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그런 영웅들이 시대를 거쳐 한 명씩 나타났다. 모두 마법사였다. 세상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영웅들은 기꺼이 목숨을 던졌다.
모든 사람이 성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하여 죽었고, 어떤 사람은 약해진 악마에게 삼켜져 회복의 발판이 되었다.
살해에 성공한 자만이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가운데, 어찌 되었든 영웅들이 던진 목숨으로 악마들은 하나둘 처단당했다.
죽은 영웅의 손에 있는 어떤 심장은 초록색이었고, 어떤 심장은 새파란 색이었고, 어떤 심장은 갈색이었고, 어떤 심장은 또다시 갈색이었다. 전부 아름답게 빛나다가 꺼졌다. 색이 사라져 원래의 색으로 돌아온 심장은 평범하게 썩어 들어가는 근육 덩어리였다.
세상에는 마지막으로 악마 하나가 남았다.
세상에 홀로 남은 그 악마는 자신의 처지를 직시했다. 인세에 너무 오래 나와 있어서 꽤 약해져 있었다. 인간들에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그 가소로운 배신자 같은 쥐새끼들은 악마들이 약해져 있지 않았다면 그 어떤 생명을 걸어도 악마를 죽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세에서 벗어나거나 힘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느낀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러나 태어난 곳에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힘을 키우고자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찾아낸 것은 로헤올이었다.
* * *
악마는 로헤올의 육신을 원했다.
정확히는 어려서 삼키기 쉬운, 그럼에도 악마의 요술과 비슷한 힘까지 가진 로헤올의 육신을.
더 정확히는, 뮌제 로헤올의 육신을.
어리지만 특출나게 강했던 마법사는 습격당했다.
아무리 악마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마법은 결국 악마로부터 비롯된 힘이었다. 경험 없는 어린 마법사가 힘의 시조와 같은 자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는 어려웠다. 뮌제는 약간 동등하지 못한 수준에서 공격당하여 많이 다쳤다.
[아하하학! 이거 물건이네! 프핫! 꿈틀거리는 것 조, 옴……!]
단검은 악마의 몸에 쑥 들어갔다.
지쳐 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뮌제 로헤올이 보이지 않게 꺼낸 무기였다. 튕겨 오르듯 반쯤 일어선 뮌제는 악마의 하복부를 비스듬하게 찔러 올렸다.
예상하지 못했던 고통으로 인해 악마의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싸가지 없는 쥐새끼가…….]
뮌제는 그 단검을 놓고 물러났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악마는 쥐처럼 약삭빠르게 피해 다녔다. 여기가 베이고, 저기가 베이고, 여기저기 베여 가면서도 끈질기게 피했다. 악마가 쓰는 마법 같은 것은 점점 약해져서, 뮌제가 막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악마는 목과 몸통이 잘려 두 동강이 나도 달아나 회복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 세상에서 악마를 완전히 죽일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뮌제는 그것을 알았다. 심하게 부상하여 악마만큼이나 피를 흘리고 있는 뮌제는 기꺼이 악마의 심장을 도려냈다.
손안에 쥔 그 역겨운 근육에서는 인간의 것과 같은 색의 피가 줄줄 떨어졌다.
꽃이 가득 피어나 떨어진 길. 이 바닥을 기고 있는 악마가 심장과 함께 도망치기 전에 뮌제는 연금술을 결합한 마법을 시동하고자 했다.
악마가 죽기 직전이었다.
[가지 마.]
정말 직전이었다. 마지막 악마의 심장은 연회색으로 물들 수도 있었다.
정말, 그럴 수도 있었다.
[가지 마.]
뮌제에게는 역대 영웅이 가진 사명감이나 복수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갑자기 습격당하여 어쩔 수 없이 전투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동반 자살과도 같은 이런 일을 각오했던 적이 없었다.
[내가 널 잃게 하지 마.]
생명을 걸고 악마를 기필코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에 맴돈 건 오로지 라파엘과 한 약속이었다.
악마는 그 머뭇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제 육신의 심장이 죽기 전 영혼의 모양으로 도주하였다. 본래의 육신이라는 미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다. 애초에 뮌제 로헤올의 육신을 빼앗기 위해서 온 것이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일단은 살아야 할 것 아니던가. 다른 육신에 정착해야 했다.
다른 육신을 삼켜 힘을 키우고, 그리고, 그리고 뮌제 로헤올에게 복수해야 했다. 한순간이라도 그 인간 따위에게 압도당하였다는 사실,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었다.
그래서 어찌했느냐 하면.
약해서 쓸모없는 윌리엄의 육신을 빼앗았다.
꼴에 정신력이 약하지는 않은 놈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기어이 주도권을 잡았다. 아직은 윌리엄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에 정신이 동요하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피범벅이 되어서도 어찌어찌 돌아온 뮌제에게 윌리엄은 부모의 피가 묻은 창백한 얼굴로 히죽 웃었다.
[나 알아보겠어? 재미있지?]
성공적인 복수의 개막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악마는 윌리엄에게 주도권을 넘기고 숨었다. 중상인지라 이만큼 윌리엄을 조종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다 보고 있었던 윌리엄은 눈물과 함께 쓰러졌다. 넋을 잃고 서 있던 뮌제는 제게로 쓰러지는 그 몸을 받고 함께 흘러내려 무릎 꿇었다.
그녀는 부모의 시신이 있는 그 방에서 윌리엄을 안고 펑펑 울었다. 내 죄다. 나 때문이야.
그날.
뮌제가 죄인인 두 존재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하고 경멸하기 시작한 그날.
윌리엄에게 본격적으로 죄인이 된 날.
그날, 뮌제는 로헤올 공작이 되었다.
윌리엄이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졌다. 마법에 의해 사고사한 공작 부부의 장례식에서 많은 이가 비통해했다. 그 장례식에서 뮌제는 윌리엄이 있어 울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죄책감에 숨넘어가려 하는 윌리엄의 앞에서 울었다가는 윌리엄의 상태가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공작이 된 뮌제는 윌리엄에게서 그것을 떼어 낼 방법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정확히는, 윌리엄을 죽이지 않고 그것을 떼어 낼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윌리엄의 심장을 뽑아 그녀의 생명을 넘기면 그것은 죽는다. 윌리엄이 죽고 그녀가 죽고 악마가 죽는 것이다.
악마를 죽이기 위해 자신이 죽는 것이야 이제 각오했다. 그러나 가엾은 윌리엄은 살려야지. 내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는데 윌리엄은 살아야지.
[버텨. 윌리엄. 버텨 줘.]
어릴 적부터 가져 온 책임에 더해진 이 죄책감, 이 짐이 무거워 힘들어 죽을 것 같지만, 윌리엄, 내게 양심이 있다면 네 앞에서 그런 내색은 하면 안 돼.
[내가 반드시 널 살릴게. 무슨 일을 해서라도 반드시 널 살릴게. 약속할게.]
다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그것에게 먹히지 마. 빌, 넌 강해. 할 수 있어. 버텨. 버텨 줘.]
[버틸게. 버틸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뮌제.]
다 나 때문이야, 윌리엄.
* * *
위즈는 책을 덮었다.
제목은 그리도 희망을 주더니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도움 될 내용이겠으나 적어도 그녀에게는 조금도 도움 되지 않았다.
시간이 없는데.
시간이…….
“…….”
그녀는 멍하게 앉아 있다가 무겁게 일어났다. 조금 전에 다 읽은 책을 들고 위즈는 책장을 둘러보았다. 이 책을 넣을 곳이 없이 빽빽하게 꽉 차 있었다. 간절하게 입수한 이 많은 책 전부가 쓸모없을 수 있다니 이 또한 기적이다.
위즈는 눈높이에 꽂힌 어느 책 위에 이마를 박았다.
두 팔이 축 늘어졌다.
되는 일이 없다.
황제가 아직 페레이라를 부르지 않았는지 페레이라가 이끄는 온느발레의 사신단은 아직도 아리오에 눌러앉아 있고, 시간은 없다.
위즈의 입술 사이로 끓는 듯한 숨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없는데.
“…….”
한동안 감겨 있던 눈꺼풀은 조용히 뜨였다.
또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는 위즈였다.
위즈는 책장에서 책을 빼냈다. 책 대여섯 권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서점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는 비명이 나왔다.
“응악!”
손에 들고 있던 책이 떨어져 퍽 하고 마지막 소리를 냈다. 위즈는 주저앉았다.
제이는 들어오자마자 들린 절박한 비명에 놀랐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가며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위즈 씨? 위즈 씨?!”
“바알……. 발등……. 흐그그극.”
“…….”
쪼그려 앉은 위즈는 신발 위로 발등을 누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멍하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제이는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괜찮습니까? 어디 봐요.”
“갠찮…….”
“…….”
괜찮다는 사람치고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는 데다가 발음까지 새고 있는데.
살짝 눈물에 젖은 눈이 올라왔다.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말했다.
“손님이신가요? 책은 안 팔아요.”
“압니다. 저는 제이라고 해요. 어제도 왔고, 그제도 왔었어요. 몇 번이나 왔었어요.”
아주 약간 실망한 제이가 익숙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러자 위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미간을 좁히고 물끄러미 제이를 보던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셔, 셧업 씨라고 하셨던가요? 기억이 안 나는데.”
“…….”
“손님이신가요?”
제이는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침을 삼켰다. 한 마디도 되지 않게 짧디짧은 한숨을 조용히 툭 뱉었다. 가슴이 무거웠다.
“그런 식으로 하면 절대 기억 못 합니다.”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제이는 흠칫 놀랐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어떻게, 언제 들어왔지? 서점의 문은 움직일 때 대체로 소리가 났다. 게다가 위즈는 제이의 등 뒤에 누가 서 있다는 걸 다 보았을 텐데도 티 내지 않았었다. 눈이라도 굴릴 법한데도. 덕분에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던 제이는 놀란 눈을 깜박거렸다.
한심해하는 얼굴로 위즈를 보고 있던 남자는 제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별건 아니지만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안녕, 위즈.”
“안녕하세요. 손님이신가요? 책은 안 파는데.”
“내 이름은 쇼리.”
“네, 쇼하고있네 씨.”
“내 이름은 쇼리.”
“네, 쇼생크탈출 씨.”
주먹을 꽉 쥐었다가 푼 쇼리는 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소개했다.
“아비게일에게 고백하고 싶어하는 쇼리.”
“아, 그, 반년마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는 그 쇼핑 씨?”
“…….”
“그래, 그래! 기억나요! 항상 앞날 깜깜한데도 항상 굳이 시도하고 싶어 하시는 그 쇼핑 씨 맞으시죠!”
“……개새…….”
쇼리는 자신이 이 상황을 유도했음에도 혈압이 오르는 걸 느꼈다.
참지 못한 욕설이 새어나갔으나 목이 메어서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발굴해낼 수 있는 게 쇼리가 아니라 쇼핑이라니 더 빡치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쇼핑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그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 위즈는 발랄하게 말했다.
“어쨌든, 무슨 일이세요, 분명 한 달 내로 압생트 씨에게 차이고 우실 쇼핑 씨.”
“응. 일 초마다 사람 까먹고 목숨 까먹는 자식아. 죽을래? 하하.”
“아휴.”
칭찬이 아닐 텐데……. 부끄러워하는 위즈를 본 제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쇼리는 마왕을 물리칠 새 힘을 얻은 것처럼 한 손을 올렸다, 부들거리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씨근덕거리는 청년은 고민했다. 죽일까. 역시 죽일까. 아니면 처치할까. 하지만 이러다 항상 당하는 건 나였는데. 하지만 죽일까.
전사의 투지가 오르고 있는 쇼리를 진정시킨 이는 가해자였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저 뻔뻔함. 독보적이다. 저 쓸데없는 데서 특별한 자식.
하지만 발을 다친 모양인지 앓고 있던 모습을 보았으므로, 쇼리는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오늘만 넘어가 주지, 뭐. 이것은 절대로 반대로 당할 게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것을 들어 올려 보였다.
“이거.”
“어?”
“누가 전해 달라더라.”
그녀를 향해 던지듯 건넸다.
두 손안에 잘 착지할 거라 생각했다. 거리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위즈는 무슨 경기라도 하듯 화들짝 옆으로 몸을 물리고 굴렀다. 그 바람에 책장에 박치기까지 했다. 이마를 감싸고 끙끙 앓는 소리가 서점에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