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49)화 (49/120)

# 48화

기사는 뮤니르 자작을 모르는 눈치였다. 사신단을 만날 일이 거의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이 기사와 다르게 엘르시어는 뮤니르 자작을 알았다.

중년 사내의 얼굴을 떠올린 그는 나직하게 물었다.

“접견실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단장의 대답을 들은 기사는 경례한 후 퇴실했다. 엘르시어는 빈 물잔을 내려놓았다.

* * *

접견실에 들어간 엘르시어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는 뮤니르 자작을 볼 수 있었다.

“뮤니르 자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경.”

엘르시어가 후작이라 작위 자체는 높지만 왕국의 후작인 점, 뮤니르 자작은 온느발레의 귀족인 데다 세력 있는 자작인 점을 고려하면 이 정도 적당한 상호 존대가 옳았다.

그러나 ‘옳은 것’과 ‘현실’은 다르다.

같은 급의 다른 자작이었으면 엘르시어에게 이 정도로 예의 바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사실, 따지고 보면 뮤니르 자작이 엘르시어에게 예의를 많이 갖추고 있는 편이었다.

두 사람은 단단하게 악수했다.

엘르시어는 자작에게 다시 자리를 권했고, 두 귀족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자리에 앉았다.

엘르시어는 먼저 사과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손님을 위한 다과가 따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은여우단의 탑에 들르는 손님 중 접견실에서 맞이해야 하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은여우단이 비밀 많을 법한 특수 집단인지라 외부인은 스스로 접근을 삼갔다. 그 외, 자주 들르는 손님들은 대부분이 단장의 집무실에서 맞이해도 괜찮은 손님이었다. 예를 들면 발롬브로사나 제이와 같은 사람들인지라.

그래서 자주 쓰지 않는 접견실은 신문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준비가 미비했다.

손님이 오래, 편히 앉아 있게 둘 생각도 없으므로 그 ‘미비한 준비’를 개정하지도 않았다. 이곳은 특수 기사단인 은여우단의 본부였다. 왕실 일원과 기사단 일원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편히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곳.

엘르시어의 사과에 뮤니르 자작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엘르시어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물었다.

그에 뮤니르 자작은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인자한 인상으로 팔자 주름이 잡힌 웃음이 그 행동과 썩 잘 어울렸다.

그래서 엘르시어는 더 경계했다.

가벼운 행동마저도 계산 아래에 하는 능숙한 정치인을 앞에 두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뮤니르 자작은 온느발레 중앙에서 살아남아 있는 가문의 가주였다.

그리고 엘르시어는 침묵의 중요성을 아는 귀족이었다. 장차 공작이 될 클리포드 후작은 조용히 기다렸다.

뮤니르 자작은 손을 내렸다. 중년 귀족의 얼굴에 쓴웃음이 걸렸다.

“이걸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했습니다만,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방법이 없더군요. 직접 묻는 수밖에는요.”

“…….”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엘르시어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찾는 것과 은여우단은 전혀 관계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솔직히 말해서 뮤니르 자작은 사람 찾는 일을 위해 사람들을 고용할 수 있는 재력이 있는 귀족이었다. 온느발레인을 찾든 아리오인을 찾든.

젊은 후작의 표정을 본 뮤니르 자작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제가 굳이 경에게 온 건 제가 찾는 사람이 은여우단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와……. 아리오인을 찾으시는 겁니까?”

“예. 연한 회색 눈을 가진 여성입니다.”

“…….”

“간절하게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리오의 귀족에게까지 와서 이리 정중하게 부탁하는 걸 보면 정말 간절한 것 같긴 했다.

엘르시어는 이 부탁을 반드시 들어 주어야 했다. 온느발레의 유력 귀족이면서도 이 정도로 자세를 낮춘 것만으로도 자작은 성의를 다했다.

하지만 엘르시어에게는 아리오인을 보호할 의무 또한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째서 찾으시는 겁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 아리오인에게 해 되는 일이라면, 죄송하지만 도와드리기 어렵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결코 아니에요. 한때 연 있었던 사람입니다. 많은 도움을 받았었기에 보은하고 싶어서 찾고 있습니다.”

거짓인 것 같기도 했고 진실인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왕국의 후작에게 자세를 낮추면서까지 간절하게 부탁해야 했던 까닭으로는 잘 어울렸다.

“그러시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구체적인 생김새가 어찌 됩니까?”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연한 회색 눈이었던 것밖에는.”

“그럼 연령대는…….”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저희 은여우단과 접촉한 적 있는 연회색 눈의 여성을 찾는다는 것이다.

엘르시어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기사에게 물어보아야 하니 시간은 조금 걸리겠습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기사들도 있어서. 하지만 최대한 빨리 취합하여 전달해 드리지요.”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경.”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했다.

먼저 문으로 다가간 엘르시어는 뮤니르 자작을 위해 문을 열어 주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데에 거리낌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뮤니르 자작은 웃으며 고개를 까닥이고는 그를 지나쳤다.

두 사람은 건물의 정문까지 함께 갔다.

이는 예의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절차의 문제였다. 은여우단의 얼굴과도 같은 접견실조차 저 모양인데 외부인이 홀로 멋대로 건물을 돌아다니게 둘 리가 없었다.

정문에 도착한 엘르시어는 뮤니르 자작과 헤어지기 전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자작,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예.”

“그 여성이 어째서 은여우단과 접촉했다고 생각하시지요?”

뮤니르 자작은 엘르시어가 이 질문을 일부러 이 자리에서 물었으리라고 짐작했다.

편하게 앉은 자리에서 묻고 답하기에는 이면의 무게가 상당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 날카롭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을 터.

그리고 또한, 자작에게 답변을 위해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헤어지기 직전’, ‘서서’, ‘예민한 질문’을 던지고 답할 때, 사람은 대체로 묘하게 마음이 급해지거나 긴장하게 된다.

뮤니르 자작은 슬쩍 웃었다. 분위기를 쇄신하는 중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온느발레가 아리오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위의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자작은 적당히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 둔 거짓말이었다.

“그 여성이 마법사나 아티팩트에 대해 적어도 저보다는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은여우단이 무슨 이유에서라도 그 여성과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은여우단이라 하면 마법이나 마법사, 아티팩트에 대한 특수기관이다. 어떤 사람이 은여우단과 접촉한 까닭이라 하면 이 이유가 가장 그럴싸했다.

엘르시어는 미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 듯 보였으나 속내는 모를 일이다. 뮤니르 자작이 보기에 이 젊은 후작은 항시 웃는 얼굴로 속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일반적인 귀족들이 쓰는 가면보다도 더 단단한 가면이었다.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니 이 정도면 강박일지도 몰랐다.

이런 웃음에 자작은 익숙했다.

윌리엄 로헤올이 딱 이런 사람이라서.

뮤니르 자작은 다시 한번 엘르시어와 악수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여성이 어째서 은여우단과 접촉했다고 생각하시지요?]

오늘따라 햇빛이 강하고 진하다.

그는 걸어가면서 손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보았다.

그 질문은 자작도 윌리엄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그’ 여성이라 하시니 아무래도 특정인을 찾으시는 것 같은데, 어째서 은여우단과 접촉했다고 생각하나.

그러나 현 로헤올 공작은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작은 윌리엄의 부탁을 제대로,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물었던 바.

[각하. 제가 틀렸다면 정정해 주십시오. 각하께서는 선대 로헤올 공작과 닮은 여성을 찾고 계신 겁니까?]

[아니. 나는 은여우단과 접촉했을지도 모르는 금발……. 아니, 머리카락 색은 됐어. 은여우단과 접촉했을지도 모르는 연회색 눈을 가진 여성을 찾고 있네.]

은여우단. 연회색 눈. 여성.

그리고, 결국 철회했다고는 해도 한순간이라도 입에 담았던 ‘금발’이라는 조건.

[그 두 조건에 맞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괜찮네. 어떤 얼굴을 가졌든지 간에 괜찮아.]

[…….]

[무슨 수를 써도 눈동자 색만큼은 바꿀 수 없을 테니.]

재차 확인해도 ‘뮌제와 닮은 얼굴’이라는 조건은 끝끝내 없었다.

누구라도 괜찮고 어떤 얼굴을 가졌든지 간에 괜찮다 하면서 윌리엄은 불특정한 사람을 찾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

뮤니르 자작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더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내렸다.

손 그늘을 만들었던 손이 흘러내려 턱을 쓸어내렸다.

사실,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리오에 은여우단이 있다면 온느발레에는 루미나리에단이 있고, 루미나리에단의 전 단장은 뮌제 로헤올이었다.

뮌제 로헤올은 금발, 연회색 눈을 가졌었다.

뮌제 로헤올의 장례식은 시신 없이 치러졌다.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과연 얼굴을 바꾸는 마법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예 고려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뮌제 로헤올이 정말로 살아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일부러 간과할 뿐.

십만 분의 일의 확률로 윌리엄이 누이를 살려 보내려 했다 해도 황제가 그걸 그저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윌리엄도 그렇지만 황제는 더더욱 뮌제 로헤올을 살려서 놓아주었을 사람이 아니었다.

* * *

엘르시어는 멀어지는 뮤니르 자작의 뒷모습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집무실로 향하는 걸음은 차분했다.

헤어지기 직전 자작의 대답을 듣자마자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작에게 그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다.

* * *

위즈의 서점에 머무는 시간, 제이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입담이라도 가진 것처럼 떠들었다.

펴서 카운터 위에 올려 둔 책은 그저 장식일 뿐. 읽는 시늉도 잘 하지 않았다. 서점에 와서 보이는 태도로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위즈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이의 말에 발랄하게 화답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이가 서점에 머무르는 시간, 위즈의 입에서는 군것질거리가 십 초 이상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말하는 시간이 길 리가.

위즈는 제이가 서점에 머무는 시간에 극히 말이 적어졌다.

그에 자연스레 제이 혼자 떠드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지만 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 지치기에는 그가 위즈를 ‘다시 만나게 된’ 날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았다. 겨우 며칠. 그리워한 게 몇 년인데 겨우 며칠로 지칠 리 만무했다.

제이는 꽉 다문 입술 아래로 늘어진 긴 젤리를 보다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면 막상 내게 여기를 소개해 준 후작은 여길 못 오고 있네요.”

“…….”

“그립지 않아요?”

책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즈의 눈은 올라오지 않았다.

섬세한 속눈썹도 평온하게 움직였다.

“얼숍이 난리가 났거든요. 바깥에 돌아다니는 아티팩트가 갑자기 많아졌대요. 전보다도 더.”

“…….”

“확실히 내가 여기 오는 동안 여기저기서 뭔가 느껴지긴 했어요.”

제이는 한 손에 턱을 괴었다. 장난스럽게 입을 비죽 내밀고 있기를 수 초. 그는 이내 싱글싱글 웃었다.

“무얼 느낄 수 있느냐고는 안 물어요?”

“…….”

스흡 하는 소리와 함께 젤리가 단숨에 입안으로 사라졌다.

위즈는 책을 내려놓고, 목에 건 주머니에서 알사탕 하나를 꺼냈다. 사탕을 입에 넣은 그녀의 시선이 드디어 제이에게 닿았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차분하고 냉정한 느낌이 있는 무채색의 눈동자. 너무도 다정하던 눈. 제이의 웃음이 아주 조금 지워졌다. 목이 약간 졸렸다.

침을 삼킨 그는 애써 말을 이었다.

“……당신이 목에 건 그 주머니에서도 뭔가 느껴져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어요?”

“…….”

“그러고 보면, 이런 걸 잘 아는 친구가 있었는데…….”

사실 무얼 말하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정신이 없어진 탓이다.

위즈는 그와 다르게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멀뚱멀뚱 제이를 보다가 씩 웃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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