깜박거렸다. 다시 자세히 보았지만 위즈는 그저 마른 얼굴이었다.

그녀는 얼른 그에게서 책을 받았다. 엘르시어는 제 손에 닿은 싸늘한 손끝을 느꼈다. 충격적일 만큼 차가웠다.

위즈는 그 앉은 자리에서 바로 책을 폈다. 입 밖으로 늘어져 있던 젤리는 단숨에 사라졌다. 식사에 관한 생각은 완전히 잊은 모양이었다.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는 눈동자가 비스듬하게 보였다.

“…….”

엘르시어는 무어라 말하려던 입을 닫았다.

이 저택에 머무르는 한은 그럭저럭 괜찮을 테니, 지금 괜히 걱정을 더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계획이 실패한 일로 다섯째 왕자 측에서 증인을 없애겠다며 위즈를 살해할 가능성이 있다. 온느발레 사신단에서 움직일 수도 있었다.

발롬브로사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위즈를 잘 감시하라고 챙겼다.

이 모든 것들은 높으신 분들을 피해 오던 평민 학자가 선뜻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다. 적어도 오늘 말할 것은 아니었다. 아예 말할 일 없으면 좋겠으나, 말해야 한다면 최소한 며칠만 더 마음 추스른 후에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엘르시어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는 다시 나가 봐야 합니다.”

“…….”

“위즈 씨.”

“…….”

“허기지면 언제든 방을 나가서 누구라도 잡고 식사하고 싶다고 해요.”

“…….”

“졸리면 푹 자고, 푹 쉬어요.”

당부가 이어지는데도 위즈는 움찔거리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르시어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가 앉은 의자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위즈는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놀란 것처럼 흠칫 그를 보았다. 눈높이가 거의 맞았다. 아니, 이제 그가 조금 더 낮았다.

엘르시어는 미소한 얼굴로 정확히 위즈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손이 차니 따뜻하게 있는 게 좋겠습니다. 편하게 쉬고 마음 추슬러요. 그리고 지금까지 했던 말, 다 들은 것으로 믿겠습니다.”

하나하나. 조곤조곤. 나지막하게 다가온 음성은 위즈에게 도착했다.

위즈는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꼭 어느 밤이 연상되는 듯한 고요하고도 날카로운 눈이었다. 저녁시간과 촛불로부터 촉발된 것만 같은 긴장이 아주 잠깐 공중에 맴돌았다.

곧 위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낮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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