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뮌제 로헤올 공작은.
윌리엄이 그녀를 사랑함을 알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 공작은.
윌리엄이 그녀를 미워함을 알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 공작은.
윌리엄이 그녀를 정말 사랑하며, 정말 미워하고, 부러워하며, 질투하며, 실로 서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뮌제 로헤올 공작은 그런 윌리엄을 사랑해야 했다.
죄책감과 부채감을 토양 삼아 자라난 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결코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없었다. 태생부터 글렀다. 로헤올 공작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두 사람은 모든 게 문제였다.
로헤올의 직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윌리엄이 약하지 않고 강하게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윌리엄이 세상에 난 이후 선대 공작 부부에게서 그 어떠한 아이도 태어나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태어나지 못했다면 라파엘을 만나지도, 라파엘에게 숨을 나눠 줄 수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뮌제는 종종 가정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뮌제 로헤올 공작은 삶과 죄책감과 부채감, 우애와 책임이 그렇게 버거웠다.
그녀의 삶 전부가 로헤올의 유지와 윌리엄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두 개를 중심에 두고 뮌제는 움직였다. 어렸을 때는 그저 세뇌 같은 애정을 가지고 움직였다면, 공작 된 이후에는 죄인 된 몸으로서 마땅히 움직였다.
그런 뮌제가 윌리엄을 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뮌제는 윌리엄의 육신을 제 손으로 상하게 한 적이 단연코 없었다.
그러나 뮌제 로헤올 공작이 죽기 전까지 윌리엄은 종종,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며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뮌제와 눈을 꼭 마주친 채로.
그리고는 곧 그 움직임을 이겨 냈다.
다정한 빛이 돌아온 눈으로 윌리엄은 애써 웃었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나도 로헤올이야. 난 버틸 수 있어. 난 이겨낼 수 있어. 나는 나야.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뮌제, 내 귀엽고 소중한 누이.
그러나 또한 윌리엄은 심적으로 몹시 지치고 괴로울 때면 제정신으로 이런 말도 토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누이. 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유일한 아이였다면 그 자리라도 가졌을 텐데.
네가 태어나 내가 득 본 게 없어.
네가 없었다면 내가……. 내가…….
그러다가도 한결 견딜 만하게 마음을 정리한 후에는 쩔쩔매며 뮌제를 사랑했다.
윌리엄은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뮌제를 사랑했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뮌제가 그에게 갖는 마음에 한 줌의 존경심도 없다는 점, 약한 것을 바라보는 사랑이라는 점, 죄책감으로 인해 몸을 낮추고 엎드린 마음이라는 점, 다 느꼈기에 마음에 불붙은 것처럼 때때로 이를 갈면서도, 그는 뮌제를 사랑했고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뮌제는 윌리엄이 하는 그 노력이 고마웠다. 윌리엄이 뮌제를 증오할 이유는 차고도 넘치므로.
뮌제는 그를 이해했다. 자신만큼이나 힘들 윌리엄을 이해했다.
그러나 윌리엄이 뮌제를 이해했던 적은 한 번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그저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아꼈을 뿐이다. 그러려 노력했을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뺏긴 자가 앗아간 자를 이해하기는, 정말이지 죽도록 어려웠다.
앗아가길 원한 적이 없던 ‘앗아간 자’는 그 몰이해까지도 이해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죄인은 힘겨웠다.
라파엘마저 없었다면 뮌제는 아주 빠르게 피폐해졌을 것이다. 라파엘이 있음에도 그녀는 때때로 죽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죽을 수는 없었다. 양심이 있거든 그리해서는 아니 되었다.
뮌제는 삶과 죄책감과 부채감, 책임을 상기하며 버텼다.
그것들은 그녀를 억누르면서도 그녀를 버티게 했다.
그것들은, 억지로 그녀를 세웠다.
그 ‘억지로’라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짐이 되었다. 잠들어도 그녀는 편하지 못했다. 새벽에 잠들어 새벽에 일어났다. 매일 다섯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수면 시간 속에서도 뮌제는 수십 번 눈 떴다가 눈 감았다.
극심한 피로와 무거운 마음으로 인한 불면증이었다.
일어나 있는 시간에도, 잠든 시간에도 뮌제는 칼처럼 예민했다.
라파엘만이 뮌제를 심정적으로 휴식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분명 사람이었으나 뮌제에게는 휴식이었고 시간이었다.
라파엘은 뮌제의 비밀을 아는 소수 중 유일하게 로헤올 바깥의 사람이었으며, 뮌제가 신뢰하는 유일한 로헤올 바깥의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시간이 윌리엄과 상관없이 흐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뮌제는 라파엘을 사랑했다.
이런 친구가 곁에 있음을 그녀는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죽으면서 그녀가 진심으로 순수하게 염려한 유일한 사람이 그였을 정도로. 뮌제는 라파엘을 깊이 사랑했다.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은 아니었다.
라파엘과의 우정은 윌리엄을 향한 죄책감보다 크지 않았다.
그녀에게 양심이 있다면 감히 클 수가 없었다.
그녀의 모든 건 윌리엄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했다. 윌리엄에게 바친 삶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어서 끝나기를 바랐다. 모든 게 안전해지길. 모든 게 돌아가길.
죽어 가는 윌리엄을 살릴 수 있기를.
원수만을 죽일 수 있기를.
모든 게 안전하게 끝나기를.
그럼 로헤올 남매는 본디 그리해야 했던 시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뮌제는 죽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죽기를 택했다.
산길에 나타난 윌리엄을 보았을 때, 뮌제는 제 죽음이 윌리엄에게 어떤 충족감을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 윌리엄은 그가 가질 수도 있었던 로헤올 공작위를 어쩔 수 없이 부러워해 왔고 질투해 왔다.
덧붙여 뮌제는, 자신이 죽게 되면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생긴다는 것까지 곧바로 떠올려 계산을 마쳤다.
공작은 미련 없이 무기를 놓았다.
“빌. 들리거든 명심해. 부디 내 이 죽음에 슬퍼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 넌 이겨낼 수 있어. 반드시 그럴 거야.”
남긴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 있던 이가 윌리엄 아닌 윌리엄이었음에도, 그녀는 윌리엄이 쓰는 요술에 의해 기꺼이 죽었다.
그 죽음은 결코 아티팩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뮌제가 기꺼이 죽던 순간, 윌리엄의 눈에서 악에 받친 것 같이 처연하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이를 눈앞에서 타의로 잃어버린 자의 진심이었다.
뮌제는 요술을 쓰는 자들을 혐오했다. 또한, 마법과 마법사를 혐오했다.
뮌제는 ‘윌리엄’을 혐오했다.
뮌제는 로헤올을 혐오했다.
뮌제는 뮌제를 혐오했다.
다시 말하건대, 그녀는 요술을 쓰는 자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또한, 마법과 마법사를 혐오했다.
뮌제 로헤올 공작이 생전에 괜히 마법사들을 탄압하는 데에 앞장섰던 게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최대 적수로 이름날 정도로 유능하게 마법사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까닭도 분명히 있었다.
뮌제는 요술을 쓰는 자들과 마법과 마법사를 혐오했고, 뮌제를 혐오했다.
그 모든 혐오의 까닭 중 하나로 인해 뮌제는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같이 있던 수행원들도 모두 구해 낼 자신 역시 있었다. 그러나 피와 시신이 필요했다.
그녀가 구할 수 있었음에도 구하지 않았던 기사들이 폭사했다. 산산조각이 났다. 피가 폭발하고, 내장이, 살덩이가 폭발했다. 그녀는 구한 기사들과 함께 그 핏길을 어딘가에서 지켜보다가 마지막으로는 윌리엄의 눈물을 본 뒤 몸을 돌렸다.
뮌제는 위즈가 되었다.
윌리엄을 산 채로 죽일 방법을 찾아 자유롭게 헤매기 위해서였다.
* * *
아리오에 파견한 기사 중 한 명이 사라졌다.
라파엘은 사라진 기사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현재 아리오에 있는 다른 기사의 보고를 받았다.
그날 오후, 사라진 기사는 시신으로 나타났다.
에흐베 공국의 어느 마을도 아닌 공국의 수도에.
수도에서도 가장 중심되는 에흐베 공왕의 드비에 성에.
라파엘은 몇몇 귀족을 인견하고 있다가 보고를 받고 나왔다.
드비에 성의 드넓은 정원 어느 곳에, 기사는 깨끗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배 위에 모은 두 손 사이에 꺾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싱싱한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양지바른 곳. 비스듬한 그늘.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창백하게 질린 피부만 아니었다면 편안하게 쉬고 있다 해도 믿었을 법한 모습이었다.
“…….”
라파엘은 기사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몸을 굽혔다.
저희 왕께서 시신에 지나치게 가까워진 탓에 놀란 이가 몇몇 있었다.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라파엘은 끼고 있던 실크 장갑도 벗고 맨손으로 기사의 손을 덮었다.
죽은 자의 뻣뻣한 냉기가 느껴졌다.
라파엘의 숨이 비처럼 떨렸다. 주위에 있는 자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경련이었다.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동요하는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창이나 절창은 없는 듯합니다. 음독하였거나 목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라파엘은 옆에서 들리는 말을 듣고도 조금 더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손톱만큼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불을 토해 내는 것처럼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이 역시 주위에 있는 자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열기였다.
라파엘은 시신의 두 손 아래에 끼워져 있던 카드를 빼냈다. 그의 연회색 눈이 카드에 쓰인 두 문장을 담았다. 남자는 오래도록 그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각 나라의 특수 수사기관에 속한 기사들은 지식을 많이 가진 무인이 아니라 무술을 아는 문인에 가까운 것에 비해, 이 기사는 철저한 무인이었다.
그리 강한 기사가 이렇게 깨끗하게 죽었다.
아리오에 있어야 할 기사가 단 하루 만에 이 먼 에흐베 공국의 중심에 와서, 시신이 되어 누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기사를 능히 죽일 수 있는 무위를 가진 사람이 몇 있다.
“…….”
라파엘은 카드를 내렸다. 카드에 정갈하게 쓰인 에흐베어 필기체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지 마십시오.>
살인자의 것일 필적은 뮌제의 것이 분명 아니었다.
라파엘은 죽은 기사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다.
에흐베가 자랑하는 정예 기사를 능히 죽일 수 있는 무위를 가진 사람이 몇 있다.
그중에 뮌제가 있었다.
먼 거리를 이리 능히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많다.
그중에 뮌제가 있었다.
윌리엄이 아리오로 사람을 보낼 만한 이유가 많다.
그중에 뮌제가 있었다.
황제에게 익명으로 투서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몇 있다.
라파엘은 시신의 손가락에 얽힌 채로 죽어 가는 싱싱한 흰 꽃을 천천히 빼냈다.
“전하…….”
“…….”
그중에, 뮌제가 있었다.
경. 혹시 뮈즈를 만났나.
때때로 퇴폐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로 평상시 무정하게 식어 있는 라파엘의 눈동자에 이 순간 마침내 아픈 빛이 돌았다.
혹시, 뮈즈가 이 기사에게 닿았나.
이 기사의 죽음은 뮈즈의 흔적인가.
뮌제의 흔적이라면 제 기사의 사망이라도 기뻤다. 그래서, 차라리 정말 뮌제가 죽인 것이길 바랐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죽은 자를 내려다보던 라파엘은 카드와 꽃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마부터 턱까지 쓸어내렸다. 그 무거운 손길과 침묵을 지키던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어떡하지, 뮈즈. 죽은 이 기사가 부러워.
나날이 조용히 미쳐 가고 있는 대공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기사가 정말 뮌제를 만난 거라면, 부럽다. 죽은 사람마저 부러웠다.
뮌제는 어디에 있나. 그와 생명의 근원을 나눈 사람은 어디에 있나.
그의 연회색 눈동자가 시신을 마지막으로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