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엘르시어는 집에 틀어박힌 기사들에게 찾아가서, 그를 앞에 두고 울거든 울게 두었고 하소연하거든 하소연하게 두었다. 이후 은여우단으로 돌아오거나 사직하는 건 각 기사에게 달려 있었다.
엘르시어는 힘들어하는 수하를 돕지 못했고, 돕지 않았다. 그들도 그가 챙겨야 할 기사이지만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기사들 역시 챙겨야 할 사람들이었다. 아직 건강하고 멀쩡하게 일하고 있는 기사들마저 큰일을 겪어 낙오하지 않게 하는 것에 엘르시어는 집중했다.
그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여식을 잃어 급속도로 피폐해지는 부모에게 공감하여 함께 낙오하느니 차라리 그 혼자라도 정신을 차려 마법사를 최전선에서 압제하는 게 나았던 것처럼.
그러나 왕자에게 똑같은 대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자는 은여우단의 기사들과는 입장이 다른 사람이었다.
제이에게는 은여우단의 기사들처럼 스스로 저를 추스를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무조건, 당장, 추스르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제이는 단 한순간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그게 지금 발롬브로사가 원하는 제이의 모습이었다. 왕은 다니엘의 모습을 제이에게 바란다. 은여우단의 단장은 왕의 그 속내를 생각하며 물끄러미 왕자를 응시했다.
제이는 하하 웃었다.
“해서. 무슨 일로 왔습니까? 후작이 나 찾아오는 일은 드문데. 아니, 아니지. 드문 것도 아니지. 나 돌아온 이후에 여기엔 한 번도 안 찾아왔잖아요. 아, 아닌가. 한 번은 찾아왔었나.”
“…….”
엘르시어는 왕자가 횡설수설하는 건지 장난을 거는 건지 가늠해 보았다.
그리고 곧 포기했다.
상대의 평소 언행이 어지간해야 견적이라도 낼 수 있다. 위즈를 겪으며 제이를 대하는 게 조금 더 능숙해진 감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전에 비교할 시의 이야기였다.
엘르시어의 대답을 기다리던 제이는 손을 뻗어 베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잔을 들었다.
자는 사이 방 안을 치웠는지 아까 넘어졌던 티 테이블도 멀쩡하게 세워져 있었다. 느릿느릿 물을 마시며 잔 테두리 너머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오후 세 시 즈음에나 보일 법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방이다.
제이는 엘르시어의 단정한 모습에서 눈동자를 멈췄다가, 벽을 보았다. 세 시 반이었다.
엘르시어가 한창 업무에 시달리고 있어야 할 시간이라는 뜻이다.
연쇄살인 조사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지나다니다 본 은여우단 기사들의 몰골을 떠올려 보건대 일이 상당히 많을 것도 짐작 가능했다.
눈을 도르르 굴린 왕자는 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는 내내 침대 밖으로 구부러져 있던 무릎이 뻑뻑했다.
구겨진 셔츠를 이리저리 툭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부왕께서 보내셨습니까?”
“…….”
“왜요. 자중하라고 했지, 이렇게 틀어박혀 있으라는 말이 아니었다고?”
이 나라에서 제이가 그나마 무디게 반응하는 사람은 엘르시어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 덕분에 내용은 날카롭지만 음성에 조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제이가 눈을 들어 엘르시어를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뜬 왕자는 옅게 웃었다.
엘르시어가 대답을 못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 까닭이다. 그저 서 있는 기사를 물끄러미 보던 제이는 눈웃음을 보냈다.
“후작은 부왕께 신임을 받는 사람이지요. 최측근이라 해도 틀리지 않고.”
“…….”
“부왕이 심중에 둔 많은 계획을 공유했을 것도 같은데. 맞습니까?”
엘르시어는 미소한 얼굴로 묵묵히 제이를 보았다.
그는 제이가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했다. 발롬브로사는 제가 제이에게 무슨 말을 하였는지 엘르시어에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이 왕이 왕자를 죽일 것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전에 알지 못하고 왔다면 약간 당황했을 터다.
엘르시어는 태연하게 침묵하였다.
기사를 빤히 보던 제이는 코웃음을 치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니, 됐어요. 그만둡시다. 뭐가 나올 리도 없고.”
그리고 제이는 침대 앞을 벗어났다.
아까 던졌던 책은 티 테이블 위에 고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앞에 선 제이는 손을 뻗어 다섯 손가락 끝으로 톡톡 책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책이 아니라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얼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던 제이의 눈동자는 그의 손이 멎는 것과 함께 멈추었다.
“그래서 정말 왜 왔습니까? 부왕이 뭐라고 하셨기에?”
엘르시어는 제이의 손이 닿아 있는 책을 힐끗 보았다.
왜 왔느냐.
제이가 다시 ‘멀쩡하게’ 활동하도록 다독여 주러 왔다.
아직 얼숍을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온느발레 사신단에 열 받아 있는 발롬브로사는, 물론 제이가 온느발레 사신단에 접근할 기미가 여전히 보인다면 당연히 차단하라고도 덧붙였다.
“저녁에 다시 올 테니, 제게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어? 무슨 일 있습니까? 후작이 웬일로?”
엘르시어가 생각하기에 그건 둘째 문제였다.
제이가 진정 로헤올 전 공작을 삶의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리 며칠간 폐인처럼 박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자가 죽는 일이 일어났으니 온느발레 사신단이 바로 떠날 것이라는 건 정치와 예법에 밝은 자라면 응당 예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제이는 급히 움직이지 않았다.
왕이 왕자를 죽였다 하는 충격에든, 왕의 협박에 진심으로 공포에 잠긴 탓이든, 제이는 뮌제 로헤올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제이에게 뮌제 로헤올은 실로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가 주장했던 만큼 절실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방법으로 다독이거나 시선을 돌려 놓으면 온느발레와 로헤올 전 공작 일에서 금방 손을 떼지 않을까 싶었다.
단지 그 ‘제대로 된 방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엘르시어는 일단 왕자가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을 것을 쥐어짜서 온 참이었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잡동사니 길에 제가 자주 들르는 서점이 있습니다. 진귀한 서적들이 많아서 로드께서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음. 권유는 고맙지만 외출하기는 귀찮은데요.”
애초에 제이가 어릴 적에 왕의 눈에 처음 들게 된 계기도 지식 습득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다른 자식들보다 독서에 몰두하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올라온 보고로도 제이가 잡동사니의 길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하였다.
관심을 가진 것 같으니, 한번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위즈와도 어쩌면 잘 맞을 것 같고…….
“…….”
엘르시어는 제이와 위즈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한 직후 목이 메었다.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동족 혐오가 무엇인지 보게 되거나, 똑같은 사람 둘이 짝짜꿍 지나치게 잘 맞는 걸 보게 되거나.
……이거 잘하는 짓 맞나. 만나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본능적인 깊은 의문에 잠기면서도 엘르시어는 부드럽게 말했다.
“바람도 쐴 겸, 잠시라도 나가시지요.”
“…….”
제이는 허리를 비스듬하게 조금 굽히고 책 표지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엘르시어를 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기사를 보던 제이는 문득 웃었다.
“협박하실 땐 언제고 이제는 나를 달래 주라 하십디까?”
엘르시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자는 후작을 존중하여 서 있던 것을 그만두었다.
티 테이블 앞 의자에 털썩 앉은 제이는 피식거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후작의 권유, 받아들이지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아니. 오늘은 말고.”
“……그럼 내일 저녁은 괜찮으십니까?”
“그래요. 그렇게 합시다.”
제이의 마음이 변할까 하여 엘르시어는 지체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기사단 건물로 돌아갔다. 제이가 짐작했듯 그는 여전히 바빴다.
그래서 사실, 저번에 위즈가 엘르시어를 거부하겠다는 걸 전해 들은 이후로도 위즈와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 정도였다.
한 차례 서점에 들르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때 문이 닫혀 있었다. 오래 기다릴 수 없어 돌아온 뒤로 더는 들를 시간이 없었다.
은여우단 기사가 가서 물으면 열 번에 여덟 번 정도는 대답해 주고는 있다는데, 엘르시어가 직접 가면 어떨지 모르겠다. 얼굴은 기억하고 있으려나. 정말 거부하려나.
제이를 모시고 가기 전에 들러 봐야겠다.
그는 제 일정을 머릿속에서 훑은 뒤 피로에 젖은 숨을 흘렸다. 내일 아침에나 시간이 날 것 같았다.
* * *
제이에게는 엘르시어가 권유한 외출을 하루 늦춘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엘르시어가 떠난 직후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나서, 발코니에 서서 한동안 바깥을 보았다.
이미 해는 다 져서 날벌레마저 날아다녔지만 제이는 오래도록 하늘과 땅, 먼 곳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건 싫다.
이런 작은 권유에 끌려다니기 이전에, 그는 인생 중 많은 것에 끌려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는 저녁 바람을 맞으며 홀로 힘을 끌어올렸다.
자신감도.
의욕도.
그러자 심장이 명치에서 뛰었다. 공허했다. 초조하기도 했다. 심지어 두렵기까지 했다. 싫은 긴장에 울음이 나올 것도 같아서 그는 입술을 깨물고 몇 번이고 심호흡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중을 받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제이는 그대로 궁을 빠져나왔다.
자중하기를 원하는 부왕이 떠올랐다.
자식을 죽인 이의 눈빛과 말, 목소리.
소식을 전하고 경고하면서도 곧고 바르던 자세는 또 어떤가.
두려움과 충격에 압도당하였던 순간을 떠올렸다.
왕자는 분명 우울했다.
여태 여유롭게 빙글거리며 달려왔던 건 전부 가면이었다는 것처럼, 그는 이만 방에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쉬고 싶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맞이할 평화와 평온이 며칠 전부터 그에게 속삭였다.
그래도 제이는 이성으로 몸을 일으켜 나왔다. 엘르시어의 권유를 전환점 삼을 필요가 있었다.
“…….”
무거운 걸음이다.
떼었다 붙이는 걸음걸음마다 신발이 늪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왕자는 걸었다.
잡동사니의 길에 들어서고 나자, 보이는 광경이 며칠 전과 사뭇 달랐다. 이질감마저 느껴지는 바람에 제이는 멈춰 섰다.
눈을 깜박였다.
“…….”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의미 없는 작은 움직임이 마치 열쇠라도 된 것처럼,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아, 달빛이로군.
턱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며칠 전과 다르게, 그래도 보름달에 가까운 달이라고 달빛이 강했다. 그 어둡던 길이 보였다.
그는 슬며시 웃으며 눈을 내렸다.
파란빛. 은빛. 검은빛. 잠잠한 이 길에 녹아내린 달빛이 말도 안 되게 고요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초입은 벽만 있어 마냥 조용하더니, 그래도 전에 돌아섰던 지점을 지나 더 들어가니 사람 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의 불빛도 어딘가에서는 새어 나왔다.
제이는 벽 쪽으로 붙었다. 환한 창문을 지나치며 안을 슬쩍 보았다.
그리고 우뚝 멈춰서 뒷걸음질 쳤다.
지금 제대로 본 건가?
“…….”
슬프게도 제대로 봤다.
왜인지 책장 앞에서 물구나무서고 있는 남자를 몇 초간 보던 제이는 고개를 돌렸다.
깊은 숙연함과 폭소하고픈 느낌이 마음을 반씩 차지했다.
그는 나아가며 벽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웃음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리 죽인 소성이 실실 나왔다. 미치겠다.
자연스럽게 지난번 방문에서 보고 들었던 남녀의 일도 떠올랐다.
[산책 다녀오는 길이냐?]
[예, 구관조 씨.]
[그냥 가라.]
[예, 구 년간 지하실에서 묵은 양말 씨.]
[……일부러 그런 거지? 너, 일부러 한 거지?]
여긴 이렇게 고루 재미있나.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말 기분이 나아졌다.
이러면 지루한 서점도 기대하게 된다. 그는 제 설렘을 일부러 억누르지 않고 키득거리며 입을 놀렸다.
“서점. 서점이란 말이지……. 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