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46)화 (46/120)

# 45화

서점의 문이 활짝 열렸다.

위즈는 가장 먼저 부엌으로 들어갔다. 곧 긴 종이에 불씨를 붙여 나온 그녀가 초에 불을 옮기기 시작했다. 서점 안이 흔들리는 주홍빛으로 찼다. 그녀는 불붙어 있는 종이를 다시 부엌으로 가져갔다.

그 짧은 시간에 그녀도, 엘르시어도, 제이도 조용했다.

그럼에도 두 쌍의 시선은 끊임없이 위즈를 좇았다. 그녀가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그들과 마주 설 때까지.

위즈는 그런 그들이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었다. 멀뚱멀뚱 그들을 마주 보던 서점의 주인이 눈을 굴렸다.

“어……. 책을 읽으러 오신 거라면 저기서 읽고 싶은 걸 가져오시면 됩니다.”

간단한 안내를 끝내자마자 그녀는 목에 매단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온 것은 노란 알사탕 하나였다. 냉큼 삼켰다.

그리고 계속 침묵했다.

그들을 그저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말조차 없었다.

할 수 없이 엘르시어는 침착하게 뒤늦은 대답을 전했다.

“알고 있습니다. 자주 왔었어요.”

“오…….”

“절 기억합니까? 엘르시어. 은여우단의 단장입니다.”

사실 제이를 데려오기 전 미리 한 번 만나고자 하여 오늘 아침에 왔었다. 제이를 지키는 기사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서점은 닫혀 있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는 아직 위즈의 ‘상태’를 알지 못했다. 지금 엘르시어가 그녀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니엘을 통해 엘르시어를 거부했던 위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위즈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갈색 눈길을 맞받아치다가, 사탕 때문에 불분명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모으게써요.”

그 직후 제이를 잠깐 응시하던 위즈는 다시 엘르시어를 보았다.

“무어슬 도와드리까요, 손님.”

“……제 지인에게 이 서점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 왔습니다.”

제이를 향하는 엘르시어의 시선을 따라 위즈도 제이를 보았다.

지금까지 말없이 그녀만을 보고 있었던 제이는 위즈와 눈이 마주치자 어설프게 웃음을 그렸다.

“아, 음, 안녕……. 제이라고 해요.”

“안녕하세여. 데노바 씨.”

“예?”

“웨?”

“아니, 방금……. 예?”

“웨?”

“…….”

엘르시어는 이 어색한 순간을 옆에서 보다가 잠깐 눈을 돌렸다.

위즈와 제이를 붙여 놓으면 무슨 천재지변 같은 그림이 그려질까 했더니 이런 그림인가. 제이가 한 수 아래였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한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는 굳은 얼굴로 웃음을 삼키며 입가를 쓸어내렸다.

오래전에 신문실에서 위즈와 엘르시어가 마주하고 있던 때, 웃다 못해 울며 퇴장했던 다니엘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엘르시어가 평정심을 되찾는 사이에 제이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건, 위즈에게 극심하게 당황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어리벙벙한 말장난 같은 대화로 이 만남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번이고 입술을 벌렸다가 이내 닫았다.

위즈는 조용해진 왕자에게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전 이제 나가 꺼예여. 마음꺼엇 책 읽다 가세여.”

그녀는 보란 듯이 배를 문질렀다. 소화를 시켜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카운터 아래에 둘둘 말아 놓았던 클로크를 꺼내어 몸에 둘렀다.

늘어진 끈을 잡고 꼬물꼬물 매듭짓고자 손이 한참을 헤맸다. 평소 하고 다니던 대로라면 단순하게 묶는 매듭일 텐데도.

어쩐지 손이 굳어 있는 것도 같았다. 움직임에 뻣뻣한 감이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지켜보던 엘르시어는 카운터 너머로 손을 뻗었다.

위즈는 순간적으로 흠칫 놀라긴 했으나 순순히 두 손을 내렸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은 얼굴이 어딘가 뻔뻔했다. 엘르시어는 흘끔 그 얼굴을 본 뒤 옅게 웃는 얼굴로 끈을 잡았다.

“…….”

그 침묵 속에서 제이는 한쪽 볼이 볼록 튀어나온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 것은 결코 입에 대지 않았던 사람을 기억한다.

그 담백하고 건조한 편식증은 그 사람에게 근사하게 잘 어울렸었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압도하는 사람이 단 것을 철저하게 멀리하는데, 왜인지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똑같은 얼굴로 전혀 다른 언행을 하는 이 사…….

“…….”

이 사람이.

이 사람이…….

제이는 울컥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뮌제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도록 경망한 언행을 하는 이 사람이.

“당신 정말…….”

뮌제잖아.

뮌제 그 사람이잖아.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해서 저도 모르게 낸 음성이었다. 직후 스스로 놀라 입을 다물긴 하였으나, 이미 엘르시어가 들었다.

제이는 저를 쳐다보는 위즈와 엘르시어를 보고는 임기응변으로 주절거렸다.

“당신 정말 이 서점 주인분과 친하긴 한 모양입니다.”

“아.”

엘르시어는 그저 미소한 얼굴만 보이고는 더 반응하지 않았다. 위즈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의 등허리를 싸늘하게 아픈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어깻죽지가 불타는 것처럼 아팠다. 강한 스트레스와 긴장, 초조감으로 말미암은 기분이었다.

왕자는 엘르시어가 위즈의 클로크에서 손을 거두는 광경까지 다 보고 나서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 됐습니다.”

“예?”

“내가 억지를 부려서 온 거잖아요. 소개받았으니 이제 됐습니다.”

눈을 조금 크게 떴던 엘르시어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은여우단 기사를 사라지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위험하다는 엘르시어를 설득하여, 서점이 어디에 있는지, 서점의 주인은 누구인지 소개만 받고 싶다고 설득하여 기어이 여기에 온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련의 사건 조사와 서적 조사, 사라진 기사를 찾는 일로 다망한 사람을 끌고 왔다는 일말의 죄책감이 있기야 있었다.

그러나 무리를 해서라도 이렇게 공식적으로 소개를 받아야 했다.

그래야 했어…….

제이는 엘르시어의 인사를 받고 그저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위즈를 계속 응시했다. 그리고 엘르시어가 몸을 돌린 사이, 작게 접은 종이를 튕기듯 그녀에게 날렸다.

쪽지는 그녀의 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위즈는 분명 그 쪽지를 보았다.

제이는 미소했다.

“반가웠어요.”

“…….”

나가겠다 하던 위즈는 그대로 서서 두 사람을 배웅했다.

* * *

서점이 비었다.

위즈는 허리를 굽혔다. 흔들리는 클로크 천이 벙벙하게 그녀의 손끝을 스쳤다. 위즈는 종이를 주워들었다.

물기 없는 손이 쪽지를 펼쳤다.

짧은 편지는 인사로 시작했다.

안녕. 당신.

제이의 필체였다. 위즈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가 흘려 내보냈다.

난 어제 어딜 들른 곳이 여기밖에 없습니다.

왕자가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여기까지 읽고 나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한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답답하게 뛰는 심박동이 명치까지 내려가 울었다.

어딜 가든 아티팩트를 가진 기사가 따라다녀서 이젠 거의 잊고 있어요. 그래서 어제 날 호위하던 은여우단의 기사가 언제 어디서 사라졌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후작에게도 그렇게 말했어요. 어딜 다녀왔냐는 말에는 그냥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미 위즈의 뇌리는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위즈. 스미스.

죽은 자가 누워 있고. 죽인 자가 서 있고. 다시, 이어, 죽은 자가 생기고.

연쇄 살인한 자가 서 있어야 했던 어젯밤.

사랑하는 친구의 흔적을 죽여 버린 어젯밤.

뮈즈가, 한 대공이 어떤 공작을 부르던 이름이었던 걸 나는 기억합니다.

아래로 더 길게 이어지는 문단을 훅 훑어보고는 위즈는 편지를 구겼다. 쓸데없다. 왕자가 어쩌고. 한 사람을 만나고 어쩌고. 처음으로 마음이 채워지고 어쩌고. 그 사람이 없어지니 정신이 나갈 것 같고 어쩌고.

위즈는 구긴 쓰레기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입안에 물고 있던 사탕이 새삼스럽게 역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쓰레기통에 사탕을 뱉었다. 그녀는 살아오며 단것을 좋아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 * *

사탕을 뱉은 오늘의 전날.

어제.

그러니까, 제이가 뮌제의 유산에 무너져 펑펑 울어야 했던 밤.

제이를 따라다녔던 이는 둘이었다.

은여우단 기사 하나를 순식간에 처리한 위즈는 피 묻은 채로 다시 땅을 박찼다.

그녀가 내리그은 검을 막아낸 자는 어둠 속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제이를 따라다니는 두 기척이 모두 은여우단의 기사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로헤……올 공작 각하……. 정말 살아……. 살아 계셨…….”

“…….”

남자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뮌제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에 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었던 이름이 울컥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그리움을 토해낼 것 같았기에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차분하게 정적이었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또다시 ‘그’의 흔적이었다.

제이를 보호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건 라파엘이 마냥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리라.

그녀는 라파엘을 알았다. 저희 사이의 아슬아슬한 선과 벽도 알았고, 그 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저희 두 사람, 서로를 정말 잘 알았다.

라파엘이 그녀의 흔적이 남은 제이를 보호한 것뿐이라는 걸 알 만큼.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그녀도 그리했을 것이다. 라파엘의 흔적이 남은 것은 하나하나 간절하게 보호하고 지켰을 터다.

전 로헤올 공작은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라파엘의 사람이었다.

돌려보내고 싶지만, 돌려보낸다면 이 사람이 그녀의 생존을 라파엘에게 말할 것이 자명했다.

차마 뮌제를 공격하지 못하는 기사를 뮌제는 두어 번의 공격으로 살해했다. 그녀는 피 흘리지 않고 사망한 기사를 안아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 그에게서 아티팩트를 회수했다.

그 옆에 몸을 굽히고 한쪽 무릎을 꿇은 뮌제는 식어 가는 시신의 손을 잡았다. 해줄 수 있는 사죄 전부였다.

그녀의 손에 덮인 채로 라파엘의 사람은 사라졌다.

뮌제는 비게 된 손을 거두고 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은여우단 기사의 시신 역시 이미 사라졌다. 피 흘린 자국조차 땅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 공작은 피 묻은 한 손으로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쓸어내렸다.

* * *

사탕을 뱉은 위즈는 구겨진 종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위즈. 스미스.

죽은 자가 누워 있고. 죽인 자가 서 있고. 다시, 이어, 죽은 자가 생기고.

연쇄 살인한 자가 서 있어야 했던 어젯밤.

라파엘의 사람을 죽인 자가 서 있던 어젯밤.

뮈즈가, 한 대공이 어떤 공작을 부르던 이름이었던 걸 나는 기억합니다.

맞다.

제이의 짐작이 맞다.

그 이름에서 가져온 흔한 아리오식 이름이 맞았다.

마법사를 뜻하는 아리오어 단어인 위자드에서 가져온 이름이기도 하였으나, 뮈즈라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었다. 이름을 위즈로 지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제 더는 라파엘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었다.

그런데 어떡하지. 라파엘.

[로헤……올 공작 각하……. 정말 살아……. 살아 계셨…….]

기사조차 주군의 행보를 불신하는 가운데, 여전히 그녀가 살아 있다고 믿는 라파엘이 계속 아팠다.

위즈는, 뮌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두피가 삐죽삐죽 곤두서는 느낌이 있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는 게 일상이라고 생각했건만 평소보다 더 가슴이 답답했다.

널 보고 싶게 하지 마. 널 그리워하게 하지 마.

라파엘, 내 친구.

내가 널 이보다 더 사랑하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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