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뮌제는 골목 한쪽에서 아직도 불타고 있는 조각상으로 다가가 그것을 발로 툭툭 밀었다. 입고 있는 옷이 순식간에 불타기에 충분한 화력이었음에도 불은 뮌제를 덮치다가도 물러가기를 반복했다. 뮌제는 그걸 시신 옆에까지 밀고 온 뒤에야 시신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는 검게 타서 재가 되어 버린 부분이 있어 한쪽 발목이 보이는 치마 바깥으로 발을 툭 내밀어 보았다. 신발과 발목에 재가 묻은 상태였다.
이 정도면 구색 맞추기에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옅은 호흡을 하며 눈을 들었다.
목에 건 주머니에서 작은 아티팩트를 꺼냈다. 아까 꽃이 피게 했던 아티팩트였다. 간단한 조작으로 손안에 쪽지가 잡혔다.
달빛이 충분했다.
<페레이라 백작이 움직이기 시작.>
전 공작은 바로 구긴 쪽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못 견디고 이 나라에서 철수하려 하는군. 그러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이를 죽이려 했던 건가.
괜히 말려들어 피해를 봤다.
앞에 있는 어두운 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눈동자가 오른쪽으로 약간 굴러갔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뮌제는 치마를 추스르며 뒤로 돌았다.
살아남은 왕자는 문간에 서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는 그 처연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안녕, 로헤올 공작.”
갈라진 음성을 들은 뮌제는 언뜻 웃음을 비쳤다.
그녀는 대답했다.
“당신은 한결같이 쓸모없군요.”
인사 대신 온 그 나지막한 말에 제이의 숨이 멈추었다.
조금 전 뮌제가 보인 웃음은 비웃음, 짜증스러운 웃음이었다. 한때 최고위 위정자 중 하나였던 이는 쓸모없는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면서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머리가 있다면 그걸 왕자인 당신이 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가진 유일한 가치를 잃어버린 당신을 도대체 누가 순순히 안전하게 두고 지켜봐 준답니까?”
전 로헤올 공작은 피 묻은 손을 들어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머리가 있다면.
“머리가 있다면, 내가 왜 표면적으로 가치 없는 인질 따위에게 우호적이었을지를 생각해야지요.”
말도, 손동작도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온느발레에서 제이가 뮌제 로헤올 공작에게 응당 ‘받아야 했던’ 대우이기도 했다. 뮌제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하게 그에게 호의적이었을 뿐. 사실 이것도 꽤 예의 바른 편이었다.
그런데도 제이는 충격에 굳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아오며 유일하게 그리워했던 이이기 때문에.
전 공작은 오른쪽 눈을 아주 조금 찡그렸다.
“불행한 권력자가 세상에 당신뿐이겠습니까? 온느발레의 그 황제마저도 그럭저럭 불행한 사람입니다.”
“…….”
“자신을 지킬 힘도 없이 계속 스스로를 가엾어하고 싶다면, 그리해요. 그리하다가 순순히 살해당하면 됩니다.”
“…….”
“대신 조용히, 혼자 숨져야지요. 여기 와서 이런 식으로 내게 또다시 누 끼치지 말고. 왕자.”
내내 나직하고 담담한 음성이었다. 노여움도 계획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정치가는 제이에게 분노를 표하지 않았다. 노하여 얻어낼 것조차 없는 자를 상대한다는 태도였다.
제이의 숨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그 느낌은 옳았다. 여태 이 왕자가 그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 되었던 건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위즈라는 인물을 거의 다 제이에게서 가져왔던 일. 오직 그것뿐.
뮌제는 말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어깨 앞으로 흘러내려왔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찬 손끝이 귓바퀴를 둥글게 쓸었다.
위즈의 표정이 걸린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기억해요. 과거에 매달려 나를 찾아오던 당신의 방종으로 당신을 지키는 기사들이 또다시 죽었습니다. 태어나기를 위에 서서 태어났거든 최소한의 의무감은 가져요. 남에게 매달릴 생각만 말고.”
“…….”
제이를 지켜야 했던 두 은여우단의 기사는 죽은 남자가 사용한 아티팩트에 의해 이 상황에서 처음부터 완전히 배제되었다.
마법이 담긴 아티팩트가 주변에 머무르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남자는 기사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나 기사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을 테며, 그래서 광역 마법을 썼을 것이다.
위즈는 또다시 기사를 잃은 책임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엘르시어였다.
* * *
말에서 내린 엘르시어는 위즈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위즈 씨,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
“다쳤어요?”
그의 셔츠에 밴 바람 냄새가 차갑게 몰려왔다.
위즈는 눈물 고인 얼굴로 입을 비죽거렸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저거 데리러 왔으면 어서 데리고 가세요.”
제이를 손가락질한 그녀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제이를 향해 다가갔다. 엘르시어는 그제야 제이에게로 신경이 미쳤다. 그는 제이를 보았다.
왕자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위즈는 희게 질린 제이를 지나쳐 서점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서점 속에 잠기자, 은여우단의 단장은 짧은 숨을 흘리고는 제이에게 다가섰다. 처음부터 우선해야 했던 분은 이분이었다. 그런데…….
엘르시어는 이번에는 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로드. 괜찮으십니까? 부상당하셨습니까?”
“…….”
제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고 있었지만, 소리는 목 부근에서 걸리고 걸렸다. 끄르륵거리는 작은 소리가 계속 식도로 넘어가는 게 들렸다.
엘르시어는 서럽게 우는 이 왕자를 어찌 달래야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째서 우는지도 도저히 짐작되지 않았다. 혹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이러시나.
그러다 그는 서점의 문 바로 뒤에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비스듬한 어둠에 얼굴 반이 드러난 다섯째 왕자를 곧바로 식별해 냈다. 하. 젠장. 그는 간만에 욕을 삼켰다. 진짜 여기 있으면 어떡하나.
“로드, 부디……. 부디 그쳐 주십시오. 이러다 지치십니다.”
그의 정중한 위로, 혹은 정중한 요청에 제이는 오히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이 더 심하게 끅끅 넘어가기 시작했다.
엘르시어는 소리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 사이 세수를 한 건지 머리카락이 약간 젖은 위즈는 코를 훌쩍거리며 나타났다. 책 몇 권을 품에 안고 그녀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책……. 내 책……. 책…….”
“……위즈 씨,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 사람들이 그거 이름을 부르면서 내 책들을 공격했어요.”
아닐 텐데.
그래도 일단 엘르시어는 잠잠히 들었다.
“그런데 무슨 기사 나리 같은 분들이 나타나시더니 막……. 책을 지켜 주려고 하셨어요.”
“…….”
“그러다가 여기 누워 있는 손님을 데리고 온 저 손님이 뭘 어떻게 했는데 그 기사 나리 같은 두 분이 갑자기 사라지셨어요.”
위즈의 설명 순서에 따라 다섯째 왕자, 골목 벽 가까운 바닥에 누운 소사체를 본 엘르시어의 눈길이 멈추었다.
사라져?
숨을 들이켠 엘르시어가 주위를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불렀다.
“벨라 경. 애쉬포드 경.”
그 어떠한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 어디에 있나.”
“죽었어…….”
두 기사가 아닌 왕자에게서 대신 대답이 나왔다.
엘르시어는 제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제이는 흐느낌에 목이 막힌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죽었습니다, 그 두 사람.”
“…….”
“나 때문에 두 기사가 죽었어요. 후작.”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거의 말이 맞아요.”
위즈의 싸늘한 말이 들렸다.
엘르시어와 위즈의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제이를 ‘그거’로 지칭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면 확실히 실수가 아니라 의도였다.
불붙인 촛불 하나를 든 위즈는 눈물로 물든 시선으로 제이를 쏘아보았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을 돌아다니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얌전히 집에 박혀 있어야지요. 남의 소중한 사업장에 와서 이게 무슨 짓거리입니까? 저와 제 책들이 조금 전 휘말려서 죽을 뻔했어요. 불탈 뻔했다고요.”
“…….”
“제 앞에서 그 무가치한 쓰레기를 감싸지 마세요, 손님.”
아무리 위즈라 하더라도 불쾌해하기에는 충분한 저녁이었다. 책 읽는 걸 그리도 좋아하던 학자가 책을 잃을 뻔한 데다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으니 충분히.
그러나 제이의 입장에서는 위즈의 말이 몹시 신랄하고 무례하게 들릴 터다.
엘르시어는 위즈가 제이의 신분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고려했다. 아직 조금 울고 있는 제이를 힐끔 보고 가만히 말했다.
“그래서 옷이 탔군요.”
“네.”
“다리는 괜찮나요?”
“네. 바로 껐어요. 다 데려가세요. 특히, 특히, 저 특히 나쁜 손님. 서점에 불 지르려다가 지 몸에 불붙이더니 벽에 부딪히시고는 움직이질 않으시네요.”
“…….”
“아. 온느발레어를 하셨어요. 온느발레인이신가 봐요.”
그 말을 마친 위즈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엘르시어는 불에 탄 사람이 온느발레인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표정이 변했다.
* * *
항시 소지하고 있는 아티팩트로 기사들을 불러낸 엘르시어는 일단 위즈를 설득했다.
위즈에게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피와 시신 보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별생각 없이 오게 한 현장에서 기사의 뒤에 숨던 모습을 그는 기억했다. 그래서 다른 곳도 아닌 그녀의 집과 같은 서점에서 공격받은 일, 시신과 피를 목격한 일, 죽을 뻔한 일 등으로 받은 충격이 상당할 것을 염려했다.
하여 하루만이라도 쉬다 가라고, 따뜻한 물에 씻고 따뜻한 음식을 먹고 쉬다 가라고 권유했다.
설득은 거듭되었다. 그만큼 엘르시어는 그녀를 서점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어차피 서점은 아티팩트 잔해와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을 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현실은 말하지 않았다.
위즈는 그와 제이를 거부하듯 시선을 두지 않고 있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떨어뜨렸다. 코훌쩍이는 소리가 커졌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두 손 손끝이 서로를 얽었다. 그러고 나서야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왕궁에서 높으신 분들 마주치는 건 싫다 하여 클리포드 저택으로 가기로 했다.
엘르시어는 기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제이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잠긴 목소리로 나온 그 대답대로, 그는 아티팩트가 느껴지는 곳으로 가서 더듬었다. 사람의 식은 몸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옷을 뒤져서 아티팩트를 회수했다. 벨라와 애쉬포드는 차례로 나타났다. 그것을 본 제이는 손으로 눈을 쓸었다.
잠시 후 엘르시어는 급히 달려온 기사들에게 일을 분배했다. 이 현장에는 왕자가 둘이나 있었다. 다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입조심 할 것을 엄중하게 명령했다. 기사들은 경례했다.
기사 셋을 붙여 제이와 다섯째 왕자를 귀궁하게 하고, 엘르시어는 위즈와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를 잘 보살피도록 고용인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들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해 보였으나 착실하게 대답했다.
마음을 놓은 그는 곧바로 입궁하여 발롬브로사에게 알현을 청했다.
상황을 들은 발롬브로사는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조금 착잡해 했고, 많이 기뻐했다. 같은 분량만큼의 두려움을 동반한 기쁨이었다.
온느발레의 약점을 잡았으나 온느발레는 제국이기 때문이다. 자국의 방패라 불리던 전 로헤올 공작마저 잘라 버린 황제가 일개 왕국의 왕을 로헤올 공작보다 어렵게 여길 리가 없었다. 그 황제,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이 증거와 증인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온느발레를 건드리려거든 그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제국 앞에 왕실과 이하 왕국민들은 모두 평등했다. 평등하게 가소로웠다.
* * *
기사는 서점이 있는 골목 중간에 서서 멀거니 눈을 깜박였다. 다시금 얼숍을 훑다가 건진 책을 전하며 주군의 안부를 확인하러 왔던 길이었다.
그런데 그제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던 곳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접근을 차단하는 선이 있어서 더 다가갈 수도 없었다. 청년은 이대로 서서 상황을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이게 뭐야.
이 새벽에 이게 뭐야.
왜 서점에 은여우단 기사들이 드나들고 있지?
설마 각하께서 무뢰배들을 서점에서 조지셨나? 아니면 모종의 이유로 은여우단을 조지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