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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55)화 (55/120)

# 54화

구겨진 종이가 손으로부터 튕겨 나갔다. 바닥에 데구르르 구르는 것을 보며 자작은 말했다.

“괜찮으니 가져가게. 은여우단의 단장에게 신속하게 전해.”

핵심 단어가 쪽지에 적혀 있었던 이유, 대화 내용이 두루뭉술하고 주어가 왔다 갔다 했던 이유는 같았다. 지금 여기 주위에 아티팩트로 몸을 감춘 아리오의 기사가 있으리라고 남자도 자작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이는 아주 잠시 후 사라졌다.

그러나 온느발레와 연관 짓지는 못할 것이다. 아르망 페레이라는 직접 손쓰지 않았으므로. 수많은 상황을 상상하고 상상한 끝에 내린 판단이었다. 걸려 봤자 중간책 역할을 했던 아리오의 다섯째 왕자가 걸리리라.

하여간 이 나라 왕실, 개판이다.

뮤니르 자작은 이만 일어났다. 이 저녁에도 쉬지 않고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고자 했다.

단지 그는 단 한 가지가 의문이었다. 제이를 어디에서 암살하려는 건가. 설마 왕궁에서? 둘째 왕자 때처럼? 자객을 고용한 거라면 왕궁 바깥이 나을 텐데. 거기에 뒤집어씌울 힘 없는 평민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터.

* * *

기사가 가져온 쪽지를 읽고 몇 가지 질문을 한 엘르시어는 자리를 박찼다.

뛰었다.

체면도 무엇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이를 사리물었다. 악문 잇새로 긴장 섞인 분노 같은 게 새어 나왔다. 파삭파삭 무너지는 조각들이 온몸을 찌르는 것처럼 미약한 불편함이 있었다.

왕자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머리는 곤두서는데,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 살해당할 사람이 한 명이 더 있다.

지금 제이는 서점에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서점에는 위즈가 있다.

위즈가.

[손님이세요? 책은 안 파는데!]

그 사람이.

은여우단 기사들을 위한 목마장으로 뛰어가는 내내 엘르시어의 심장이 요동쳤다.

말 한 마리에 올라탄 엘르시어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목마장까지 달려온 기사를 사신단의 거처로 돌려보냈다.

쪽지 내용대로라면 다섯째 왕자가 주범이었다. 현재로서는 페레이라를 엮을 증거가 없었다. 다섯째 왕자에게 물으면 페레이라가 나올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일개 기사에게 섣불리 보일 현장이 아니었다.

말굽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귓전을 바람이 멈추지 않고 때렸다. 엘르시어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최악의 상상만이 끝이 없이 떠올랐다.

피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처럼 활기찬 사람이 흐리게 꺼져 있는 광경이.

엘르시어는 말 위에서 희미하게 떨리는 숨을 흘렸다.

어떡하나.

그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나.

그리고 이건 분명 처음 겪는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 * *

검은 차림의 남자가 구겨지고, 무너졌다.

털썩. 시신이 땅과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웅덩이에 피 떨어지는 소리가 똑, 똑, 명쾌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도록 잔잔한 소리였다.

시신들 사이의 그 침묵 사이에서 칼은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며 회수되었다.

위즈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

쓰러져 있는 죽음 사이에서 그녀는 그녀 자체로 이질적으로 고요했다.

쓰러진 책장에서 쏟아져 내린 책들이 발치에 걸렸다. 그 책장 위에 널브러져 있는 시신을 위즈는 칼끝으로 툭 쳤다.

그녀는 여태 등 뒤에 지고 지키고 있던 주방 앞에서 벗어났다.

제이가 그녀를 따라 주방에서 나오려 했지만, 위즈는 그의 손목을 잡고 제지했다. 나오지 말라 하는 제지였다. 제이는 잘 보이지 않는 그녀의 압박에 주춤했다.

촛불도 없어 서점 안이 완전히 캄캄했음에도 위즈는 서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닫힌 문 바로 바깥에 있던 남자는 그 걸음 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정신을 잃은 다섯째 왕자를 서점에 풀어놓고 바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었는데도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바깥에 굴러나와 활활 타고 있는 조각상을 서점 안에 다시 굴려 넣는 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도.

지금까지도.

위즈의 손에 의해 문이 열리는 이 순간까지도.

달빛이 들어왔다.

피 냄새 나는 서점을 등진 위즈와 달을 등진 남자는 눈이 마주쳤다. 코앞에서 마주한 얼굴에는 튄 피가 붉게 선명했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남자는 마침내 환상에서 깨어났다.

온느발레에서 현 황제 나네트에 능히 대적할 자가 더는 없다는 환상.

젊은 남자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이 얼굴…….

이 얼굴…….

아니, 아니.

아니. 이 얼굴……, 이 얼굴이 왜. 왜.

[실은 죽지 않았든지, 자작의 그분께서 정신이 나가셨든지.]

아니, 설마.

설마.

남자는 뮌제의 지휘를 받으며 몸에 익히게 된 반사신경으로 검을 빼 들었다. 그의 검이 위즈의 목을 찌를 것처럼 그녀를 향해 접근했다. 그에 반해 위즈의 검은 축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내려…….”

목이 졸리는 것 같아서,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목소리가 온전하게 나오지 않았다.

남자에게 뮌제 로헤올은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자는 뮌제 로헤올이어서는 안 되었다. 남자는 침으로 목을 적신 뒤 다시 말했다.

“무기를 버려.”

그러자 위즈의 손에서 자객의 검이 떨어졌다. 챙그랑.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눈높이까지 들었다. 순순한 투항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제이가 경악했다.

“위즈 씨!”

“……위즈? 위즈라고?”

뮌제 로헤올이 아닌 건가?

그런 희망에 잡혔다.

남자는 목덜미에 돋아난 소름을 느끼며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분……. 그분이 아닌 건가.”

“…….”

“대답해! 넌 뮌제 로헤올 그 여자가 아닌 건가!”

그 순간 무엇이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녀의 눈꺼풀이 아주 조금 내려갔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나. 정말 모르겠다. 두 손을 들고 있는 위즈의 눈이 나른한 빛을 띠었고, 달그림자가 진 그 연한 회색 눈동자에 드디어 남자의 신경이 미쳤다.

남자는 그 순간 숨을 멈추었다.

사람 대부분이 사람의 눈동자 색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는 뮌제 로헤올의 눈을 기억했다. 정확히는 황제의 눈동자 색을 기억했고, 황제와 뮌제 로헤올이 전혀 다른 색을 가졌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황제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황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건대, 이 연회색 눈은…….

“몰상식의 극치다.”

그 잔잔한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남자는 움찔했다.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머리에 현기증이 났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의 얼굴로, 마치 뮌제 로헤올인 것처럼 손쉽게 자객들을 처리한 이 여자는 다시금 나직하게 물었다.

“네 주인의 밀령인가? 감히 황제에게 대적한 제이 왕자를 죽이고 아리오 왕실을 어지럽히라고?”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해 낸 이 사람의 목소리.

권력자들의 정치적 판단이 어디까지 가혹해질 수 있는지 아는 이 사람의 목소리.

로헤올의 공작, 루미나리에단 단장, 황제가 가장 경계했을 정도로 이름 높았던, 조용한 황실 방계, 뮌제 로헤올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오랜 버릇으로 압도당했다.

그는 저 나긋하고도 담담한 음성을 몇 번이고 들었었다. 마법사가 앞에 있을 때 전 로헤올 공작은 거의 항상 저랬다. 저리 고요하고 느긋하게 분노했다.

죽은 사람이 그의 앞에 있었다.

“로, 헤올…….”

뮌제 로헤올이 살아 돌아왔다.

극심한 공포에 쥐어 잡혔다.

신음처럼 새어 나온 이름을 들은 위즈의 얼굴에 찬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야릇한 눈으로 그를 보던 위즈가 희미하게 웃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경의 주군이 경에게 좋지 않은 걸 가르쳤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화르륵,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불길이 남자에게로 쏘아져 들어갔다.

설마 그가 보낸 아티팩트를 조종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그가 알기로 그건 마법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자가 충분히 경악할 새도 없었다.

마치 용이 포효하듯 입을 벌린 불길은 단숨에 남자를 뒤로 끌고 가며 집어삼켰다.

엄청난 힘이었다. 벽에 등을 부딪힌 남자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흘렸다.

“컥.”

뮌제는 턱을 천천히 조금 들었다. 제게서 떨어져 골목 벽에 등 댄 채로 불타고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체면이고 품위고 상관없었다. 뮌제 로헤올은 떠올리지도 못할 언행을 하는 데에 거침없었다. 바보가 되기로 했다. 그 누구에게도 그녀를 이상히 여길 빌미를 주지 않고 정보를 모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모습을 하든 괜찮았다.

그렇게 탄생한 위즈였다.

그 모습으로 일개 귀족에게 평민이 까분다며 구타당해도 위즈는 감수해 왔다.

그러나 지금, 뮌제는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목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불은 오로지 남자의 몸만을 태우며 고문하고 있었다. 전 공작은 옛 수하를 아주 손쉽게 제압했다.

불길만큼이나 차분한 음성으로 전 공작은 말했다.

“내 기꺼이 로헤올까지 넘겨 주었다 하나 나를 아는 자에게 기꺼이 멸시당할 정도로 마음 넓지는 않다.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큭. 크흑.”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남자의 목을 전 공작은 더 지그시 밟았다.

“네 주군이 날 존중하지 않았다는 게 네놈이 날 함부로 불러도 된다는 뜻이 되지는 못한다. 네가 네 주군과 동급이었던 적 있더냐. 아니면 네가 나와 동급이었던 적 한 번이라도 있었더냐.”

“…….”

“말해라. 황제가 내게서 너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으냐?”

황제라는 말이 나오자 고통에 저물어 가던 남자의 눈이 커졌다.

뮌제 로헤올은 웃기 직전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전 로헤올 공작이 아는 한 이 남자는 비밀리에 황제를 위해 움직이는 자였다.

이 정도 정보를 설마 대귀족 가문의 가주들이 모를 리가. 알면서도 조용히 지켜보는 자들이 저희 소수의 가주들, 별들의 별. 별 위의 별이었다.

황제가 로헤올을 쳐내자 대귀족 가문들도 별 것 없는 것처럼 보이던가. 이따위 일개 귀족이 이런 식으로 무시할 수 있는 가문들이 결코 아닌데.

가소로운 것을 내려다보다가, 전 공작은 죽기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품위와 다정한 위엄으로 물었다.

“감히 나네트가, 내게서?”

감히 황제의 존함을 부르는 것에 로헤올 전 공작은 기탄이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신경이 미칠 정도로 남자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지를 못했다.

불에 타들어 가는 데에 더해 목을 밟혀 호흡까지 부족한 남자에게 전 공작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국을 통치하는 자가 한 정치적 판단이란 게 몰상식의 극치다. 상대를 진탕에 절이는 걸 좋아하니 그게 과연 성군이 가질 성정인가.”

“허, 어으…….”

남자를 태우는 불의 그림자가 화르륵 화르륵 일렁이는 얼굴. 불처럼 차갑고 하얬고 어두웠다.

남자의 눈이 뒤집혔다.

전 로헤올 공작은 무감한 눈으로 다리에 무게를 실었다. 우득. 목이 부러진 남자는 더 고통받지 않고 사망했다. 자비와 은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치마 끝에 불이 옮겨붙었다. 그야말로 마침내.

그런 세심한 조절을 아티팩트를 쓰는 비마법사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을 가질 사람이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타들어가는 치마를 그대로 두고, 뮌제는 불타는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이 순간 온느발레의 귀족을 아리오의 땅에서 죽였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 로헤올 공작은 제 얼굴을 알고 정체를 분별해 낸 이를 살려 보낼 수 없었으며, 또한, 이 수작이 역겹기도 역겨웠다.

정확한 계획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고, 거의 모든 게 추측에 불과하지만, 온느발레가 무슨 술수를 부렸다는 건 확실했다.

온느발레가 이 일에서 순조로이 빠져나가게 둘 것 같으냐.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기묘하게 탄 시신을 남기고 모든 불이 사라졌다.

아리오의 안위에 크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중앙탑의 부탑주 지위를 내려놓는 과정에서 온느발레와 아리오를 기꺼이 끌고 들어왔던 일처럼, 두 국가 간 관계가 어떻게 되든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다만 적어도, 온느발레가 그네들 계획대로 아무 책임 없이 순조롭게 빠지게는 두지 않겠다. 수작을 부렸으면 한 번쯤은 책임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려 봐야지.

대신 그녀가 본디 원했던 대로 온느발레 사신단이 아리오에서 빠르게 철수하는 일은 이제 일어나기 힘들겠지만.

얼굴 식별이 가능한 시신으로 기회는 만들어 주었으니 어디 한번 잘 이용해 보거나, 이대로 무시하고 누군가를, 가장 손쉽게는 위즈라는 평민을 온느발레 귀족 살해범으로 몰아세우든가, 아니면 아예 이 시신을 숨겨 버리든가.

이 시신을 어찌 이용할지는 아리오에게 달려 있었다. 그녀가 할 일은 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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