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8)화 (38/120)

# 37화

“로드!”

“괜찮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소란에 모두의 시선이 제이 있는 곳을 향했다.

주저앉아 있는 왕자가 보였다.

왕자는 의식은 있었으나 표정이 묘했다.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고 얼떨떨한 것 같기도 하였다. 어딘가가 아픈 것처럼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큰 통증은 아닌 듯 보였다.

아르망의 눈썹이 올라갔다.

……저렇게 해서라도 제지하겠다고?

웃음기 사라진 백작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식었다.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는 주변의 적극적인 염려를 받으며 결국 살롱에서 모셔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왕자가 눈길을 둔 곳은 아르망이 서 있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립했던 온느발레의 기사는 단정한 헛웃음을 흘렸다.

“소지하고 있을 아티팩트와는 별개로, 상당한 실력자를 붙인 것 같습니다. 어찌 주저앉혔는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저앉히는 방법은?”

“다리 오금을 걷어차 버리거나. 복사뼈가 있는 곳을 차거나, 아니면 다른 급소에 힘을 가해서 통증을 가하고 주저앉히는 방법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중 어딜 건드렸는지는 보지 못했다는 말이군.”

“예. 제가 보고 있는 걸 알아차렸을 수도 있습니다. 옷 어느 부분이 구겨지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어딜 걷어찼는지는 중요치 않다. 아마도 기사일 자가 왕자의 몸에 힘을 가했다는 것이 중요할 따름이다.

기사에 불과한 자가. 제지를 위해 감히. 왕자의 몸에.

그런 중대한 일은 그야말로 왕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었다.

아르망은 아닌 척 제 눈치를 보는 주변인을 눈치채고 빙그레 미소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팽팽 휘몰아쳤다.

온느발레에 제이를 순순히 보냈던 왕.

돌아온 제이를 주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물리적으로 제지하는 왕.

설마 제이를 죽이려 하는 게 왕이었나?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제이의 세력이 왕의 자리에 위협이 되어서? 아니, 그럴 리가.

권좌에 관심이 없는 데다 저 죽을 날을 앞당기는 것처럼 뮌제 로헤올의 죽음만 캐고 있는 저 왕자가 위협은 무슨 위협.

그 순간 백작의 캄캄한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치고 떠나갔다.

뮌제 로헤올.

그 사람. 윌리엄 로헤올의 일을 제외하면 진정 이성적이었던 그 사람.

그런 그녀가 살아생전 제이를 극진히 대우하였던 게 떠올랐다. 까닭 없이 그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얻는 것이 있으니 베풀었을 터. 아르망의 안에서 뮌제 로헤올은 미치도록 정치적이고 냉철하며, 어떤 의미로 압도적인 사람이었다.

힐끔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찍어누르는 것 같던 연회색 눈동자에 감탄한 적이 몇 번이었나.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잠잠한 살의 그 자체처럼 느껴져서 숨 막히기는 또 몇 번이었고.

그녀의 옅은 한숨 한 자락에 압도되어 입 다물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 작은 움직임도 계산하여 보이는 사람이, 설마, 왕자의 친구 놀음에 진심으로 어울려 주었을 리가 없었다.

괜히 윌리엄 로헤올이 뮌제 로헤올의 약점이 된 게 아니었다.

괜히 뮌제 로헤올과 라파엘 에흐베가 연인이 아니냐고 의심받은 게 아니었다.

그 밖의 것들이 철저하게 선 그어져 있어서 그렇다.

그런 뮌제 로헤올이, 억지로 보호하게 된 왕자를 대가 없이 존중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뮌제 로헤올이 왕자를 처음부터 각별하게 대우하였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제이가 초기에 한 후작에게 매섭게 조롱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뮌제는 보고 있으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그녀가 언제부터 제이를 존중하기 시작했더라…….

“…….”

팔걸이 끝의 검지가 툭툭 팔걸이 끄트머리를 건드렸다. 아르망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어금니를 혀가 훑었다. 이어 다문 입이 호선을 그렸다.

둘째 왕자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조용히 숙고했다.

희미하게 들리는 생음악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 * *

제이는 제 팔을 움켜쥐는 손에 굳었다.

아르망 페레이라를 향해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아티팩트를 품은 기사가 따라다니고 있는 건 계속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 그의 몸에 손을 댈 정도로 접근한 건 처음이었다.

남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조심하며 고개를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돌렸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오후 햇빛이 그의 얼굴에 비치고 내렸다. 코 그림자가 생긴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는 사납게 속삭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떼어내자니 팔을 휘둘러야 한다.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기사가 저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을 남들에게 숨겨야 할 이유가 없네.

제이는 삐딱하게 속삭였다.

“나는 경 존재를 알려도 상관없어. 셋을 세겠네.”

“전하의 명입니다.”

“내 몸에 손을 대서라도 막으라고?”

“…….”

“하나.”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기사는 한숨을 삼켰다.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되니 더 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마법 아티팩트를 소지한 기사가 왕자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려져서는 아니 된다. 이미 들킨 것 같기도 해서 문제지만.

“둘.”

필요할 시에는 기절시켜도 좋다는 허락도 듣긴 하였다. 그러나 기절시키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다. 푹푹 빠져나오려는 한숨을 계속 삼키며 그는 다리를 움직였다.

누가 봐도 맞은 것처럼 몸이 휘청거리면 곤란했다. 하여 그는 제이를 꽉 잡고 왕자의 허벅지 뒤를 걷어찼다. 동시에 제이의 등의 옷자락을 잡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기습공격을 당한 제이는 여지없이 주저앉았다.

이 정도면 몸이 좋지 않으신 게 아니냐며 제이를 왕궁으로 돌려보내려 하리라. 기사는 여기 있는 귀족 대부분이 제이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설마 기사가 왕자를 때릴 줄은 몰랐던 제이의 눈이 멍해졌다. 이 새끼가……?

“…….”

……그래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주저앉힌 건데.

기사는 모여드는 사람 사이에서 몸을 물리며 왕자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데에 추가로 고통을 가하여 정신없는 사이에 더 확실히 주저앉히는 방법도 있었지만 쓰지 않았었다.

음. 보고할 때 그 점을 강조해야겠다.

설마 살면서 왕실 일원을 때리는 일이 있을 줄은 기사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지가 최우선인지라 저지르긴 했으나 슬슬 등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다.

니킥의 역사가 있다면 오늘 그가 날린 니킥이야말로 전무후무한 니킥으로 기록될 것이다.

등 떠밀려 떠나는 제이의 뒤를 멀찍이 따르며 기사는 연신 침을 삼켰다.

아르망 페레이라와 그 백작의 옆 포퇴유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를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 온느발레 청년, 요양차 온 평범한 귀족일 리 없었다.

* * *

그날. 제이를 제지한 기사는 당일의 근무가 끝난 직후 엘르시어에게 급히 보고했다.

본래대로라면 이튿날 아침에 할 보고였다.

잔뜩 쫄아 있는 수하를 보고 엘르시어는 간단하게 위로했다. 기사는 금세 밝아진 얼굴로 퇴실했다.

그러나 엘르시어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제이는 이상한 곳에서 뒤끝이 있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고생할지도 모르니 조금 더 경계하며 따라다녀야 할 거라는 건 내일 말해 주기로 하였다. 오늘 밤잠이라도 편하게 자는 게 좋을 터.

엘르시어는 그 보고를 취합하여 하늘이 캄캄해진 시각에 왕에게 보고하였다.

묵묵히 오후의 일을 들은 후, 엘르시어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고 다른 방으로 몸을 물린 발롬브로사는 한동안 구토했다. 요즘 먹는 대로 얹힌다.

그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이 웬수 같은 아들놈…….”

정말 혁신적으로 속 썩인다.

세상에 어느 왕족이, 세상에 어느 왕자가, 자기 목숨과 자기 입지를 걸고 남의 나라 공작의 죽음에 대해 매달린단 말인가.

차라리 역모라든지 형제들을 암살하기 위한다든지, 그런 이유로 사신을 만나는 거라면 걱정이 덜 되겠다.

하여간 누가 그의 아들 아니랄까 봐 참신하게 미친 짓을 한다. 발롬브로사도 왕자이던 시절에 꽤 이름을 날린 바 있었다. 오래전 죽은 부왕에게 이제 와서 조금 미안해졌다.

발롬브로사는 건강을 염려하는 시종장에게 휘휘 손을 저어 주고 느릿느릿 양치했다.

엘르시어가 기다리는 회의실로 다시 가자, 웬일로 제이가 와 있었다.

노한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 내일쯤 부르려 했는데 제발로 웬일인가. 짜증 얹은 얼굴로 웃고 있는 걸 보아하니 작당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 차라리 제이가 자질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일이 쉬웠을 것이다.

왕도 짜증스럽게 한숨을 삼켰다.

의자에 앉은 발롬브로사는 일단 엘르시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다리라 했는데 미안하네. 내일 아침에 다시 부르지.”

“예.”

“아, 혹시 이외에 무어 급히 보고할 게 있나?”

“아티팩트가 여전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 피해가 작지 않다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보고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무언가가 더 있겠지만, 보고가 급한 내용이었다면 그런 기색을 어떤 식으로든 보였을 터. 고개를 까닥이자 엘르시어는 정중하게 인사한 뒤에 물러갔다.

넌 좀 앉으라고 제이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제이는 순식간에 불퉁하게 구겨진 얼굴로 앉았다. 일부러 지은 표정일 터다. 발롬브로사는 제 아들이 사람을 대할 때 가면을 쓰고 벗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리하기도 상당히 영리하였다.

그래서 열불이 나는 것이다.

약간 냉소적인 면이 있어서, 사람들에게서 살짝 물러난 곳에 서서 생글생글 웃으며 농담이나 지껄이는 아이였다. 이 정도로 자기 자신을 내다 버릴 것처럼 막 나가지는 않았다. 왕이 되면 나라를 어찌 다스려 갈지 꽤 볼만하겠다 싶을 정도로 발롬브로사를 닮았었다.

온느발레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뮌제 로헤올.

은여우단의 기사를 살려 보낸 것, 상당히 극진하게 제이를 보살핀다는 목격담 등으로 인하여 좋게 생각하고 있던 그 여자가 이제는 골치 아팠다. 살아서는 온느발레 황제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죽어서는 아리오 왕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발롬브로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분히. 정말 차분히. 속 깊은 곳을 내어놓는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침묵도 의도하였고, 지친 것처럼 옅게 흘리는 한숨도 의도하였다. 달과 별 뜬 시각만의 오묘한 밤 정적도 좋다. 머릿속이 명철하게 밝아지는 낮보다야 이 시간이 속내 털어놓기에는 좋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큰 날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입을 열었다.

“로헤올 전 공작이.”

“…….”

“네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겠다.”

그러자 제이가 짧게 웃었다. 냉소적인 헛웃음이었다.

왕은 잠시간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들아, 너는……. 너는 아리오의 왕자다.”

때가 될 때까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하는 왕자다. 그 이후에도 반드시 천수를 누리고 죽어야 하는 왕자다.

“네가 온느발레의 사신에게 로헤올 전 공작의 사망에 대해 캐묻는 건 네 목숨이 위험한 일이다. 나는 황제가 너를 살려 보낸 게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면, 부왕께서도 그 사람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제이가 귀국한 이래 몇 번을 불러들여서 훈계하고 경고하였지만, 제이가 이런 식으로 반문한 적은 없었다.

이는 어느 정도 대화에 응하겠다는 신호였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는 웬만하면 오늘, 설득을 완료해야 했다. 하여 발롬브로사는 기꺼이 대답하기로 하였다.

왕은 한숨 어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

“나뿐만이 아니고, 너뿐만이 아니고, 전 세계 머리 있는 자라면 그리 생각할 것이다. 로헤올 전 공작은 황제가 처리한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그 이유는.”

“황제가 라파엘 에흐베를 사랑하고, 라파엘 에흐베는 뮌제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음?

……음?!

하마터면 침을 삼키다 사레에 들릴 뻔했다. 발롬브로사의 눈이 진심으로 휘둥그레졌다. 뭐가 어쩌고 어째?

부왕의 반응이 제가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자 제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몰랐어? 분명 그건데. 온느발레에서 지켜본 바로는.

발롬브로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들은 것처럼 목이 메고 말았다.

“라파엘 에흐베라면, 그, 대공 말이냐? 전 공작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랑?”

갑자기 이야기가 막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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