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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9)화 (39/120)

# 38화

소름이 돋았다. 황제가 겨우 감정 관리 하나 못해서 그 로헤올 공작을 죽였다고? 설마 그럴 리가 있나! 그 여자가 왕국에는 원수 같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일국의 황제다. 폭주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얼굴인 왕을 보며, 제이가 태연하게 반문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있어야지! 당연히 다른 이유여야지!

그는 제이가 세상에 난 이래 처음으로 제이의 머리를 의심하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이유로 공작을 죽였을 리가 있겠나.”

“그 여자가 상식적이었으면 공작을 죽이려 들지를 않았겠지요.”

“그건 그래.”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발롬브로사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슬슬 인지하고 있었다. 온느발레에서 바보가 된 게 아니라면 제이가 저리 생각하게 된 근거도 있을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왕이 물었다.

“혹 그 이야기가 온느발레의 주류 의견이더냐?”

“그거야 모르지요.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는 족족 무시당했는데. 덕분에 혼자서 떠들어서 그네들 마음 흔드는 건 꽤 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너 혼자만의 의견이라고?”

“흐음……. 제가 로헤올 저택에 머물렀습니다.”

“그래.”

“이건 비밀이지만, 실은 대공이 자주 찾아와서 뮌제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종종 윌리엄 로헤올 그 썩을 자식과도 대화하고.”

“……그래.”

원래 이렇게 말이 험했나.

그러고 보면 그는 제이가 온느발레로 떠나기 전에 제이와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들의 능력을 알고 그 영리함도 알았지만, 거의 전부가 보고를 들어 안 것이다.

아. 정말 그렇군.

발롬브로사는 자신이 제이라는 인간 자체를 직접 겪어 본 게 몇 번 없다는 걸 새삼스레 자각했다. 제이의 말씨가 어땠는지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었다. 제이와의 만남도 오히려 이 아이가 귀국한 후에 더 잦았던 것 같다. 그는 아들을 몰랐다.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제이의 말에 애써 집중하였다. 제이는 복잡해진 왕의 심중을 모르고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갔다.

“저와 공작은 친해졌고, 공작은 종종 황궁에 갈 때 저도 데려가곤 하였습니다. 황제의 살롱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좋을 거라면서.”

그건 꽤 고마운 일이었다. 발롬브로사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공작이 제이를 그 정도로 대우해 주었었나.

“앉아 있다 보면 황제도 짬을 내어 들르고, 또, 공작도 들르고, 또, 에흐베의 대공도 들릅니다. 4년간 두 번. 딱 두 번을 대공이 온느발레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두 번 모두 하필이면 황제의 살롱이었습니다.”

“…….”

“처음부터 보였습니다. 황제가 대공을 마음에 두었다는 게.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르지요.”

“…….”

“제가 보기에도 황제는 철저하고 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이라는 게 뭐라고, 연심을 감추지를 못했어요. 감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보였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새어 나오고, 저기서는 저렇게 새어 나오고. 완벽하게 감추지 못했습니다. 정말, 옆에서 보니 보였습니다. 무언가를 짐작한 눈으로 주시하니 보였습니다. 황제와 대공이 함께 했던 자리가 단 두 번이었는데.”

“…….”

“웃긴 게, 뮌제를 향한 적대감은 참 잘도 감춰서 이 사달이 났다고 생각합니다.”

왕은 제이가 무엇을 말한 건지 이해했다.

본디 정치가들은 연심보다는 적대감에 익숙하고, 적대감을 다루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말랑말랑한 감정에 세상의 어떤 정치하는 자가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

또한, 일반 귀족들보다는 황실과 왕실의 일원이, 황실과 왕실의 일원보다는 황제와 왕이 연심에 덜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단적인 예로 발롬브로사도 그러했다. 그는 자식들을 많이 둔 왕이지만 제대로 된 진심을 느낀 일이 없어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색했다.

하물며 그 젊은 나이의 황제라고 다를까.

발롬브로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네가 보고 느낀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

“하지만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보지 못하는 이들은 생각이 다르다. 너, 황실과 로헤올의 계보를 아느냐?”

굳이 떠들고 다닐 사람이 없으니 타국의 평범한 젊은이들은 배우고도 금세 잊을 계보였다.

제이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는 것에도 발롬브로사는 너그럽게 생각하고 지나갔다.

많은 사람이 로헤올 전 공작의 죽음이 미심쩍다는 것, 그 배후에 황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황제가 어떤 남자를 남몰래 사랑하였다 하는 그런 것을 생각지도 못한 채로도 황제를 배후로 짐작하게 된 이유가.

발롬브로사는 심장이 빈 것 같은 기분으로 한숨을 흘렸다.

상대의 살해를 고려해야 할 정도로 치열한 승계 싸움은 지긋지긋했다. 그걸 적어도 다음 대에는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그는 노력하고 있었다. 적어도 다음 대만이라도.

그는 한층 초점 뚜렷해진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그리고 말하였다.

“황제와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은 사촌지간이다.”

“……예?”

“현 황제가 황위에 오른 뒤로, 생전 뮌제 로헤올은 황위 계승 서열 두 번째였다.”

뮌제의 부모가 만나 연애 결혼한 것도 수십 년 전이니 잊고 지내는 사람이 꽤 있다. 한시도 잊지 못하고 경계하는 사람도 있으며. 젊은 황제처럼.

“그런 사람이 저보다 몇 살 터울로 나이 많은 데다, 가문도 잘 이끌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하지 않았더냐. 유명하다 뿐인가. 존경받고 있었지. 황제가 위협으로 받아들일 만 하였다.”

“…….”

“정치와 권력이다. 뮌제 로헤올은 그런 무거운 이유로 죽었어. 우리는 그렇게 짐작하고 있다.”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으니, 제이가 말한 사랑 운운하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발롬브로사는 눈을 약간 찌푸리며 쓰게 웃었다.

“억울하지. 억울한 죽음이 맞다. 그러나 네가 생각한 것만큼 하잘것없는 이유로 죽은 건 아니다. 말했듯, 온느발레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죽음이야.”

“…….”

“네가 손댈 수 없는 죽음이고. 발 들여놓아서도 안 되는 죽음이다. 손대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는 말이지. 네가 아리오의 왕자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고.”

“……그 말씀은 왕자로서 마땅히 이 나라를 염려한다면 언행을 사려야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발롬브로사의 대답이 끝나자 제이가 왕을 놀리듯 활짝 웃었다.

“염려하지 않으니 사려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순간, 진지하게 염려 어린 속을 털어놓던 분위기는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발롬브로사의 눈에 시퍼런 힘이 들어갔다.

분노로 끓어오른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렸다.

무엇을. 어째?

제이는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던 큰 웃음을 버리고,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조롱이 역력하여 넘쳐 흘렀다. 청년은 말했다.

“왕자로 태어난 덕분에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았다는 건 알겠습니다만, 저는 이 나라의 왕자로서 겪어야 했던 설움을 도무지 잊지 못합니다.”

“너…….”

“형제들과 그들의 외척에게 받아야 했던 경계와 위협은 어떠하며, 전하께 특별하게 받은 것 역시 없습니다. 전 제 서러움이 이 세상 어떤 서러움보다도 크게 느껴지는 마음 좁고 이기적인 종자입니다.”

여태 발롬브로사가 그러했듯, 이제는 제이의 음성이 차분하고 나긋했다. 조롱 어린 웃음도 어느 순간 멈추었다. 제이에 의해 깨졌던 분위기가 제이에 의해 되돌아왔다.

차분하게 저를 털어놓는 아들을 발롬브로사는 눈 부릅뜨고 응시했다.

제이는 쓰게 느껴지도록 미소하였다가 잠시 옆을 보았다. 오르는 감정을 내리누르기 위하여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왕은 속지 않았다. 저 시선 처리 또한 연기다. 왕자는 다시 부왕에게 시선을 돌리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 나라와 이 왕실이 제게 주지 못한 것을 뮌제 로헤올 공작은 주었습니다.”

“…….”

“세간의 부모가 준다 하는 안온한 보호. 마음 평온해지는 감정. 정치적으로 자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감수하고 제게 그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절 보호하고자 하였던 사람입니다.”

“…….”

“제게 그 사람은 부모입니다. 친구입니다. 형제입니다. 스승입니다. 그냥, 유일한 사람입니다.”

추억하는 자의 눈이다.

꿈을 헤매는 게 아니라, 현실을 살며 추억하는 자의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발롬브로사는 지금 제 아들의 저 모습에 압도되고 말았다. 초점이 살짝 흐려지고, 어느새 아주 약간 비껴간 시선, 기울어진 고개, 부드러운 미소, 팔걸이 끝을 감싸는 것처럼 구부린 왼손.

왕은 그의 앞에서 이토록 감정과 감정의 의미를 주장하는 사람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도 맞습니다만, 전 그 사람이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서 그 사람의 죽음의 전말을 납득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습니다. 마음이 슬프고 비참합니다. 하여 이 모든 것은 절 위해서입니다.”

“…….”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이유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반드시 황제를 지목하고 말 것입니다. 윌리엄 로헤올을 지목하고 말 거고, 그래서 두 사람이 뮌제 로헤올 그 사람을 존중하여 고개 숙이게 할 것입니다.”

어차피 서로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설득은 쓸모없다.

발롬브로사는 굽힐 수 없다. 제이도 굽힐 생각이 없었다.

누가 보면 세상에서 가장 마음씨 좋은 사람인 것처럼 부드럽게 미소하고 있는 아들을 부친은 바라보았다.

“아리오가. 네게 가치 없느냐?”

“제게 지원되는 물질의 양만큼은 가치 있습니다.”

시원한 대답이었다. 팔걸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청년을 보는 눈에 탄식이 어렸다.

발롬브로사는 제이가 정말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이제 확실하게 깨달았다.

두드려 패서 가치관을 고쳐 낼 신분도 아니고, 그런 나이도 아니었다. 교육도 이미 늦었다. 저걸 고치려면 충격이 필요하지만, 세상에 어미 새 보는 새끼 새보다도 맹목적인 것처럼 보이는 저 자식을 꿇어 앉힐 충격이 과연 무엇일까.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로헤올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실로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널 아껴 주었을 것 같더냐.”

“예에. 물론이지요.”

뺀질거리기는 했지만 이 대답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제이는 단정한 자세와 걸음으로 나갔다. 존귀한 사람으로서 받은 교육은 저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발롬브로사는 고개를 젖혔다. 기도하듯 깍지 낀 두 손을 이마에 대고 눌렀다.

저놈이 계속 저리 미쳐 있을 거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온느발레에서 저리 훌륭하게 멍청해져 왔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난 반년의 시간이 있을 때 오늘의 대화를 해야 했는데. 그럼 대비할 시간이 넉넉했을 것을.

머릿속을 어둠으로 비워 내던 그는 아들을 향해 문득 조소했다. 저 멍청한 놈. 저, 멍청한 놈. 삶의 목표로 붙잡은 것이 죽은 사람이라니, 저 멍청한 놈.

설득이 먹히지 않을 때 하려던 말도 발롬브로사는 하지 않았다. 네가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말을 지금 해서는 아니 될 것을 직감했던 탓이다. 왕의 그 계획을 이용하여 저것이 또 무슨 정신 나간 짓을 벌일 줄 알고.

“…….”

그의 상념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초 하나가 완전히 흘러내려 꺼질 정도로 오래. 지독하게 착잡했던 탓이다.

어느 순간 깍지가 풀렸다.

그 오랜 휴식에도 분노는 여전했다. 오히려 더 타올랐다.

두 손이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갔고, 허공에서 주먹 쥔 오른손은 옆에 있는 테이블을 내리쳤다.

쿵!

사람 아낄 줄 아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행복을 알게 된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사로잡혀서 미련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건 비단 왕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말이었다.

이상한 데에서 상식 밖으로 튕겨 나가 있으면 어쩌자는 건가.

다시 테이블을 내려칠 것처럼 올라갔던 주먹은 부들부들 떨다가 얌전히 떨어졌다. 문밖의 시종장이 입실할 사람을 알렸기 때문이다.

발롬브로사는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테드 서튼 백작. 은늑대관의 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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