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45)화 (45/120)

# 44화

제이는 끔벅끔벅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시종이 급히 빗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약간 흩트렸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기도 했다. 정신을 차리려 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왕자가 대답했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속이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려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잠긴 목소리였다. 씻고 준비하여 여기 나오기까지 삼십 분은 걸렸음에도.

엘르시어는 물었다.

“돌아다니신 길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서 다 말해 줄 수는 없겠지만……. 기억나는 곳이라면요. 그나마도 직접 보거나 지도를 봐야 상기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럼 지도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은여우단의 탑으로 갑시다. 나도 잠 좀 깨야겠고.”

엘르시어는 사실 자신이 돌아가고 나면 왕자는 곧바로 침대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왕자는 피곤해 보였고, 움직임이 눅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몸을 가누기 벅차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왕자가 먼저 이동을 제안하니 놀랄 수밖에.

눈썹을 치켜올렸던 엘르시어는 바로 감사를 전했다.

그에 제이는 손을 휘휘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위즈는 양손에 야무지게 나이프 하나, 포크 하나를 들고 식탁을 두드렸다. 그녀는 신나게 외쳤다.

“저녁!”

“썩을…….”

그러나 그가 판 무덤이었다.

피트는 이를 악물고 위즈의 앞에 스테이크를 놓았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간만에 아주 조용했다. 오가는 대화라곤 한 마디도 없었다. 피트가 도중에 그녀를 힐끗거렸을 정도였다. 평소의 위즈 같았으면 꼭 한 마디라도 날려서 피트의 명치 깊은 곳에 숨겨진 광기를 깨웠을 테니까.

위즈는 금세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매우 부담스럽게도 양손에 턱을 괴고 피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입이 아니라 눈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던 건가. 아, 그랬던 건가. 그래서 조용했던 건가.

체할 것 같았던 탓에 피트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다 먹었으면 좀 가라.”

“설거지라도 하려고요.”

“내가 미쳤냐!”

‘내가 판 무덤이니 요리는 해 주겠다. 그러나 도의적으로 설거지는 네가 해라.’는 사흘 만에 끝난 지 오래였다.

그 사흘간 위즈가 보란 듯이 연달아 깨뜨린 그릇이 이미 스무 개가 넘어갔다.

‘설거지도 네가 해라.’라는 얼굴로 피트와 눈을 마주친 채로 위즈는 그릇을 떨어뜨렸다. 고양이가 똑같이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헛, 실수!’라는 말을 소리치며 하나를 더 깨던 그때를 떠올리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개새끼…….

그때를 떠올린 피트는 눈물에 살짝 젖은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위즈는 히히 웃었다.

“저 어쩌면 이사 가야 할지도 몰라요.”

피트는 스테이크 조각을 입에 욱여넣다 말고 포크를 멈추었다.

갑자기 웬 이사냐는 의문 반, 내려앉는 가슴 반이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듣자마자 마음이 조금 허해졌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위즈는 약간 시무룩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

“당신을 두고 갈 수는 없다는 거죠.”

“이사까지 갔으면 식사는 네가 알아서 해 먹어, 이 자식아!”

분명 요리 때문에 데려가려는 거다!

피트의 울분에 찬 외침에 위즈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나 무어라 반박하여 피트의 혈압을 올리지는 않았다.

마음이 허해지다니 착각이었다. 이사 가고 싶으면 가라지. 썩을.

그는 다시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위즈의 시선은 여전히 피트에게 머물러 있었다. 숙인 머리에 뚫어져라 꽂히는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어쩐지 기다려 주는 것 같기도 했다.

항상 그보다 늦게 식사를 끝내는 그녀를 피트가 그대로 자리에 앉아 계속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만일 그의 생각대로 정말 기다려 주는 거라면, 기특하지만 정말 부담스럽다……. 뭐 하나 평범하게 하는 게 없어, 쟤는.

그때 위즈가 말했다.

“있지. 그 색 좋아요?”

입안에 음식물이 들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우물거리는 와중에 무슨 소리냐고 눈썹을 치켜올리자, 위즈는 설명을 보충했다.

“그 색이요. 파란색. 새파란 색. 머리카락이랑 눈. 똑같은 색.”

“좋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이미 가졌는데.”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하지만 위즈가 하는 저 질문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피트의 머리카락 색은 꽤 특이한 편이었다. 눈동자 홍채의 그 새파란 색이 그대로 옮겨 간 것 같은 색이라서, 사람들의 평범한 파란 머리카락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피트는 포크로 아스파라거스를 찍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이런 색이 아니었어. 눈은 초록색이었고 머리는 평범하게 연한 금색이었다고. 전형적인 아리오인.”

“그래요?”

“죽기 직전까지 앓고 난 후에 정신 차려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

“그렇군요.”

서점 주인은 적절한 추임새를 넣었다.

흥미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식사가 끝났다. 연두색으로 긴 채소를 다 씹어 삼킨 피트는 식기를 내려놓고 등을 등받이에 기댔다. 만족스러운 포만감으로 나른해진 감이 있었다.

화가는 긴 숨을 내쉬고는 선선히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뭐, 다들 내가 죽으리라 생각했을 정도였는데 이렇게 살아났잖아. 그 값이라고 하면 무엇이든 못 받아들이겠어. 이 정도면 싼 거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값으로 이 정도면 정말 싸게 치른 게 아닌가.

물끄러미 그를 보던 위즈도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려요.”

“그래?”

“그러고 보니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당신처럼 딱 그렇게 새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웬일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그가 그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위즈는 여태 비범한 말만 해 온 사람이었다. 잡동사니의 길에서 위즈와 평범하고 상식적인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은 드물었다.

피트는 나른한 기분에서 깨어나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꾸해 보려고 노력했다.

“오, 그래? 어떤 사람인데?”

“글쎄요. 온화하다고 알려진 여자였죠.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고요. 몇 년 전에 죽었지만.”

순식간에 숙연해졌다.

“절친한 친구의 손자를 살리기 위해 죽었어요.”

“……대단하신 분이네. 절친한 친구의 손자라고 해도 어쨌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신 거잖아.”

“그건 아니었어요.”

단호한 부정에 피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위즈는 생각에 잠긴 듯 조금 멍해진 얼굴로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건 아니었어…….”

“…….”

무언가가 이상했다. 표정이나 눈빛, 어조가.

피트는 잘못 보고 있나 싶어서 잠시 그녀를 관찰하다가 입술을 혀로 핥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 싫어해?”

위즈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할 것처럼 굴어 온 사람이라서 피트는 그 질문을 던지면서도 얼떨떨했다.

그녀가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굴어왔기 때문에, 위즈의 변화를 바로 눈치챌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위즈는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그 사람한테 내가 크게 마음 다쳤던 게 있어요.”

아.

피트는 침음성을 삼켰다. 위즈는 턱을 대고 있던 두 손을 조금 더 오므렸다. 손가락들의 끝이 눈 밑과 광대에 꽃받침처럼 닿았다.

그녀는 그대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 사람이 가진 물건 중에 내가 정말 너무, 너무 간절하게 필요한 게 있었는데……, 그걸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줄 수 있냐고 하니까 내 눈앞에서 그걸 불태워 버렸어요.”

“…….”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을.”

목소리는 나붓하게 내려앉았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건조하게 발랄한 음성이었다. 눈 감은 그녀는 웃긴 일화를 들려주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양 입꼬리가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 사람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처분하든 그 사람 마음이었겠지요. 그런데 난 정말……. 정말 간절했었거든요. 그 사람이 원한 대로 무릎 꿇고 빌었어요. 한 번만,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

“그것 안에 무슨 내용이 있었는지 이제 알 수는 없겠죠. 그런데 그 알 수 없는 내용에 혹시나 내게 간절히 필요했던 내용이 들어 있었을까 봐 속이 조이는 거예요.”

‘그’ 위즈에게 있었던 일이라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이야기였다.

위즈는 어렸을 때부터 그 어떠한 세상 풍파도 겪지 않고 발랄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므로.

피트는 지금 위즈가 지나치게 평소와 같아서 오히려 더 마음이 아팠다. 감히 짐작하건대,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위즈는 많이, 아주 많이 참담했을 것이다. 아주 많이 괴로웠을 테며 아주 많이 비참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듣는 위즈의 과거 한 부분에 행복은 없었다.

비로소 그는 기적처럼 바보 같은 지금의 위즈도 지난 풍파를 거치고 거쳐서 만들어진 모습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입술을 움찔거리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책이었어?”

“책이었어요.”

눈 감은 그녀가 대답했다.

저녁의 검푸른 먼지가 위즈의 온몸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고요하게 평온한 얼굴로 있었다.

피트는 한 손을 들어 제 머리카락을 잠시 더듬었다. 싫어하는 사람의 색과 같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민망하거나 화가 일지는 않았다.

그저……. 그냥…….

그냥…….

“서점을 연 것도 그래서야? 책 때문에.”

그냥 왜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마치 그의 죄인 것처럼. 그 사람의 죄가 피트에게로 옮겨 온 것처럼.

착잡한 속내를 억누르고 괜히 묻자, 마침내 위즈가 눈을 떴다.

연한 회색 눈이 드러났다.

그녀는 코로 숨을 들이켰다. 이를 드러내고 실실 웃기도 했다. 그리고는 다른 말을 했다.

“마법사의 눈동자 색은 생명의 색인 것 알아요?”

“……어?”

“저는 보복했어요.”

피트의 말문이 막혔다. 그 대단하고 무서운 말을 저렇게 발랄하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위즈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부담스럽게 피트를 보며 웃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전 이만 가 볼게요. 잘 먹었습니다.”

오늘의 위즈는 알 수가 없었다. 피트는 멍하게 앉아서 그녀를 배웅했다.

* * *

“아, 맞다. 내일 아침은 삶은 달걀로 부탁드려요!”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활기찬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다.

서점에 거의 다 와 가던 엘르시어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엘르시어와 거의 비슷하게, 혹은 아주 조금 더 빠르게 제이도 뒤를 돌아보았다.

서점 옆옆집의 문을 잘 닫은 위즈는 서점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 검푸르게 번진 세상 속에 서 있는 위즈의 그 표정이 몹시 반가웠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르시어는 옅게 미소했다.

그러나 위즈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지나쳤다. 엘르시어는 약간 당황하여 그녀를 불렀다.

“위즈 씨.”

이제 그들보다 더 서점에 가까워진 그녀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위즈는 눈을 깜박이다가 환하게 웃었다.

“혹시 손님이신가요? 책은 안 파는데!”

“…….”

엘르시어는 직전의 외면이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그들은 서점에 거의 다 와 가던 상태였지, 서점 앞에 도착한 상태는 아니었다.

저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한 그녀를 보며 그는 애써 미소했다.

“압니다.”

“어쨌든 들어오세요.”

위즈는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문을 잠근 자물쇠를 열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