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하.
목적지로 거의 와 가던 뮤니르 자작은 문득 한숨을 쉬었다.
발밑에서 건강한 녹색 이파리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슬슬 보이기 시작한 건물을 눈에 담았다. 은여우단의 탑이었다.
건강했던 왕자가 급사하는 일이 일어나 버려서 은여우단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어려워졌다.
현재 온느발레 사신단을 향하는 눈초리가 하나같이 불순하고 불손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작도 그렇고 아르망 페레이라도 그렇고, 이대로 쫓겨나듯 귀국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반드시 제각각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온느발레 귀족으로서 갖기에 마땅한 자존감과 오만함이었다.
아직도 귀국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그들에게 아리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왕자의 급사가 실은 살인이냐며, 그 살인을 너희가 저질렀느냐며 문초하기도, 귀국을 종용하기도 어려웠다.
어찌 되었든 제국의 사신이고, 현재 제국을 다스리는 이는 그 개 같이 대담한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사신의 심기를 공식적으로 건드리면 황제로부터 어떤 보복을 받을지 모르므로 조심해야 했다.
황제는 로헤올의 가주조차 쳐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이었다. 온느발레의 황제에게 있어 일개 왕국에 교묘하게 손대고 몰아가는 것은 로헤올의 가주를 살해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왕국은 이 세상에 없을 터.
“…….”
자작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르망이 황제에게 받은 밀명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언제 끝나는 것인지, 뮤니르 자작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르망이 일을 마치기 전에 자작의 볼일도 끝내야 한다는 것만을 알 뿐.
솔직히 이쯤 되면 윌리엄의 부탁을 들어 주기는 글렀다고 생각하지만…….
“…….”
더 애써 보지 않고 돌아가기도 좀 그랬다.
[찾을 사람이 있네. 그들과 만난 적 있는 사람일 것 같거든.]
로헤올에 대한 예의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부탁의 내용이.
[금발. 연회색 눈. 여성.]
부탁의 내용이.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손 놓고 물러날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예?]
[그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물어야 하네. 나는 그들과 접촉하였을지도 모를 그 여성을 찾고 싶어.]
금발. 연회색 눈. 여성.
그 묘사를 듣고 죽은 사람이 곧바로 생각났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작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윌리엄이었고, 윌리엄에게서 자연스럽게 상기하게 되는 사람은 항상 뮌제였기 때문이다.
고인인 뮌제 로헤올은 무척 인상 깊은 사람이었던지라 아직도 그녀가 가졌던 색 하나하나가 다 기억이 났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뮤니르 자작은 잠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을 정도로 당황했었다.
당연했다.
죽은 뮌제 로헤올과 비슷한 색을 가진 여성을 찾으란 말인가? ‘뮌제와 얼굴이 닮은’ 따위의 조건은 붙이지도 않고? 색만 가지면 돼?
아니, 그보다, 찾아서 뭘 하려고?
거기다 갑자기 웬 아리오? 웬 은여우단? 색만 같은 사람이라면 온느발레에서도 찾을 수 있을 텐데. 모든 게 느닷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는 결국 여기에 있었다.
은여우단 탑의 앞.
“…….”
정문으로 들어서며, 자작은 한쪽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설마 자신이 살해한 사람을 이제 와서 후회하며 찾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단 로헤올을 위해 움직일 정도로 신의는 있었지만, 그게 로헤올의 허물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 가려져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뮤니르 자작은 윌리엄이 황제와 동맹하여 누이를 죽였음을 확신에 가깝게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 인간이 이제 와서 후회할 리가.
혹시라도 실은 뮌제가 죽은 게 아닐 경우를 제외하고, 뮤니르 자작이 보기에 윌리엄은 뮌제를 살해한 일을 후회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공작이 된 윌리엄 로헤올은 충분히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 이가 후회할 리가.
그리고 후회하지 않는 윌리엄의 그 모습에 뮤니르 자작이 실망할 까닭도 없었다.
윌리엄이 벌인 일은 정도가 지나쳤지만, 어쨌든 권력 투쟁이었다. 거기에 져서 순순히 죽은 뮌제 로헤올이 잘못이다. 권력에 있어서 과오는 항상 패자에게 있었다.
* * *
위즈는 아티팩트를 통해 온 짧은 편지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불붙인 편지를 싱크대 안에 놓았다.
검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두 손으로 싱크대를 짚었다.
온느발레어가 아닌 암호로 쓰인 서신이었다.
‘투서는 성공하였습니다. 황제가 읽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복귀하겠습니다.’
“…….”
생각에 잠긴 연회색 눈동자에 천천히 냉혹한 고민이 서렸다. 죽기 전과 같은 최고 권력자의 눈이 되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목숨마저 앗는 것에 익숙한 자의 눈이었다.
귀족 한 명이 죽을 일도 뮌제 로헤올은 눈 깜짝하지 않고 도모할 수 있었다.
여태 온느발레 황도에만큼은 사람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 온느발레 사신단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기사를 그곳으로 보냈다.
뮌제 로헤올 공작 밑에서 많은 어두운 일을 처리한 경험이 있는 기사라고는 해도 이번 일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황제가 가진 막강한 아티팩트들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게 관건.
중앙탑이 가진 아티팩트들을 비밀리에 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경험 많은 대담한 기사는 성공했다. 능히. 빠르게.
오로지 아르망 페레이라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소란이었다. 단 한 명을 공격하기 위해, 죽은 권력가는 한 귀족의 생명을 걸었다.
양심의 가책은 거의 없었다.
온느발레 수도에서 버티는 귀족 가주 중에 선한 정치가는 아무도 없었다. 전 로헤올의 가주는 그중에서도 특출나게 악하면 악했지, 절대로 선하지 않았다. 로헤올 정도의 대가문을 이끌려면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위즈는 희미하게 웃었다.
‘소영주 하나에 불과할 때 돌아가는 게 좋을 터다. 그대.’
그녀는 종이가 다 타서 엄지손톱만큼 흰 부분이 남았을 때 물을 틀었다. 불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재가 섞인 검은 물이 전부 하수구로 내려가자 그녀는 수도를 잠갔다.
따뜻하게 식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마 가장자리에 닿아 있던 손끝이 눈썹 바로 밑까지 내려왔을 때, 잠시 손을 멈추었다. 손바닥에 뜨거운 한숨이 닿았다.
두 손이 양 관자놀이 쪽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본래의 사람을 벗겨 낸 위즈는 위즈가 지어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힘을 어떻게든 끌어올렸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주방에서 나왔다.
편지를 받기 직전까지 읽고 있었던 책이 아직 카운터 위에 펼쳐져 있었다. 책을 덮었다. 《‘악마와 마법의 연관점에 대한 고찰’에 대한 평석》. 제목이 빠르게 눈에 들어왔다가 벗어났다.
그 책을 카운터 아래 서랍에 넣은 직후 서점의 문이 열렸다.
위즈는 바닥에 놓아 두었던 바구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끝에 선택한 것은 길쭉한 젤리였다.
젤리를 입에 물고 허리를 들었다.
손님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위즈 씨.”
제이는 방실방실 웃으며 인사했다. 위즈는 젤리를 우물거리며 멀뚱멀뚱하게 말했다.
“손임! 손임이힌가요?”
“어……. 나 기억 못 해요?”
“음……. 저 아히나요?”
“…….”
엘르시어에게 경고는 들었지만, 직접 당하니 묘했다.
제이는 무어라 대답하고자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닫았다. 서점에 들어오기 전부터 긴장하고 있었던 그는 이제 더 긴장하여 두 손을 모으고 깍지 꼈다.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왕자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제이라고 해요.”
“음. 채근 파, 프, 팔지 않슘니다.”
말하기 어렵다면 젤리를 다 먹고 말하면 될 텐데.
제이는 그런 속내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사러 온 거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어요.”
죽은 왕자의 일로 왕궁은 여전히 흉흉했다.
발롬브로사는 제이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고, 제이는 부왕이 말한 ‘너를 거두게 하지 마라.’를 십 분 전에 들은 것처럼 여전히 선명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이는 나왔다.
그렇기에 나왔다.
마음이 괴로울수록 이 사람 옆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이는 제 말을 들은 위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유심히 보았다. 입술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젤리가 짧아지는 속도는 아주 느렸다.
위즈는 생각을 하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했다.
오래전 뮌제 로헤올에게 보호받은 추억에 여전히 잠겨 있는 왕자는 그 모습도 눈에 담고 담았다.
아리오인에게 흔한 갈색 머리칼을 가지고, 뮌제와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뮌제의 목소리를 가지고, 뮌제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게 얼빠진 언행을 하는 서점 주인.
이 여자가 뮌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백 중 십 정도는 있었다.
그러다가도 이 사람은 뮌제라고 확신했다.
그러다가도 확신은 또 흔들려서, 뮌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여지를 두었다.
갈팡질팡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움…….”
위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씩 웃었다.
확신이 없는 이 상황에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건, 이 사람의 존재를 대공에게 알릴 생각이 없다는 점이었다.
와서 확인해 보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에흐베 대공은 뮌제를 포기했다. 뮌제를 배신했다. 그걸로 끝났다. 제이는 그때의 배신감을 잊을 수 없었다.
왕자는 준비되어 있는 윈저체어를 끌어와 앉았다. 젤리를 후루룩 삼키고 이번에는 사탕을 입에 무는 위즈를 보며, 제이는 다시금 분명히 했다.
이 사람은 내 거야.
살아 있는 이 사람은 내 사람이야.
* * *
얼숍에 아티팩트의 출현이 지나치게 많아졌다. 아티팩트의 소행으로 보이는 사건도 지나치게 빈번해졌다.
하루하루가 달랐다.
제이를 호위하던 은여우단의 기사가 사라진 밤으로부터 겨우 엿새가 지났을 뿐인데, 얼숍은 엿새 전과 달랐다.
그날 밤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그랬다.
아티팩트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많아서 며칠이나마 위즈의 도움까지 받지 않았던가.
은여우단의 일이야 항상 연쇄로 터지지만, 엘르시어가 단장이 된 이래 요즘처럼 바쁜 적이 없었다.
얼숍 안에 나타나는 아티팩트를 바삐 회수해야 했으며 사라진 기사를 수색해야 했다.
갑자기 왜 이리 얼숍에 아티팩트가 많아졌는지 그 까닭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얼숍은 점점 흉흉해져 갔다.
가까운 곳에 외출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엿새 전과 오늘의 분위기는 그리도 판이해졌다.
이리 위험한데도 불구하고 제이는 외출을 해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왕의 권고도 듣지 않는 왕자를 엘르시어가 어찌 통제할 수 있겠나. 결국 왕자는 지난 엿새 간 벌써 두 번이나 서점에 다녀왔고 지금도 외출 중이었다.
그나마 해 떠 있는 시간에만 외출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원래 이리 철없는 분은 아니었건만.
엘르시어는 시계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외출한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었다. 제이가 돌아왔다는 보고를 들어야 한결 안심할 텐데.
은여우단의 기사가 사라진 날 이후로 제이에게 붙이는 호위는 두 명씩 두 조로 움직이게 했다. 사건 조사와 아티팩트 회수 등으로 바쁜 기사들 중 그렇게 네 명이 구원받은 것이다. 조사를 위해 서고에 처박혀 있거나 현장으로 달려 나가던 기사들은 배신자를 보는 눈으로 네 기사를 떠나보냈다.
네 명이면 충분한 숫자였다.
그럼에도 엘르시어는 걱정을 놓지 못했다.
피로로 창백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질러 내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붙여 놓은 작은 테이블로 다가가서 물 한 잔을 따랐다.
물은 입술과 입안, 식도를 적시며 힘겹게 넘어갔다.
똑똑.
“…….”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그가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이었다.
“단장님. 계십니까?”
“들어와요.”
입실을 허락하고 물을 마저 마셨다.
들어온 기사는 말했다.
“온느발레의 뮤니르 자작이라는 분이 단장님을 뵙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