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손을 들어 입가를 쓸어내렸다. 마지막으로 콧방울을 쥐었다가 놓고, 어느 정도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턱을 들었다.
“경고, 알아들었습니다.”
그러자 발롬브로사는 깊은 눈웃음을 보였다. 가늘게 보이는 눈동자는 끝까지 제이를 따라다녔다. 지켜보겠다 하는 냉정함이다.
왕이 지나쳐 갔다. 멈춰 있던 수행원들도 왕자에게 인사를 남기고 급하게 왕을 뒤따랐다.
가까이 오는 사람 없는 길에서 제이는 한참 서 있었다.
누이 죽이는 사람을 보게 되더니, 이제는 아들 죽이는 사람을 보았다.
윌리엄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이 제이를 덮쳤다. 정수리에서 달걀이라도 깨진 것처럼 차가운 무언가가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려 몸을 덮었다.
제이는 진심으로 소름이 끼쳤다.
* * *
한 왕자의 급사를 전해 듣자마자 엘르시어는 어찌 된 일인지 짐작했다.
그는 남아서 철야 중인 기사들에게 간단히 지시를 내린 뒤, 발롬브로사에게 불려 가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명령을 받았다. 명령 중 하나는 앞으로 제이를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제이를 왕세자로 낙점해 두었던 굳은 결정이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엘르시어는 제이에 대한 결정이 꽤 오래전, 육 년도 더 전에 내려졌던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이 동요가 상당히 의아했다. 테드 서튼이 의아해한 만큼.
그러나 그들 두 귀족이 왕에게 항명하는 일은 없었다.
날이 밝았다.
왕자가 급사하는 비극이 일어나 정신이 없으니 사신단은 부디 되돌아가면 좋겠다는 왕의 뜻이 온느발레 사신단에게 전해졌다. 다른 일도 아니고 왕자의 죽음이다. 귀국을 거부하기 어려운 명분이었다.
곤란하게 됐다.
뮤니르 자작은 혀를 찼다.
둘째 왕자는 하필이면 아르망 페레이라와 살롱에서 만난 날 밤에 죽었다.
아르망은 둘째 왕자를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살롱에 앉아 있었던 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아르망은 그렇게 만난 둘째 왕자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밤에 그 둘째 왕자가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디가 심각하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던 왕자가. 평범한 안색으로 평범하게 거동하며 온느발레 사신을 만났던 왕자가.
뮤니르 자작은 저희 사신단이 정말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아리오의 둘째 왕자를 온느발레 사신단이 암살하였다는 어리석은 말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온느발레 사신단이 아리오의 둘째 왕자를 실로 죽이려 했다면 설마 그런 식으로 드러내 놓고 왕자를 만나며 빌미를 줄 리가 있겠느냐마는, 그런 억지스러운 논리와 가십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분명 존재했다.
게다가 모든 왕국이 그렇듯 아리오도 온느발레를 향한 민심이 좋지 않으니 소문이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들불 번지듯 일어나 퍼질 것이다.
왕국들을 가소롭게 보는 황제라도 아리오에 어떤 조치를 하지 않고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번질 수도 있었다.
“귀찮게 되었는데…….”
앓듯 탄식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의 반응이나, 곤란하게 된 저희 사신단 같은 게 아니었다.
어쨌든 둘째 왕자를 만난 사람은 아르망이었다. 어째서 만나려 했던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으나 아마 황제에게 받았을 밀명 때문이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행동했던 사람은 아르망이니 그 백작이 황제 앞에서 책임을 질 것이다.
혹 온느발레가 곤란해져 목숨 하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페레이라 측에서 목숨 하나를 내놓을 것이다. 책임자는 아르망 페레이라였다.
따라서 뮤니르 자작은 사신단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온느발레를 떠나기 전 받은 ‘부탁’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것이 염려스러울 뿐.
뮤니르 자작은 ‘로헤올 공작’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귀족이었다.
뮤니르는 로헤올의 가신 출신으로, 약 40년 전에 독립한 가문이었다. 로헤올이 그 독립을 도와 영지 일부까지 선뜻 내어 주었다. 오래도록 한결같은 충심으로 로헤올을 모신 뮤니르를 당시 로헤올 공작이 기껍게 생각한 덕분이었다.
그 이후 로헤올과는 더는 관계가 없게 되었음에도 전 뮤니르 자작도, 현 자작도 로헤올이라 하면 일단 호의와 존중, 존경을 가지고 숙였다.
윌리엄 로헤올이 뮤니르 자작을 이 사신단에 꽂아 넣은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은여우단과 접촉하여 주면 좋겠어.]
입 무겁고, 믿을 만하고, 이런 기가 막히는 부탁을 수행할 수 있는 권력과 신분을 가진 사람이라면 뮤니르 자작만큼 적당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찾을 사람이 있네. 그들과 만난 적 있는 사람일 것 같거든.]
뮤니르 자작은 윌리엄의 간절하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얼숍을 떠나기까지 며칠간 시간을 벌 수는 있다. 사신단이 귀국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왕자가 죽어 아무리 제국의 사신단이라 하더라도 자유로이 거동하기도 어려울 이 상황에 겨우 며칠 가지고 무엇이 가능할까.
그 며칠만으로 은여우단에 접근하기가 과연 가능할 것인가.
* * *
조금 전, 아리오의 얼숍에 가 있는 사람이 아티팩트를 써서 급보를 전해 왔다.
차기 왕위 다툼에 적극 뛰어들었던 둘째 왕자가 죽었다는 보고였다.
라파엘은 놀라지 않았다. 아티팩트를 집어넣는 손길도 덤덤했다.
힘 싸움에서 밀려나 온느발레에 왔던 제이의 근황을 은여우단의 기사가 살피고 있었다는 사실을 뮌제에게 들은 바 있었다.
보내 놓고 잊으면 될 왕자를 굳이 그런 엘리트 기사에게 아티팩트까지 지원해 주며 살피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뮌제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조금 전의 보고에서 중요한 것은, 덕분에 그날 그 대화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라파엘은 당시의 뮌제를 떠올리고는 짧게 웃고 말았다.
오후, 나른한 시간, 뮌제는 졸음에 겨워하며 몸을 웅크리고는 끙끙 앓으며 제이 이야기를 했다. 그의 허벅다리에 이마를 기댄 그녀의 등을 토닥였었다.
그날따라 유독 피곤해해서 결국 그대로 재웠던 것도 기억났다.
라파엘은 잠든 뮌제를 침실로 옮기고, 뮌제 모르게 잠시 에흐베에 가서 그의 일정을 마친 후에 로헤올 저택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여전히 푹 잠들어 있던 뮌제를 침대 옆 의자에 앉아서 보다가…….
아. 그는 그리 앉아서 잠들었다.
“…….”
서늘하고 평화로웠던 그 밤.
라파엘은 한 뼘 두께로 쌓인 종이 뭉치를 뒤적여 필요한 세 장을 빼내어 끌어오며 소리 없이 웃었다.
이번에는 쓴웃음이었다.
어디에 있든, 잠은 잘 자고 있을까.
그녀가 죽었을 리 없으니 어딘가에서는 살고 있을 텐데.
제 앞에서야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은 면면도 보였지만 그 외의 자리에서는 칼과도 같았던 사람이다.
잘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육신과 정신이 평온하게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라파엘은 그녀가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있든 행복하고 평온하게 있기를 바랐다.
그가 없는 시간이 그녀에게 행복하다면, 그는 슬프겠으나 감당하겠다. 뮌제가 지금 행복하다면 되었다. 그러나 평생 홀로 둘 수는 없었다.
그의 욕심이었다.
라파엘은 뮌제가 홀로 있기를 원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뮌제 없이 살 수 없었다.
“…….”
라파엘은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보고서를 살피다 새 종이를 꺼냈다.
눈길은 계속해서 보고서에 박힌 채로, 굳은살 박인 손이 옆을 더듬었다. 펜이 잡혔다.
손은 느리게 돌아왔다.
빈 지면 위에서 잠시 멈춰 있던 펜촉은 이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뮌제가 장난하며 만든 암호 체계는 수두룩했다.
원한다면 응용하여 더 복잡하게 만들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은 저희가 만든 암호 자체에 익숙했다.
뮌제와 라파엘은 그중 하나씩을 골라 저희 최측근과 공유했다.
로헤올 가신은 에흐베의 신하가 쓰는 암호를 알아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에흐베의 사람은 로헤올 가신이 쓰는 암호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나 뮌제와 라파엘은 둘 다 알아볼 수 있었다.
함께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라파엘을 믿고 삶을 공유하던 뮌제였다. 그리고 그런 뮌제가…….
글자들을 담고 있는 라파엘의 눈동자가 건조해졌다.
“…….”
……그런 뮌제가.
그런 뮌제가 라파엘을 믿지 않고 배제하던 일 대부분의 중심에 윌리엄이 있으니, 라파엘은 윌리엄에게서 오히려 눈을 거두지 못할 수밖에.
매끄럽게 움직이던 시선이 멈추었다.
보고서의 핵심을 추려 암호화해 가던 손도 멈추었다. 라파엘은 눈만 들어 문 쪽을 일별했다가 도로 종이를 보았다.
거의 완료해 간다.
동요하지 않은 손이 단정한 글씨로 지면을 채워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 단어가 쓰였고, 그는 다른 이름으로 서명했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입실해.”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어온 옥타브는 문을 닫고 조용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어제 온느발레 벨린 남작의 비리가 고발되었습니다. 누군가가 황제에게 익명으로 투서하였습니다.”
라파엘의 눈이 멈칫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아직 들고 있던 검은 펜대를 엄지가 한 차례 쓸어내렸다.
황제에게 익명 투서는 가능할 수가 없었다.
마법이 있는 세상이라, 올라가는 서간 하나하나 굉장히 철저하게 관리받는 탓이다.
“어느 과정에서 섞여들었는지는.”
“섞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황제의 책상 위에 단독으로 놓여 있었다 합니다.”
“…….”
“침입을 한 건지, 아니면 황궁 내부의 누군가가 황제 모르게 아티팩트를 사용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마법사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황궁이 소란스럽습니다.”
“…….”
에흐베 대공은 침묵했다.
아리오의 왕자가 죽었다는 보고를 조금 전에 받은 상태였다.
만일 사신단 책임자인 아르망 페레이라가 아리오에 예의를 갖출 것이라 결정한다면 일정을 앞당겨 곧 돌아오게 될 것이다.
갖추지 않겠다 한다면 본디 일정대로 넉넉히 머문 후에야 돌아오리라.
그리고 라파엘은 페레이라 백작이 얼숍에 일정대로 머물다 올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 남자. 온후한 껍데기를 뒤집어쓴 속은 뒤틀릴 대로 뒤틀린 사람이었다.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다.
사신단 도착에 앞서 넉넉히 시간을 두고 미리 루미나리에단의 옛 단원을 아리오에 보내 놓을 정도로 치밀했다.
뮌제와 관련하여 제이 왕자가 한창 벌이는 경솔한 짓이 있으니 아리오 왕이 온느발레 사신단을 주시할 거라는 것쯤은 그 백작도 당연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아리오 왕이 제이를 왕세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백작이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멀쩡하게 거동하던 둘째 왕자가 하필이면 온느발레 사신단이 머물 때 급사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기분 나빠 할 확률이 높았다.
애국심이 아니라 자존심이다.
여느 가주가 그렇듯 아르망 페레이라 역시 국가보다는 가문과 권력인 사람이지만, 왕국이 온느발레의 귀족을 상대로 수작을 부리려 드는 건 그 어떠한 가주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런 자존심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벨린 남작 소식을 들으면 페레이라 백작은 온느발레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고발당한 벨린은 페레이라를 대영주로 둔 가문이었다. 아리오로 향한 사신단의 대표인 그 페레이라 백작이 맞았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 백작은 반드시 귀국해야 했다.
“…….”
그럼 이리 대담한 고발이 과연 우연히 지금 일어난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둘째 왕자를 처리한 자가 실로 제이를 왕세자로 세우려는 아리오의 왕이라 하더라도 온느발레 황궁에 누군가를 침입시키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침묵하던 라파엘이 가만히 물었다.
“무슨 고발인지는 알아냈나.”
“죄송합니다. 세세한 내용은 아직입니다.”
“…….”
짐작하건대, 아마 영주가 저지르기 쉬운 비리에 관한 고발일 것이다. 눈감고 넘어가도 될 만한 평범한 비리.
그러나 이번 일에서 문제되는 건 그 비리의 내용이 아니라 누군가가 황제에게 익명 투서를 성공하였다는 사실 자체이므로, 그 누군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벨린 남작은 조사당할 것이다.
담담한 얼굴로 돌아온 그는 고개를 까닥였다.
“계속 주시해.”
“예, 각하. 그리고 기사에 대한 정보가 조금 전 갱신되었습니다. 중앙탑의 땅에 다시 들렀다고 합니다. 숙박 장소를 잡는 것까지 확인하고 연락해왔습니다.”
베렐에 대한 보고였다.
라파엘의 연회색 눈이 서늘하게 멈추었다. 그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