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54)화 (54/120)

# 53화

“……뭐하냐.”

쇼리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과 위즈를 번갈아 보고는 물었다.

위즈는 고통으로 인해 조금 작아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뭘 던지려 하니까 놀랐잖아요. 아, 깜짝이야…….”

“…….”

놀란 것 반, 어이없는 것 반. 제이와 쇼리는 침묵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로 바닥에 누운 위즈는 더 움츠리며 제 등 뒤의 작은 조각상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물었다.

“그거 뭐예요?”

“조각상이잖아.”

“아. 그래요?”

위즈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조각상을 돌아보았다.

“오……. 누가 줬는데요?”

“그냥 어떤 사람.”

“거 대답 한번 똑 부러지게 하시네. 당신도 어떤 사람이잖아요.”

쇼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딱히 혈압이 올라 부글거리는 건 아니었다. 진짜로.

“어떤 남자. 잡동사니 길 입구에서 만났어. 입성을 보니 귀족인 것 같던데.”

“알겠어요. 평민인 어떤 남자 씨. 손님이신가요? 책은 안 파는데.”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용건도 끝났겠다, 그는 그냥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아마도 이 서점의 손님일 제이에게는 그저 눈인사를 남겼다. 다른 때라면 그냥 갔겠지만 조금 전 그가 먼저 말을 걸었던지라.

제이는 이제는 조각상을 피해 꾸물꾸물 위로 기어가기 시작한 위즈를 보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왕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거…….”

마법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 아티팩트인데.

그 사이 조각상에게서 충분히 멀어진 위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이제 놓으시는 게…….”

“예?”

“그거 아티팩트예요. 불이 담긴 건데…….”

제이는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다시 바닥에 놓았다.

긴장으로 일어선 왕자가 불꽃 모양의 하얀 조각상에게서 멀어지자, 위즈는 비로소 책 한 권에서 책장 몇 장을 찢었다. 가치 엄청난 고서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제이가 경악할 새도, 말릴 새도 없었다.

서점 주인은 그 책장을 빗자루와 쓰레받기 삼아 조각상을 주워 들었다.

그녀는 조각상이 자신의 살갗에 닿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천천히. 신중하게. 미니가 죽은 자리에서 흰 꽃이 손에 닿자마자 은여우단을 돕는 것을 철회하고 그곳에서 멀어진 것처럼.

“…….”

위즈는 갑자기 커져서 제 앞머리를 태운 불을 올려다보았다. 참…….

“위즈 씨!”

얼어붙어 있던 제이가 외쳤다.

흠칫한 위즈는 조각상을 문 쪽으로 휙 내던졌다. 바닥에 슬슬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서점 쪽으로 접근하는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 사람들은 뭔가.

위즈는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서 피어나는 꽃을 확인했다. 중앙탑의 끼북이가 아니라 뮌제 로헤올의 꽃이었다. 기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총체적 난국이었다.

거짓말처럼 일이 이것저것 한번에 일어났다.

초를 켜지 않아 아직은 어두운 서점.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진 그녀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살짝 후회했다. 아까 아티팩트에 닿지 않기 위해 피할 때 어떻게 다리든 팔이든 휘둘러서 제이를 기절시킬걸.

이를 어찌한다…….

일단 문을 열고 조각상을 발로 찼다. 꺼지지 않을 화려한 불이 바깥으로 굴러나갔다.

* * *

제이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어쩌고.

제이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어쩌고.

표면적인 일정은 애저녁에 끝났다.

아르망 페레이라가 도대체 무슨 자존심으로 여전히 아리오에 남아 있기를 택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계속 생각하는 점이지만 뮤니르 자작 역시 온느발레의 귀족이므로.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거라면 차라리 돌아가는 게 더 면이 서지 않을까 싶었다. 은여우단의 대답을 아직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사신단 전부가 아리오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슬슬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나서서 페레이라 백작을 종용할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의감은 ‘피치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아르망이 그를 만나러 왔다.

“더 할 수 있는 일도, 할 일도 없으니 이만 귀국하는 게 좋겠네. 최대한 빠르게.”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선선히 수긍하면서도 뮤니르 자작은 아르망 페레이라가 이렇게 조용히 떠날 이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왕국은 제국의 귀족에게 손톱만큼의 수작을 부려도 보복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이 자존심 강한 백작이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리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철수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뮤니르 자작에게 넌지시 알려 주지도 않았으니, 지금부터 일으킬 일이 백작의 약점이 될 만큼 상당히 위험한 일이겠구나 싶었다.

근데 그게 제이를 암살하는 것일지는 몰랐지.

“…….”

하늘이 보랏빛 섞인 파란색으로 물든 시간에 웬 온느발레 귀족이 찾아오더니, 그 귀족이 아르망의 계획을 알려 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마도 아르망의 계획일 듯한’ 암살 계획을.

요양을 핑계로 사신단보다 먼저 아리오에 와 있던 이 남자는 여태 아르망의 지근거리에서 아르망을 도와 왔다. 이 암살 계획을 알고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계획 자체가 갑작스럽고 충격적이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귀족의 발고가 훨씬 더 갑작스러웠다.

뮤니르 자작은 남자가 건넨 종이 안 내용을 보자마자 종이를 구겨 버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걸 내게 알리는 이유는?”

“저는 여기서 페레이라 백작을 돕고는 있습니다만, 사실 다른 분의 명령으로 여기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일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

여태 아르망의 측근처럼 굴어 오더니?

이 사람, 비단 여기 아리오에서만이 아니라 온느발레에서도 아르망과 가까웠던 자가 아닌가. 이 사람에게 그분이라 불릴 사람이 있나?

그러나 자작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짚지 않았다.

“그래서 나보고 경이 ‘우연히’ 알게 된 이 ‘왕자의 계획’을 막아 달라고?”

“막아 달라기보다는 은여우단에라도 넌지시 알려 주시라는 겁니다. 자작께서는 은여우단과 친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난데없이 제가 가서 말하는 것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겠지요.”

은여우단과 접촉했던 일 자체는 알려져도 상관없었다. 은여우단의 탑까지 가는 길은, 애시당초 그리 은밀하게 움직였던 것도 아니었다.

자작은 크게 불쾌해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럼 페레이라 백작께 말해 보지 그랬나.”

정확히는, 페레이라 백작을 직접 막아 세워 보지 그랬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가느다랗게 미소했다.

“조금 전 말씀드렸다시피 은여우단과 친분 있으신 분은 자작이신 데다가, 무엇보다, 그분과 그분의 의중에 대해서는 백작께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백작께서는 제가 백작의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계시면 됩니다.”

“그럼 내게는 사실을 말해도 되고?”

“저는 자작께서 어째서 은여우단의 단장을 만나셨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검지가 한 번 탁, 팔걸이 끝을 두드렸다. 턱을 조금 든 그는 남자에게 더 말해 보라는 듯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남자는 말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저의 그분과 당신의 그분은 한배를 탔다는 게 통설이지요.”

“…….”

“잊으셨습니까? 전 전前 루미나리에단 기사입니다.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방법을 꽤 잘 압니다. 이런 정보 수집을 위해 그분이 제게 기꺼이 내어 주신 아티팩트들입니다.”

살짝 입을 벌린 자작은 입안을 혀로 둥글게 훑으며 고개를 잠시 옆으로 돌렸다. 그는 희미하게 노한 기색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경이 감히.”

“하필이면 작고한 이와 같은 눈동자 색을 지닌 데다 하필이면 아티팩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하필이면 뮤니르에서 찾고 있다면, 셋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실은 죽지 않았든지, 이게 자작의 독단이라면 자작이 정신이 나가셨든지, 그게 아니라 자작의 그분의 명령이라면 자작의 그분께서 정신이 나가셨든지.”

“혀.”

“심기를 어지럽히고자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호의를 베풀고 있습니다. 그저 일방적으로 자작을 압박할 수도 있었는데 제 것도 드렸으니까요.”

“…….”

“제가 자작의 것 하나, 자작께서 저의 것 하나를 가지셨으니 이제 부디 저를 믿고 움직여 주셨으면 합니다.”

“……못 들은 모양인데.”

자작은 짧은 한숨을 쉬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주먹이 남자의 가슴을 세게 쳤다. 막지 못한 남자는 갑작스러운 고통을 맞이하고는 입을 벌렸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자작은 다시 말했다.

“혀.”

“어윽.”

“경의 그분이 뒤에 계셔도 경보다 신분 높은 이에게 그따위로 오만방자하게 굴어서는 안 되네. 특히나 경의 그분만큼이나 대단한 분에 대해 말할 때는.”

한미한 가문 방계에 불과한 자가 황제를 믿고 감히 나대는 것을 그저 볼 정도로, 자작은 온화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하극상을 경계했다. 특히나 윌리엄 로헤올이 뮌제 로헤올을 축출한 것을 본 이후로. 그게 순순히 축출당한 뮌제 로헤올의 잘못이라 하더라도.

자작은 주먹을 거두고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한 가지 묻겠네. 굳이 아리오에 알릴 필요 없이 경이 현장에서 조용히 못 막겠나?”

남자는 극심한 고통에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작은 심기 편치 않은 얼굴로라도 쓴웃음을 지었다. 기다려 주겠다는 온화함이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그런 식으로……, 아리오에 빌미를 주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흐. 일을 막으러 갔음에도 제가 온느발레 귀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악의적으로 엮어 소문을 생성해 낼 자들이지요. 아리오는 본디 교활한 족속 아닙니까…….”

방구석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환청이었으면 좋겠지만, 환청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이 남자를 막을까 했다가 자작은 혀를 찼다.

이미 빡친 것 같으니 그냥 두자.

“그리고 저는 마법사들과 아티팩트를 상대해 왔지, 자객을 상대한 적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천한 기술을 굳이 경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일단 알겠네. 알려 줘서 고마워.”

“…….”

남자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한 번 까닥였다.

일어나는 남자에게 뮤니르 자작은 불쑥 물었다.

“경. 그분이 경을 믿고 계시나?”

“그럴 리가요. 그분은 아무도 믿지 않으실 겁니다.”

“…….”

“더군다나 저는 한때나마 루미나리에단에서 전 로헤올 공작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사람이니까요.”

한 번이라도 남의 손을 탄 자를 믿기는 쉽지 않을 터다. 그것도, 죽여 버린 뮌제 로헤올이 이끄는 루미나리에단에 근무했던 귀족이라면.

자작은 불신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황제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젊은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좋지, 사랑. 경애. 푹 잠기고 싶게도 만드는 감정이지.

가엾고도 어리석기는.

흥미가 사라진 자작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내용을 보지 못하게 곧바로 구겨 버린 종이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를 어찌한다?

그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페레이라 백작이 헛짓거리 못 하도록 저 남자를 보냈다는 말이지…….

아르망은 황제의 최측근은 아니라 하더라도 측근으로는 분류되는 귀족이었다. 그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지나친 불신이었다.

……하기야 로헤올 공작도 죽여 버린 분이니.

자작은 포기하듯 수긍했다. 그리고 황제와 저 남자, 아르망을 계속 생각했다. 남자가 한 말도 놓치지 않고 되씹었다.

[그분은 이 일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길 원치 않으십니다.]

그리고, 아르망이 죽은 둘째 왕자와 접촉했었던 일도 떠올렸다.

“…….”

이를 어찌한다.

두루뭉술했던 대화 내용을 곱씹는 그의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뮤니르 자작은 조금 전 그 남자를 믿지 않았다. 아르망 페레이라도 믿지 않았다. 황제도 믿지 않았다. 저 남자는 몰라도 아르망과 황제는 교활하고 영리한 사람들이다.

자작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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