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딱.
사탕이 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발랄한 소리였다.
그러나 제이는 그녀가 웃기 바로 직전, 그녀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간 표정에 사로잡혔다.
권태로운 듯, 아니면 피곤한 듯, 눈꺼풀과 눈길을 조금 내린 그 얼굴은 그가 그리워해 온 친구의 얼굴이었다.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떨어진 것처럼 스르르 섬세하게 내려간, 그 얼굴. 아는 사람만 알 순간적인 얼굴이었다.
다음 표정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같은 표정이라 얼굴의 주인조차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본능적인 표정.
위즈에게 로헤올 공작이 덧씌워지듯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너무 빠르게 사라졌다.
눈앞의 위즈가 웃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의 기억 속 뮌제는 저렇게 품위 없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짓지 않았다.
위즈는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헤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손님.”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사탕 때문에 뭉개진 발음이었다. 그러자 위즈는 우물우물 사탕을 왼쪽 볼 아래로 몰아넣고 나서 말했다.
“되게 말 많으시네요.”
“…….”
발음이 깔끔했다.
엘르시어는 문을 연 직후 그 말을 들었고, 바로 입가를 가렸다. 순간 제압할 수 없을 정도로 확 터진 웃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자에 대한 예의로 뒤돌아 눈을 감았다.
위즈는 제이 너머로 엘르시어의 등이 떨리는 걸 보고 눈을 깜박거렸다.
“손님이싱가요? 채근 안 파는데!”
“거, 후작, 웃으려면 그냥 웃어요.”
카운터에 팔꿈치를 기대고 문 쪽을 돌아본 제이가 느긋하게 말했다.
엘르시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뚝 그치는 기적을 경험했다. 그는 마른 얼굴로 왕자를 마주했다. 그게 더 웃겼던 제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 시간에 여긴 웬일입니까? 아, 퇴근할 시간인가. 바빠서 요즘 계속 야근하시는 것 같더니? 조금 한가해졌습니까?”
“다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아……. 나 때문에 오셨군.”
제이는 바로 기민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엘르시어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고 미소지은 채로 그저 서 있었다. 왕자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기야 오늘은 너무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정말 제이를 데려가기 위해서 왔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엘르시어는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때라면 모를까, 현재로서는 왕자 한 명을 환궁시키기 위해 굳이 직접 움직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여기까지 온 다른 이유가 있을 터다.
과연 엘르시어는 위즈에게 인사한 제이가 문으로 향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내심 혀를 찬 제이는 후작을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같이 가지 않으시오?”
“죄송합니다. 확인해야 할 책이 있어서 조금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하. 그런 거라면 뭐. 그래요. 나중에 봅시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한 제이는 선뜻 서점을 나갔다.
위즈는 카운터 옆에 세워 둔 쓰레기통으로 허리를 굽혔다. 사탕이 떨어졌다. 그리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뱉는 모습에 엘르시어가 놀란 건 당연했다.
“왜……. 괜찮습니까?”
“…….”
위즈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건성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엘르시어는 망설이지 않았다.
* * *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
제이는 건달이라도 된 것처럼 터덜터덜 걸었다. 고귀한 신분인 자의 하얀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눈은 줄곧 이리저리 움직였다.
[되게 말 많으시네요.]
오늘 위즈에게서 들을 수 있었던 평범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와의 대화를 피하고자 끊임없이 군것질하는 것 같다는 짐작은 하고 있다. 제대로 된 발음으로 하는 말을 들어 본 것도 처음 만났을 때와 엘르시어를 통해 소개받았을 때, 그리고 오늘뿐이었다.
그러나 때마다 생각하기로, 위즈가 구사하는 아리오어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문법도, 사소하게 쓰는 어휘도 아리오인이 모국어를 쓰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온느발레 억양이 섞여 있지도 않았다. 아리오어로 쓰인 책을 읽는 속도도 빨랐다.
따로 은근슬쩍 들은 바로는 위즈가 이곳에 서점을 연 게 벌써 몇 년 전이다. 정확히는 뮌제 로헤올이 죽은 지 반 년 정도 흐르고 나서.
그때부터 위화감 없이 아리오에 섞였다는 건 그때도 이미 충분히 아리오인처럼 보였다는 뜻이었다.
“…….”
뮌제 로헤올이 죽기 전 아리오어를 할 수 있었느냐 하면, 아니었다. 하지 못했다.
온느발레 사람들은 대체로 타국어를 배우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사회적 분위기가 그랬다. 오만함에서 비롯된 분위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온느발레는 제국이었다. 각 왕국이 쓰는 각각 다른 언어들을 배워서 무엇하겠는가. 외교를 위해서라면 왕국인들이 제국어를 배워야 마땅했다. 실제로도 왕국의 왕실과 귀족들은 제국어를 필수적으로 공부했다.
물론 그렇다고 온느발레의 귀족들이 아예 타국어를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교양을 위해 외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귀족은 많았다. 그러나 유창함은 별개 문제였다. 대부분, 쉬운 어휘로 이루어진 간단한 대화만 가능한 수준에서 그쳤다.
평범한 귀족은 그러했다.
이상하다면 이상하게도, 오히려 고위 귀족에는 한 가지 이상의 외국어를 잘하는 이가 많았다.
특히 고위 귀족 가문의 가주라면 아마 한두 개의 언어는 그럭저럭 익숙하게 다룰 수 있을 터다. 다루는 고급 정보가 많은 가주들로서는 외국어를 많이 알아 둘수록 편리했을 것이다.
외국어를 잘하는 아랫사람을 가지면 더 편리하게 해결할 수 있는데도, 확실히 권력의 중심에 있는 가주들은 생각하는 게 조금 달랐다.
뮌제 로헤올 공작도 에흐베어에 유창했다.
소꿉친구가 현 에흐베 대공이 된 에흐베인이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뮌제와 라파엘 에흐베는 온느발레어와 에흐베어를 내키는 대로 섞어서 대화했다. 그들은 모국어를 두 개 가진 것처럼 서로의 언어에 그토록 유창했다.
“다른…….”
제이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는 손을 들어 입술을 문질렀다.
뮌제가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아리오어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제이를 맡은 처음에는 기본적인 인사말조차 아리오어로 하지 못했었으나, 아무래도 제이를 보살피며 자연스럽게 한두 마디 배우게 된 듯했다.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공작은 아리오어를 배우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아리오어로 이 물건을 어찌 말하냐는 둥 적극적인 질문을 해온 적도 없었다.
기초적인 대화라도 아리오어로 해 보고 싶어서 그녀에게 몇 문장을 가르쳐 주었지만, 다음날 물었을 때는 전부 잊은 채였다. 아리오어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리오의 왕자인 제이의 앞이라고 그런 무관심한 태도는 취하지 않으려고 했을 뿐.
그런 사람이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죽음에 맞닥뜨린 지 반년 만에 아리오어에 능숙해진 채로 나타날 수 있을까.
* * *
목에 선 핏대가 가라앉았다. 힘겹게 색색거리는 숨이 들렸다. 뒤통수만 보이는 머리가 작게 들썩거렸다.
엘르시어는 위즈의 등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었다.
“다 했습니까?”
“으…….”
위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르시어는 다시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이건 그의 신분상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법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는 이리 구토하거나 헛구역질하는 사람을 보조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딸이 마법에 의해 폭사한 후 피폐해진 모친이 스스로 숨 쉬는 것마저 못 견뎌하던 때.
그는 어색하지 않게 능숙한 손길로 위즈를 도왔다.
“흐…….”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요…….”
위즈는 힘없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르시어는 위즈의 두 손에 들린 봉지를 가져갔다. 눈물로 붉게 물든 눈이 그를 보았다. 엘르시어는 옅게 미소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세안해요. 이건 여기에 버리면 됩니까?”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통에 봉지를 넣은 엘르시어는 화장실로 간 위즈가 세수하는 소리를 잠시 들었다. 양치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걸음을 옮겼다. 문이 열려 있는 화장실 문간에 섰다.
물소리가 그친 화장실 겸 습식 욕실 안에서는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났다.
위즈는 세면대를 붙잡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로 서 있었다.
물 범벅으로 젖은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이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던 엘르시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위즈 씨.”
세면대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이 조금,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듣고 있었다.
엘르시어는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옆얼굴을 보며 나직하게 물었다.
“당신. 온느발레의 귀족과 인연이 있습니까?”
“…….”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즈가 아닐 수도 있었다.
뮤니르 자작의 묘사에 위즈가 들어맞지만, 그 묘사를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상당히 막연했다. 어쩌다 얻어걸린 것뿐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러이러한 사람을 찾는데 당신이지 않을까’ 하며 떠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당신을 찾는다’며 밀고 들어가는 게 답변을 듣기 좋았다. 당황한 상대가 순간적으로 보이는 반응만큼 솔직한 표현이 없으므로.
위즈는 천천히 고개만 돌려 그를 보았다.
“…….”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는 탓에 아직 붉은 눈가가 도드라져 보였다. 엘르시어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눈으로 향했다.
사실 사람의 눈동자 색 따위는 몇 번이고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일부러 기억하고자 애썼거나, 자기도 모르는 새 절로 기억하게 될 정도로 인상 깊은 일이 있지 않고서야.
그런데 엘르시어는 위즈가 가진 연한 회색을 기억했다.
아니. 기억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하는 게 옳겠다. 뮤니르 자작의 설명을 듣고 위즈가 불쑥 떠올랐을 때.
어느 밤이 그리도 인상 깊었다는 사실 역시 이어 깨달았다.
위즈의 생일 밤.
촛불 흔들리는 어둠. 그림자 진 얼굴. 촛불과 같은 정적.
위아래로 마주쳤던 정묘한 눈.
딱 그 순간이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엘르시어는 지금 이 순간의 위즈 역시 그의 기억에 남을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
정확히는, 어디 한 군데가 깨진 것처럼 무표정으로 희게 젖어 있는 저 얼굴이.
뚝. 위즈의 얼굴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을 때렸다.
당황하여 보이는 순간적인 반응도 없었다. 웃지 않는 위즈는 고요했고, 적막했다. 당황하지 않은 여인은 지친 음성으로 답했다.
* * *
새 책이 왔다.
《악마가 선택한 영웅과 악마의 회복 간의 관계분석》
제목이 이만큼 만족스러웠던 책은 거의 없었다.
가장 만족스러웠던 제목을 가진 책은 뮌제의 눈앞에서 일레인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던 일이 있었다.
소훼하여 읽지 못한 그 책 이후로 처음 만나는 만족이었다. 뮌제는 긴장 어린 침을 삼켰다. 제발 이번에야말로 답을……. 답을 얻을 수 있기를.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책을 눈앞에 두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간이 없다.”
부석부석하게 마른 목소리였다. 언젠가 이 서점의 자물통을 망가뜨린 적 있는 청년은 무심코 반응했다. 그는 엘르시어에게 연기하는 뮌제를 보고 ‘주군의 그런 모습을 본 것 자체’를 죄송스러워하며 사라진 청년이기도 했다.
“예?”
“근래 들어 이 나라에 아티팩트가 넘쳐나게 나타나.”
기사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을 뒤지고 있는 아홉 기사 전부가 ‘경계하라.’는 주군의 주의를 받은 바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아티팩트가 많이 나타나는 이 현상이 아리오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며.
아티팩트에는 무슨 마법이 담겨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긴 해야 했다. 무슨 골탕을 먹고 뒷목을 잡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아홉 기사는 주군으로부터 들은 약간의 지식이 더 있었다.
호문클루스에 대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