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7)화 (37/120)

# 36화

단탑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단장의 집무실 문을 두드리기 직전 멈칫했다.

오른발이 수 센티미터 주춤 옆으로 돌아갔다. 자연스럽게 상체도 약간 돌아갔다. 그는 괜히 뒤를 잠시 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마치 서점이 있는 것처럼 다니엘은 위즈를 떠올리고 침을 삼켰다.

보고는 해야 한다. 보고를 피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제가 받은 느낌이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둡게 빈 복도를 보던 그의 눈이 스르르 내려갔다.

바닥을 보는 초점은 분명하였으나 머릿속은 엉켰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게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갑자기 들려온 부름에 화들짝 놀랐다.

“다니엘 경.”

“엄! 마…….”

“…….”

으아아. 미처 끝내지 못한 신음이 쑥 들어갔다. 민망한 침묵이 지나쳐 갔다.

집무실 문에서 몸을 반 돌리고 있는 다니엘의 정면에서 다가왔던 엘르시어는 웃는 얼굴로 한숨을 흘리고 더 짙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아. 그게. 위즈 씨에게 다녀왔는데.”

일단 다니엘은 비켜섰고, 엘르시어도 집무실 문을 열었다.

먼저 들어선 엘르시어가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삭막하고 서늘한 안을 괜스레 둘러본 다니엘은 직후 눈을 굴렸다.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며 엘르시어가 입을 열었다.

“하여.”

“아. 후보가 될 수 있는 두 가지를 짚어 주었습니다. 현상은 같지만 같은 아티팩트가 아닐 수도 있다면서. 접시 하나와 화분 하나입니다.”

“그래요. 그럼 일단 그걸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하고.”

의자에 앉았다. 다니엘은 그를 보며 머뭇거렸다. 엘르시어는 수하의 망설임을 보고 미소했다.

“거기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위즈 씨가…….”

위즈가? 혹시 또 거친 손님에게 당하고 있었나? 엘르시어의 눈에서 웃음기가 조금 가셨다.

“이제는 오지 말라고. 음. 저희를 거부했습니다.”

“……저희?”

“은여우단을.”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 있었냐는 그 물음의 저의는 실은 ‘너 위즈에게 또 무슨 일 저질렀냐’는 뜻에 가까웠다.

저지른 짓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다니엘은 슬퍼졌다. 심지어 동료 기사들도 그가 위즈에게 다녀온다 하면 아직도 식은 눈으로 보곤 하였다.

“그런 건 아닙니다.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계속 시간 뺏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오늘 서점에 들어갔을 때도 논문이 잘 풀리지 않아서 많이 속이 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바닥에 드러누웠을 정도로.

“거의 울부짖고 있었지요. 바보, 멍청이, 왜 사냐, 죽어라…….”

말하는 중에 다니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이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의아해하면서도 말을 이었다.

“그리고, 특히 단장님은 절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했습니다.”

“나를 말입니까?”

“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제가 추정하기로는’ 단장님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데스페라도 씨라고 하긴 했는데.”

그래…….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겠다.

엘르시어는 숨을 삼켰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이 무거워진 것도 같았다. 명치 부근이 가볍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아서 하지요. 나가 보세요.”

“예.”

경례한 다니엘이 뒤돌았다.

갑자기 전국, 특히 얼숍에 나타나는 마법 아티팩트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난 데다, 사신단과 제이를 살피는 일도 있어 곤두서 있는 갈색 눈동자가 잠시 눈꺼풀에 가렸다.

엘르시어는 수하가 이 집무실을 완전히 나가기 전에 눈 뜨고 입을 열었다.

“경.”

“예?”

뒤돌아본 다니엘이 바른 자세로 서기 전에, 엘르시어는 나직하게 음성을 흘렸다.

“경은 위즈 씨가 은여우단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예? 음. 물론입니다. ……정신적으로는 도움이 안 되지만요.”

서슴지 않은 대답이었다.

은여우단의 단장은 낮게 웃고 말았다. 그 의견에 무심코 동의하고 만다. 그는 고개를 끄덕여 다니엘을 내보냈다.

그는 책상을 몇 번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가 다 져 가는 시각, 등 뒤에서 들어온 붉은 빛에 의해 긴 그림자가 생겼다.

위즈에게는 미안하지만 은여우단을 아예 거부하는 것은 곤란했다.

출근하여 일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과 은여우단의 일을 아예 돕지 않겠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은여우단이 그녀의 존재를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는 아니 된다.

중앙탑 소속의 학자, 탑주의 인증서가 있는 학자, 전 부탑주인지라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겠으나 웬만해서는 그녀를 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 엘르시어를 따로 말하며 거부하였나.

* * *

아, 생각났다.

엘르시어의 집무실에서 나와 제 집무실로 걸어가던 다니엘이 손을 튕겼다. 그때다. 위즈를 며칠간 감시한 후에 신문실로 데려오던 날.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는 자들이요.]

마법사를 무진장 욕했던 일이 있었다.

[실은 멍텅구리, 머리는 심심할 때 차고 놀기 위해 달고 다니는 놈들, 왜 태어났니, 숨 쉬는 것도 아까비, 죽어 버려, 죽어 버리면 좋겠다, 죽일 거야, 기타 등등이기도 하지만.]

“음…….”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때가 훨씬 더 심했군.

다니엘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쓸모없는 기시감이었나 보다. 한숨이 푹 나왔다. 은여우단이 위즈에게 이렇게 직설적으로 거부당한 게 제 탓인 것 같기도 하였다. 하여 미안하기도 미안하고, 착잡하기도 착잡했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서며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 * *

아르망 페레이라는 제이에게 안부를 전하고 묻기 위하여 온 사신이었다.

속사정이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 주된 임무는 그것이다.

그러나 첫날을 제외하고 특별히 제이에게 접근하는 일이 없었다. 그럼 제이가 그들에게 접근하고자 안달이 났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양측 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애꿎은 발롬브로사가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제이가 로헤올 전 공작에 대해 허튼 짓거리를 하는 것을 저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온느발레에서도 전적이 있으니.

되지도 않게 제이를 살핀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가 사신을 보낸 것도 아마 제이를 살펴보기 위해서일 터. 그런데도 막상 어떠한 움직임도 없으니 지켜보는 사람의 신경줄이 오히려 갉작갉작 긁어 먹혔다.

그리고 페레이라 백작과 뮤니르 자작은 발롬브로사의 그런 긴장 어린 속내를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닌지라 무시하고 있을 뿐.

“…….”

오늘도 살롱에 온 아르망은 포퇴유에 느슨하게 앉아서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이의 예상과 같이 그는 비공식적인 임무를 따로 받았다. 그러나 그게 ‘제이가 잠재적인 위협으로 판단될 경우 비밀리에 죽이라’는 것 같은 임무는 아니었다.

페레이라 가문은 황제 나네트의 측근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최측근은 결단코 아니다.

훗날 황제를 배반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그런 ‘위험’한 임무를 순순히 내릴 리가 없었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게다가 황제는 제이에게 큰 관심을 두고 있지도 않았다.

왕자가 분명 미련한 짓거리를 하고는 있어 한 번 살피는 편이 좋기는 좋겠으나, 굳이 죽여야 할 정도로 큰 위협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개 왕자가 움직여 봤자 얼마나 움직일 수 있겠는가.

애초에 제이가 아리오로 귀국하게 된 까닭도 그 왕자가 벌이는 미련한 짓거리와는 거의 관계가 없었다.

사실, 제이의 남매들이 황제에게 제이의 귀국에 대해 비밀리에 청을 올렸었다.

본디 모든 왕실, 심지어 온느발레 황실에도 알력 다툼이 있으나, 현재의 아리오는 유독 심했다. 아직 왕세자를 정하지 않은 탓이다.

제이가 온느발레에 머물 볼모로 정해진 것도, 딱히 왕좌에 뜻 없는 왕자임에도 그를 구심점으로 모인 귀족들이 꽤 많았던 까닭이었다.

하여 제이를 경계한 왕자, 공주가 발롬브로사를 상대로 밀어붙였다. 발롬브로사도 크게 반대하지 않고 제이를 보내도록 정하였다.

그런데 그랬던 일은 잊은 것처럼, 잠시라도 좋으니 제이가 아리오에 돌아와 왕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을 올려 온 것이다.

제이가 때마침 로헤올 전 공작의 사망 배후를 의심하여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기도 하여, 황제는 겸사겸사 그 정중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일 년 정도는 온느발레에 머물 존귀한 자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며 호의도 베풀었다.

[어쩌면 그 왕자를 다시는 못 만날 수도 있겠지.]

황제는 제이가 떠나던 날에 쿡쿡 웃으며 말했다.

아르망도 동의했다. 형제자매라기보다는 정적에 가까운 자들이 좋은 뜻으로 제이를 요청했을 리가 없었으므로.

온느발레의 황제는 제이의 사망을 예상하면서도 왕자를 돌려보냈다.

아리오로 돌아가면, 어쩌면, 뮌제 로헤올처럼 ‘배후가 의심되는’ 의문의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그리도 사랑하는 뮌제 로헤올처럼 죽어 보라. 실로 의문스러운 죽음인지 직접 겪어 보라.

아르망은 황제의 조소 어렸을 속내를 그리 짐작했다.

그가 이번에 받은 비공식 임무도 그 내심과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다.

오늘 이 살롱에서 ‘우연히’ 만날 사람이 둘째 왕자인 것도 그 임무의 일환이었다. 둘째 왕자에게는 실로 우연이겠으나, 온느발레의 사신에게는 의도한 만남이다. 그는 지금 둘째 왕자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로드. 오셨습니까.”

문득 들리는 인사말에 정신을 차렸다. 로드라 함은 왕자를 위한 경칭이다. 아르망은 고개를 들었다. 막 이 방에 들어서는 사람이 보였다.

제이였다.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보름을 가만히 있더니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하필이면 오늘. 달갑지 않았으나 아르망은 미소 지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방에 있는 모두가 그리했다.

예를 갖추는 그들에게 마찬가지로 제이는 대충 예를 표했다.

할 일은 마친 귀족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르망도 도로 착석하며 제이에게서 시선을 비켰다. 그러나 당연하게 주시했다.

제이가 아리오로 돌아와 사교 활동을 시작한 이후 무엇에 몰두하였는지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로헤올 전 공작.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은 뮌제 로헤올 전 공작. 온느발레의 사신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아직 제이를 따르고 있는 귀족들은 제발 입 닥쳐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른 왕자와 공주 뒤에 서 있는 귀족들은 부디 입 열어 자멸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리 왕자가 자멸할지언정 아리오 전체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할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어느 쪽에 몸담은 귀족이라도 꽤 곤두서 있었다.

나라가 있어야 그들의 부귀영화도 있다.

의외로 제이는 아르망에게 무작정 돌진하지 않고 한 창가에 기대어 섰다. 한 자작이 제이에게로 다가갔다.

거기까지 확인한 아르망은 다시 앞의 바닥을 보았다. 다른 방에서 연주되고 있는 음악이 잔잔하게 귀에 들어왔다.

귓전에 한숨처럼 떨어지는 음성이 혼잣말하듯 그에게 도달했다.

“제지당하고 있군요.”

옆에 앉은 자의 나른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르망은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팔오금 부분 옷감의 구겨짐이 어색합니다.”

그의 옆에 앉은 사람은 사신단에 수 주 앞서 요양을 핑계로 도착한 온느발레의 귀족이었다.

주요 귀족 가문의 가주도 아니고 방계에 불과한 사람이지만, 퍽 뛰어난 무인이었다. 아무래도 뮌제 로헤올이 이끌었던 루미나리에단에서 수많은 마법사와 마법 아티팩트를 상대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전에 이미 이 살롱에서 제이가 접근한 적이 있는 기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리오 왕이 저 왕자에게 사람을 붙인 건 확실한 모양입니다.”

“그렇군.”

제이가 이 자리에서 아르망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할 사람을 붙였으리라.

오늘 저 왕자는 아르망에게 어지간하면 말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지켜보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제지할 정도라면.

크게 귀찮지는 않겠다. 아르망은 짜증을 가라앉혔다.

왕이 설마 이 이상으로 절박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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