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은여우단도 꽤 어두컴컴한 구석이 있지만 은늑대관은 은여우단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운 일을 하는 기사단이다.
흑백 대비라도 해 놓은 것처럼 늘상 웃는 얼굴인 엘르시어와 다르게 테드는 미소 없이 왔다.
젊은 백작을 본 발롬브로사는 요동치는 심장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가 놓았다. 회의실 안 촛불이 수십 번 흔들렸다.
이제부터 테드에게 보고받을 내용은 내일 엘르시어에게 일부 하달할 것이다. 제이를 비밀리에 보호하는 기관은 은여우단이기 때문이다.
발롬브로사는 입 다물고 있는 와중에도 목이 멘 것을 느꼈다. 침으로 목구멍을 적시고도 조금 더 가라앉힌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언제.”
“곧 올 것입니다.”
“……그런가.”
발롬브로사는 눈을 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제이가 빨리 귀국하게 되어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던 일.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제이가 사고 치기 전에 온느발레의 사신을 빠르게 되돌려 보낼 방법이기도 하였다.
테이블 위에 올린 그의 손이 구부러졌다.
검지 끝이 강하게 표면을 눌렀다. 손톱 아래로 테이블이 파고들었다. 빠드득하는 소리가 났다.
소름 끼치는 침묵 속에서 두 사람 모두 호흡만 하였다. 닫힌 창문 사이로 바람이 한 줄기 파고들었는지, 촛불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도 문득 들렸다.
오래지 않아 시종장이 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왕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갔다. 발롬브로사는 일언반구 없이 앞만 보았다. 마음 급해진 시종장이 문밖에서 소리를 높였다.
“전하! 베릭 왕자가 졸하셨습니다!”
아리오 왕위 계승서열 두 번째. 둘째 왕자의 이름이다.
미안하다, 아들아. 발롬브로사의 고개가 올라갔다.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테드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반년간 수고 많았어. 다음 일은 잠시 기다리게.”
“그리하겠습니다만…….”
바로 다음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백작이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발롬브로사는 눈을 부러 가늘게 뜨고 미소했다.
다음은 제이가 하는 짓을 보고 일을 진행해야겠다.
발롬브로사는 온느발레에 가기 전의 제이를 보고 왕세자를 결정했었다. 귀국한 제이를 다시 면밀하게 살펴야 했다. 조금 전 그리 결정했다.
나라를 말아먹을지도 모를 왕을 세울 수는 없다.
“상황을 봐야겠어.”
“받듭니다.”
그렇다면야.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인사한 백작이 회의실을 나가자, 시종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발롬브로사는 거의 함께 나이 들어온 충성스러운 측근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침이 느릿하게 넘어갔다. 숨도 모질게 넘어갔다.
슬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흔들리는 숨을 뱉던 발롬브로사는, 시종장이 보지 못하게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
미안하다. 아들아.
다음 왕이 될 아이를 위한 것이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동복형제, 이복형제를 죽이려 하는 아이들은 살려둘 수 없었다.
이 왕실의 젊은 피는 단 두 아이만 남게 될 것이다. 그마저도 제이가 혼인하여 아이를 낳게 되면 제이만 남기고 나머지 하나는 죽일 계획이었다.
그의 부친이 그런 처리를 해 주지 않았던 탓에 발롬브로사는 왕위에 오른 직후 죽도록 마음고생을 하였다. 굳이 다음 대 왕도 그런 고생을 하게 할 이유가 없다.
둘째 왕자가 꾸준하게 섭취해 온 독의 마지막 분량. 그것을 오늘 저녁에 넣을 예정인데 괜찮은지 노을 지던 시각에 물어 온 테드를 발롬브로사는 허락한 바 있었다. 오늘 오후 아르망 페레이라와 왕자가 살롱에서 대면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였고, 따라서 그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제이의 상태를 알게 된 지금은 꽤 후회가 되는 결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래도, 그런 게 아니더라도, 자식이다.
발롬브로사는 왕자를 어떻게든 살리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궁으로 뛰어갔다.
살아서는 아니 되겠으나, 그래도.
그래도.
미안하다. 내 아들아.
* * *
위즈는 잠시 멈추었다.
하현달 기운 밤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어둠과 정적에 잠긴 길을 산책하는 건 때때로 위험한 일이었다. 자칫하면 오물을 밟거나 돌멩이를 밟아 넘어지는 탓이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슬며시 들어 올리고 신발 앞코로 돌멩이를 톡 찼다.
그리고 푹 한숨을 쉬었다.
“푸우…….”
요즘은 산책이 마음을 가라앉히기는커녕 몸을 잔뜩 곤두서게 했다. 어느 길을 가든 느껴지는 것 때문에. 새 책은 언제 오려나. 잠시 묵묵히 서 있던 그녀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잡동사니 길에 들어서고 얼마 걷지 않은 곳에서 철푸덕 넘어졌다.
함정이었다.
거하게 온몸으로 뒹군 위즈는 고개만 들어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았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바닥이 차가워서 기분 좋았다. 다리 쪽은 따뜻하고. 나른하게 꿈틀거리다가 두 다리를 신나게 투닥투닥 움직였다.
정강이뼈에 의해 박자에 맞춰 허리를 신나게 얻어맞은 남자가 결국 소리를 질렀다.
“아프다고!”
“으갹!”
놀란 위즈가 다리를 멈추었다.
힘이 풀린 두 다리가 공중으로부터 쾅 내려앉았다. 종착지는 남자의 허리였다.
그에 남자는 반쯤 죽어서 신음을 흘렸다. 이 자식, 분명 위즈다……. 썩을……. 술이 다 깨네…….
술에 취해서 길바닥에서 잔 게 오늘만큼 후회된 날이 없었다.
위즈는 꾸물꾸물 움직여 물러났다. 그리고 남자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두우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고 있던 남자는 난데없이 밀고 들어오는 얼굴에 기겁했다.
심각하게 그를 살피던 위즈가 눈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어디서 봤는데…….”
“그래. 구면이다.”
“아. 구면 씨.”
“…….”
가끔 위즈는 굉장히 무식해 보이곤 한다. 얘는 책들은 쌓아두고 국 끓여 먹고 있나.
무명의 첼리스트는 소개를 포기하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좀 살 것 같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점만 빼면 좋은 밤이다. 눈앞에 위즈가 있다는 것도 빼고.
술 냄새 섞인 한숨을 쉰 그는 이마를 짚고 물었다.
“산책 다녀오는 길이냐?”
“예, 구관조 씨.”
“그냥 가라.”
그는 단호하게 이별을 고했다.
바보와 대화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은 건 아니었다. 위즈도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위즈는 꼭 한 마디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예, 구 년간 지하실에서 묵은 양말 씨.”
“……일부러 그런 거지? 너, 일부러 한 거지?”
위즈에게 불린 이름 중 역대 최고의 이름이었다.
위즈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뒤돌았다. 그리고 앓는 소리를 흘리며 발랄하게 걸어갔다.
“아우……. 무릎……. 피 나는 것 같아……. 넘어져서…….”
“…….”
“넘어져서…….”
“…….”
떠난 자리 아름답게, 그녀는 음악가에게 대단한 양심의 가책을 남기고 떠났다. 그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앞으로 밤술은 자제하자.
위즈가 이름을 헷갈릴 때 길에 들어섰다가 대화를 듣고, 시야가 허락하는 내에서 보게 된 제이는 소리 죽여 쿡쿡 웃었다. 재미있는 여자다.
잡동사니의 길 거주자들은 다 이럴까.
부왕과의 대화로 인하여 기분도 좋지 않고 하여 예술가들이 사는 구역을 한번 볼까 하여 왔는데, 처음부터 재미있었다.
아직 앉아 있던 남자도 주섬주섬 일어나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은 길에 홀로 있게 된 제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일단은 거닐어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쉰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결정을 철회했다.
잡동사니의 길의 모든 골목은 주변 건물에 가려 큰길보다 훨씬 어두웠다. 더듬더듬 걸어가던 제이는 어떤 길쭉한 원통형의 무언가를 밟아 휘청하였다. 그는 멈춰 서서 발 앞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길 끝은 보이지 않았다.
“…….”
아까 그 여자가 왜 넘어져 있었는지 알겠다. 조금만 방심해도 앞이 안 보여.
발로 바닥을 더듬어서, 자신이 조금 전 밟았던 가는 붓 같은 것을 툭 찼다. 그는 실실 웃었다. 과연 예술가의 거리. 길에 굴러다니는 게 붓인가.
조금만 더 들어가면 땅따먹기를 하다 남은 분필이나 돌멩이, 쓸데없이 인내심을 겨루고자 바늘을 만들기 위해 갈다 만 동전 같은 게 더 많이 굴러다닌다는 걸 그는 몰랐다.
낮에 오자.
아까 그 남녀의 대화를 듣고 기분도 퍽 전환이 되었다. 성문 쪽으로 더 산책하다가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제이는 기분 상쾌하게 뒤로 돌았다.
그로부터 두 시간 정도 밖을 돌아다니다 왕궁에 돌아왔다. 제 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제이는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온느발레에서 왕실 일원을 ‘손님’으로 보내라 요구하였을 때보다도 소란스러웠다.
기사들이 뛰어가는 것까지 보였다. 명예직에 가까운 기사들이라 하더라도 병력이 급히 움직이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 결코 아니다.
도대체 뭔가. 이 밤에.
제이의 걸음이 느려졌다.
궁 곳곳에 걸린 둥그런 등에서 흐르는 은은한 흰빛은 꿈과도 같은데, 울며불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현실이다. 왕자는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아까 만났던 부왕과 마주친 탓이었다.
하얀 얼굴을 한 발롬브로사도 아들을 보고 주춤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왕의 얼굴에 건강하게 주름진 미소가 떠올랐다.
다정하지도 않았고 상냥하지도 않았으나 부드러웠다. 발롬브로사는 뒤따르는 수행원을 모두 멈추게 하고 천천히 제이에게 다가갔다.
신장 비슷한 두 사내가 마주 섰을 때, 울음으로 습기 찬 바람이 음울하게 불어 왔다. 발롬브로사는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 시간 전, 베릭이 죽었다.”
동복에서 나온 둘째 형님의 부고는 난데없이 날아왔다.
제이가 왕궁을 나선 직후, 혹은 나서기 직전, 혹은, 나서던 그때. 그의 형제가 죽었다.
제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현실감이 없었다. 듣고 이해하였는데, 무슨 말인지 분명 이해하였는데도, 그래도 더 이해해야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죽었다고요.”
“그래.”
“그 형님이.”
“그래.”
동복형제였다.
왕위를 위하여 제이를 적대한 탓에 어렸을 적부터 교류가 적어졌었지만,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숨 쉬며 살아 있던 형제였다. 제이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왜……?”
“심장이 갑자기 멈춘 모양이더군.”
그렇지. 심장이 멈추면 죽지. 사람은 그리 죽지……. 하지만 왜? 심장마비가 왜 와? 평소 심장이 나쁘기라도 했나? 그리 건강하였는데?
형제가 죽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무언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제이는 자신이 무얼 이해 못 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발롬브로사는 그런 아들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했다. 제이는 슬퍼하지 않았다. 남들에게 보이는 게 중요한 다른 왕자 공주들은 이미 어떤 식으로든 슬픔을 표했는데, 제이는 아직도 유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리고 왕은, 제이가 이러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살인을 명령하였던 그는 조금 지쳐 있었다.
설마 오늘 제이가 밤 외출을 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서로를 설득하지 못한 대화라 해도 그런 대화를 한 직후인데 하룻밤만 얌전히 있을 수도 없었나.
미리 은여우단에 무엇이든 전달을 해 놓을 것을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기 위하여 테드에게 시켰던 일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보고를 듣고 크게 노했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발롬브로사는 테드와 엘르시어를 불러 새로 알리바이를 만들 것을 당부했다.
또한, 앞으로 한동안 제이에게 아무 말 없이 지켜보리라 하였던 결정을 바꾸었다.
왕은 진실로 노했다. 덧붙여, 매우 절실하였다.
아들 죽인 군주가 말하였다.
“너를 거두게 하지 마라.”
“…….”
제이의 시야가 좁아졌다. 발롬브로사만이 보였다. 제이는 눈을 고쳐 떴다.
발롬브로사는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실로 인자하게 싸늘했다. 제이는 망연하게 부왕을 보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죽이셨습니까?”
“무얼.”
사람으로도 지칭하지 않는 반문에 제이의 입가 근육이 떨렸다.
혹 목숨을 빼앗기거든 온느발레인에게 뺏길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왕실, 느꼈던 것보다도 더 대단하다. 설마 부왕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제이는 고개를 슬며시 돌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아니지. 그 피가 다 어디서 나왔겠나.
청년은 부왕을 앞에 두고, 성인 된 후에 처음으로 오싹해졌다.
[어쩌면 당신을 가장 귀애하시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코웃음 치는 날 위로했던 그 말이 이리 되돌아왔습니다, 뮌제. 미안. 내가 하는 이 원망을 듣지 말아요. 그런데 당신이 틀렸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그녀는 다 틀렸다.
윌리엄도.
이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