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이 시각이라도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
서적의 진귀함 여부는 관심 없다. 제이는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잠시 물러나 숨을 돌리는 걸 좋아하는 거지, 책 자체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잡동사니의 길에 있으니만큼 그 서점 주인도 어딘가 재미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제이는 어슬렁어슬렁 느긋하게 걸었다. 어디가 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 안 되겠으면 불 켜진 집에 물어보면 되겠지.
가다 만난 갈림길에서 그는 일단 왼쪽을 택했다.
길 양쪽에 세워진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벽이 된 길이었다.
그러나 함정처럼 초반 건물만 아기자기했다.
정확히 양측 세 번째 건물부터 굉장히 건조해졌다. 제이는 실실 웃었다. 이건 뭐 사기도 아니고.
그래도 걸으며 그가 느끼는 건 일종의 평온이었다.
“서점…….”
느긋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또다시 갈림길이었다. 그는 재차 왼편을 택했다.
조금 전보다 폭이 많이 줄어든 골목이다. 집이 나란히 서 있던 직전과 다르게, 이 골목은 벽이 집을 대신하여 서 있는 부분도 있었다. 독특한 골목이다.
그는 어정쩡하게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런 곳에 서점이 있을까?
그래도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건물의 수가 적은데 빛이 나오는 건물은 아예 없었다.
이만 돌아가서 오른편 길로 가 볼까.
주춤 멈춰 서려던 찰나, 그의 눈에 골목 끝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것 역시 보였다.
기왕에 눈에 보인 ‘끝’이다. 저 벽에 손 한 번 기대어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엘르시어의 권유를 전환점으로. 저 끝에 손 한 번 대 보는 것을 전환점으로.
그래서 제이는 정말 수 미터 더 나아가 정면의 벽을 손끝으로 쓸었다.
“…….”
막힌 벽을 앞에 두고 있자니 또 속이 답답해졌다. 그는 눈을 굴리다 침을 삼켰다.
입매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공허해진 속이 무거웠다. 벌어진 입 사이로 깊은숨이 흩어졌다. 명치가 떨릴 정도로 허했다.
고개를 돌렸다.
틈으로 촛불 빛이 밝게 흘러나오는 나무 문이 보였다. 안을 볼 수 있을 창문은 보이지 않는다.
물끄러미 나무 문을 응시하던 그는 벽에서 손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잡동사니의 길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컸다. 체감하는 중이다. 혼자 찾다가는 아침 해를 볼 때쯤 발견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서점이 어디 있는지 지금 물어보기로 했다.
그는 다가갔다. 나무 문을 두드리자 금방 반응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목소리라고 은연중에 느꼈다. 아, 며칠 전 들었던 그 재미있는 여자인가?
그런데 어쩐지 귀에 익은 듯도 했다. 다른 데에서도 들어 본 것 같은데……. 그때는 거리도 있었던 데다가 대화 내용이 웃겨서 목소리 자체에 집중하지 않았었다. 가까이에서 큰 소리로 들으니 이제야 목소리 자체에 신경이 미쳤다.
한 번 들어 봤다고 익숙함을 느끼는 건가. 아니면 흔한 목소리인가.
의아해하면서 문을 열었다. 나무 문은 투박하지만 정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일 수밖에 없었다.
앞에는 카운터로 추정되는 게 있지만,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보이는 게 다 책장이었다.
설마 여기가 그 서점인 건가?
어, 진짜? 서점 위치를 물어보러 들어온 곳이 서점이라고?
놀란 움직임 탓에 손에서 문이 놓였다. 뒤로 되돌아간 나무 문이 다시금 끼이익 소리를 내며 펄럭펄럭 닫혔다.
이 집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때였다.
웃고 있는 그녀는 가장 안쪽 책장 사이에서 나오며 말했다.
“손님이신,”
“…….”
제이는 얼어붙었다.
“가요.”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후 멈칫했지만 잘 마무리한 위즈는 미소했다. 그리고 눈웃음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이으려 했다.
입이 열리고 어떤 소리를 내자마자 그녀는 입술을 닫았다. 당황한 판단에 의한 반응이었다. 목소리를 더 듣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판단.
그러나 이미 음성은 상대의 귀에 박혔다. 기억에도 박혔다.
추억에도 박혔다.
청년은 눈도 감지 못했고, 숨을 쉬지도 못했다. 움직이지도 못했고, 웃지도 못했다.
이윽고 잔잔하게 멈춰 있던 숨이 꿀꺽꿀꺽 울기 시작했다.
“농…….”
아니지…….
위즈는 침묵했다.
“농, 데, 노, 농. 시흐마. 데. 노. 베흐. 베흐.”
아니, 그게, 아니, 아닌데. 분명. 그게. 아니. 정말. 정말.
제이의 고개가 좌우로 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점점 커지다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잠시 뻐끔거리던 입이 다시금 넋 나간 흐느낌을 흘렸다.
“베흐……. 부…….”
“…….”
정말. 당신이.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제 다리가 아닌 것 같다. 한 차례 휘청거리며 무릎이 꺾였다.
믿을 수 없다며 중얼거리는 저 확신을 지켜보는 눈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동요와 당황도 처음뿐이었다. 위즈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 언제나 상냥하였던 그때처럼.
제이의 손이 떨며 다가왔다. 그 손을 부드럽게 쥔 위즈가 말없이 그를 보았다.
제이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급하게 덮었다.
“어 비 에데…….”
“…….”
“어 비 에데.”
살려 주세요.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뜻 없는 호소였다.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멍하게 철렁한 속은 어지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리 색은 달라도 알아볼 수 있다.
정말 뮌제야? 정말 그 사람이야? 정말? 정말 뮌제야? 나 좀 살려 줘. 뮌제 맞아? 나, 죽을 것 같아. 제발.
여태 아무 말 없던 그녀가 그를 들여다보며 조곤조곤 목소리를 쏟았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살려 달라니요.”
제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크게 뜨인 눈으로 저를 보는 그를 잠시 보다가 위즈는 마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입을 비죽 내밀고 고개를 갸웃했다. 제이가 아는 사람은 결코,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눈을 굴리던 위즈가 계속해서 아리오어로 말했다.
“위험한 거라면 일단 문을 잠그고 올.”
“가지 마!”
제이는 절박하게 그녀를 잡았다.
잡고 늘어졌다. 땀에 젖은 그에게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지 말아요. 가지 말아요.”
“…….”
“뮌제……. 뮌제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는 위즈인데요. 위즈 스미스.”
길 잃은 고양이를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위즈는 상당히 상냥한 어조로 대답해 주었다.
제이의 눈물 젖은 시선이 어지럽게 위즈의 얼굴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하지만 다……. 다 똑같은데…….”
얼굴도, 눈도, 목소리도, 체격도. 다 똑같은데.
뮌제인데.
아무리 봐도 뮌제인데.
희망을 놓지 못하는 제이를 보며 위즈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마치 답답한 것을 보는 듯 불퉁하게 한숨을 쉬었다.
“뮌제라면 온느발레식 이름인데……. 전 아리오인이에요.”
“…….”
멍하게 그녀를 보던 제이는 결국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렇지.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리가 없지.
뮌제는 죽었다.
뮌제를 기적처럼 똑같이 닮은 사람을 봐서 미쳤었던 거다. 그녀는 죽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은 현장에서 시신 한 구도 제대로 조각 맞추지 못했을 정도로 전부 터지고 조각나고 불타서 죽었다.
아주 잠깐의 환상과 기적을 겪었던 제이는 엄청난 탈력감을 느꼈다.
몸을 조종할 수가 없었다. 왕자는 눈물을 쏟으며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웅크렸다. 그는 흐느꼈다.
“…….”
위즈는 왕자를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그의 등을 천천히 두드렸다. 제이가 느끼기에 다정한 손길이었다.
* * *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은 제이를 위로하던 손은 그대로 움직이면서, 그가 잡은 손을 빼내었다.
웅크리고 있는 제이의 뒷목 위 허공에 그 빈손이 멈추었다. 손 아래에 차분하게 정제된 살의가 모였다. 이대로 목을 부러뜨리는 건 쉬운 일이었다.
그럼, 지금 죽일 것인가.
뮌제 로헤올은 이제 제이를 보호할 이유가 없다.
그녀의 짐작이 옳다면 발롬브로사는 제이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인질로 보낸 왕자를 특수 기관 기사까지 보내 살필 정도로 신경 쓰고 있다면 그 까닭이 달리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형제들에게서 떨어져 안전하게 있으라고 보냈겠으나, 미처 일을 마무리하기 전에 제이가 뮌제 로헤올의 사망에 대해 의문을 갖고 움직이는 바람에 아리오로 돌려보내진 것이다.
그녀의 추측은 그러하였다.
얼마 전 죽어 바로 어제 장례 본식을 끝낸 둘째 왕자가 그녀의 추측에 신빙성을 더했다.
그래서 온느발레에 있을 적 제이를 그럭저럭 친절하게 보살펴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좋은 관계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어리광 들어 주는 것도, 비위 맞춰 다독거리는 것도 온느발레에서 끝났다. 그때는 조금 귀찮아지더라도 앞으로 아리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이를 정도 높게 지켰으나 이제는 그럴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온느발레의 대귀족이 아니었다.
뮌제의 손이 아주 조금 더 내려갔다.
죽일 것인가.
아닌 척 하여 잘 넘긴 것도 같았지만, 제이는 머리 없는 자가 아니었다. 이성을 찾거든 분명 계속해서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녀의 외견은 지나치게 뮌제와 닮았다. 다른 것이라곤 언행과 머리 색뿐.
캐고 다니기 시작하면 귀찮아진다. 제이를 이 자리에서 마무리를 짓는 편이 그녀에게는 좋았다. 왕자를 죽이고 시신을 처리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정에 흔들릴 일은 없다.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있는데. 얼마나 필사적으로,
“…….”
찾고 있는데. 내가.
제이에게 진심으로 따뜻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로헤올 전 공작의 눈길은 다시 그의 머리로 떨어졌다.
찾았다가 빼앗긴 절망에 우는 자를 한참 응시했다. 죽은 이를 까닭으로 하여 우는 왕자. 뮌제의 고개가 조금 떨어졌다.
그녀는 목 위의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다독이며 묵묵히 나무 문을 보았다.
뮌제는 제이가 마법을 인식할 수 있게 된 정도보다도 훨씬 정교하게 마법을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은 자가 바깥에 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제이의 울음이 잦아질 때쯤 손을 빼고 일어났다. 어리석은 왕자에게 물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였다. 위즈는 그런 사람이었다.
* * *
제이는 시계를 본 위즈의 강권에 떠밀려 서점에서 쫓겨났다.
“서점 닫을 시간이에요, 손님.”
문은 굳게 닫혔고, 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도 얼마 지나지 않아 꺼졌다. 그는 한참을 서점 앞에 서서 문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 멍청한 얼굴로 왕궁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머릿속은 까맣게 칠해졌다.
섧게 길었던 울음에 지쳐 제이는 아주 오래 잤다.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아무도 그를 깨우지 않았다. 불씨 꺼진 어젯밤에 지쳐 잠으로 도망친 그를 깨운 건 시종이 들고 온 소식이었다.
엘르시어가 급히 제이를 만나고 싶어 한다 했다.
제이는 비몽사몽 일어나 세안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사실 시종 둘이 꾸벅꾸벅 조는 왕자를 세안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는 게 옳은 말이었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엘르시어는 우선 예를 갖추었다. 그리고 제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로드. 로드를 지키던 기사에게서 아직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제이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엘르시어의 옅은 갈색 눈동자는 왕자의 외견을 신중하게 살폈다. 일단 어디를 크게 부상당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기사는 오늘따라 어수선해 보이는 제이를 관찰하며 말했다.
“어젯밤 어디에 다녀오신 줄로 압니다.”
궁문을 지키던 병사들에게 확인했다. 제이는 외출했다가 돌아왔다.
“짚이는 바가 있으십니까?”
“…….”
충혈된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