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6)화 (36/120)

# 35화

“결론은 어리광이지요. 왕자로 났으면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것들인데.”

뮤니르 자작이 한담하듯 가벼이 조소하였다.

뮌제가 공작가에서 장차 공작 될 장녀로 났기에 감수한 결핍이듯이.

아르망 그가 백작가에서 장차 백작 될 장남으로 났기에 감수한 결핍이듯이.

또, 수많은 가문에서 가문을 이어받지 못할 직계 자식들이 감수해야 하는 결핍이듯이.

저 왕자는 제가 난 지위를 생각하고 언행을 자제했어야 했다. 저희가 서 있는 곳은 정의를 한결같이 바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인간이 생겨서 권력이라는 게 이 세상에 태동한 첫날부터 그렇다.

따라서, 뮌제 로헤올이 잘못했다. 죽지 말았어야지. 죽은 자에게 화살 돌려 마땅한 잘못이다. 순순히 살해당한 것이 잘못이다.

아르망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참 미련한 사람이지.”

실로 생각하건대, 양측 모두 미련하다. 죽은 자도. 산 자도.

하지만 누굴 미련하다 한 건지 주어는 일부러 붙이지 않았다. 그건 뮤니르 자작과도 나눌 수 없는 속내였다. 타국의 사람이면 모를까 자국의 죽은 대귀족에 대해서는 혀를 삼가야 했다.

그러나 제이에 대하여는 자중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속국과 다름없는 왕국의 왕자를 사석에서 비웃는 것은 조금도 문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르망은 아티팩트를 가진 아리오인이 몸을 감추고 이 대화를 엿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대하여는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엿들어서 무얼 어찌하겠는가. 아리오인 주제에. 저희는 제국 온느발레의 귀족이다.

그 생각은 뮤니르 자작도 마찬가지라서 두 귀족은 큰 거리낌 없이 제이를 주제로 한 대화를 조금 더 이어 갔다.

안내받은 궁은 화려하였다.

* * *

탁. 턱.

백오십 년 전에 쓰인 책이 날아갔다. 문에 부딪힌 두꺼운 책이 떨어졌다.

사본도 없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서적은 펼쳐진 채로 널브러졌다. 바닥에 눌려 종잇장이 어찌 접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어느 부분은 부스러졌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위즈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제목을 그저 증오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악마들이 인세에 힘을 퍼뜨린 까닭에 대한 고찰》. 꾹 다문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악문 이가 갈리기 시작했다.

또.

또!

위즈는 고개를 쳐들었다. 익숙한 실망이 명치에서 뛴다. 속이 비었다. 두 손을 들어 온 얼굴을 짓누르듯 문질렀다. 양손 사이로 코만 우뚝 솟아 있었다.

서점의 고요함에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심화하는 것은 좌절이다.

“하으…….”

끓는 신음을 흘렸다.

손바닥에 한 번 덮였던 신음은 꿈틀꿈틀 허공에 퍼졌다. 위즈는 손을 내렸다. 그 손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로 향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끼북이나 사탕, 약초 따위만을 꺼내 보였던 작은 주머니였다. 그것을 꼭 쥐었다.

사는 이유. 잊어야 하는 이유. 잊을 수 없는 것.

격했던 감정은 전부, 아주 빠르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항상 웃어야 한다. 항상. 항상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위즈를 유지해야 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꺼풀이 올라갔다.

부석부석하게 마른 눈동자가 세상에 드러났다.

고개도 내려왔다.

위즈는 역사적 가치가 상당한 고서적을 조금도 존중치 않는 학자였다. 그녀가 존중하는 책이라곤 그녀에게 도움이 되는 내용을 가진 책뿐. 연구 목표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으니, 위즈에게 존중할 가치 없던 책이 가치 있게 변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저 책은 가치 없다.

존중해야 할 까닭이 없었다.

건조한 분노가 담긴 시선이 다시금 바닥에 떨어진 책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뱃속에서부터 억지로 힘을 끌어올렸다. 그 힘으로 위즈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외쳤다.

“이번 논문은 망했어! 망했다고!”

막 서점의 문을 열려 하던 다니엘의 손이 멈칫했다.

“내 인생은 망했어! 흐어엉! 왜 사냐! 살 가치도 없어! 짜증나! 바보! 멍청이! 죽어라! 얍!”

“…….”

안에서 들려오는 히스테리가 심상치 않았다. 위즈의 히스테리 자체를 처음 듣는데, 그 강도가 처음 겪는 그에게는 너무 세다. 왜일까. 지금 들어가면 평소보다도 뒷목 잡고 싶은 일이 많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음, 그래. 건강하게 살아 있으니 되었다. 엘르시어의 심부름으로 왔다는 사실은 잊기로 하였다.

가서 빌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싶었다. 들어가기 싫어서 안 들어간 게 아니라 못 들어간 겁니다…….

‘위즈 씨가 살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엘르시어가 당장에 쫓아올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엘르시어가 위즈에게 꽤 관심을 가지고 살피는 눈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바깥에 내어놓은 것처럼.

하여 그는 다른 변명을 이리저리 고민해 보았다.

‘위즈 씨가 인생이 망했다고 울부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다니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말하는 즉시 이쪽의 관절이 일방적으로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하다 결국엔 쓰러진 기사까지 한 명 나온 지금, 이렇게 말하면 옆에서 듣고 있던 부단장에게 새우 꺾기 당하고 말 것이다.

그는 손을 들어 입가를 더듬었다.

참신하고 획기적인 변명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들어가야겠지……. 그의 표정이 서글퍼졌다.

미니 일로 위즈에게 난폭하게 행동했던 그 새벽 이후, 다니엘은 위즈를 딱 두 번 만났고 두 번 다 멘탈이 털렸다. 평소와는 다른 의미로.

그는 결국 문을 열었다.

열지 말아야 했다.

“흐어어…….”

“…….”

“…….”

바닥에 드러누워서 파닥거리고 있던 위즈와 눈이 마주쳤다. 위즈의 칭얼거림이 뚝 멎었다. 그녀는 심각하게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당황했다. 설마하니 진짜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진짜 아이도 아니고! 바닥에 뾰족한 것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나. 다칠 수도 있었다. 휙 둘러본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어 퍽 깔끔해 보였지만 세세히 훑어보면 아닐 수도 있었다.

일단 부축하기 위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위즈는 홀로 후다닥 일어서서 치마를 털며 물었다.

“환영합니다. 손님이세요?”

그렇군. 아무렇지 않구나. 맞아. 민망함은 항상 보는 사람의 몫이었지.

크게 깨달은 다니엘은 해탈한 얼굴로 미소했다.

“책을 사러 온 것이 아닙니다. 무얼 좀 물어보러 왔습니다.”

“오……. 음?!”

위즈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눈동자 안에서 촛불이 넘실거리는 것 같이 시선이 일렁였다. 다니엘은 최대한 온후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걸 또 깨달았을까.

그러나 위즈는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미묘한 신음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음…….”

어디서 본 얼굴이라는 것까지 잊으면 오늘이야말로 다니엘이 혈압으로 기절하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 다니엘은 결국 자진하여 기었다.

“전에 당신을 새벽에…….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했던 사람입니다. 은여우단의 기사. 다니엘입니다.”

“…….”

위즈는 인상을 썼다.

은여우단이 무엇인지, 혹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혹은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리려 하는 모양이었다. 이 맥락 없는 기억 상실은 어찌 보면 기적이다. 그만큼이나 수상한 병임에는 틀림이 없는데도, 그녀를 향한 경계를 처음처럼 유지하며 윽박지르기보다는 이토록 적응해 버린 게 우스운 일이었다.

한참을 숙고하던 서점 주인은 우물우물 입술을 움직였다.

“그……. 은…….”

“…….”

“아, 그, 그, 다, 드, 디, 디, 디스크자키 씨……?”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떠올렸으면 됐다. 실은 제대로 떠올린 건지, 누굴 떠올린 건지도 그는 몰랐다. 그러나 열 중 열에 달하는 확률로 올바로 떠올렸으리라고 짐작했다. 지난 두 번, 위즈는 열심히 그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위즈는 조금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실로 정확히 떠올린 모양이었다. 눈을 번쩍 뜨더니 숨을 들이켰다. 순식간에 표정이 우울해진 위즈는 울먹거리며 사과했다.

“못 살려 드려서 죄송합니다…….”

“…….”

다니엘의 표정이 어정쩡해졌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 슬픔과 고통을 지금 전부 이겨 냈다고도 말하지 못한다. 하지만 위즈가 이럴 때면 그가 오히려 위즈에게 몹시 미안했다.

그날 위즈에게 화낼 게 아니었는데.

위즈가 이렇게 책임을 느낄 것도 아닌데.

오늘도 이렇게 그는 극심한 죄책감으로 멘탈이 털렸다. 다니엘은 목 입구까지 올라온 흐느낌을 누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했습니다.”

“…….”

위즈가 콧물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은 손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가 내렸다. 말을 돌려야 했다.

“위즈 씨. 어쨌든,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각오하고 왔는데도 순식간에 지쳤다.

“혹시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절시키는 아티팩트가 있습니까?”

“있지요. 많지요. 큽. 아실 텐데요.”

“예. 이것저것 찾아보긴 했는데 현장 유류품 중 들어맞는 게 없습니다. 벌써 현장이 다섯이 되었는데, 공통된 것도 없고요. 여기 목록입니다. 여기에 아티팩트로 추정되는 게 있는지 확인 부탁합니다.”

목록을 건네는 순간 위즈는 뒤로 휙 돌아섰다. 무시도 이런 개무시가 없었다. 얼떨떨해진 다니엘이 눈을 끔벅이고 있는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눈물 젖은 얼굴로 말했다.

“목록 주세요…….”

“…….”

방금 무시의 타이밍이 좀 엄청나지 않았나……?

어쩐지 떨떠름했다. 카운터로 다가가 목록을 건넸다. 손가락 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위즈는 쉰 장에 달하는 목록을 파라라라락 넘겼다.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표정은 진지한데 실제 행동은 지나치게 건성이다. 음. 그냥 한번 해 본 건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할 건가.

그런데 위즈는 눈꼬리를 내리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안타까워라.”

“한 장이라도 제대로 보고 말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위즈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정말 울 것 같다. 마음이 조금 다급해진 다니엘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합니다. 깜박했군요.”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본 광경이 충격적이라서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니엘은 상의 주머니를 털었다.

카운터에 사탕이 쌓이자, 위즈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 최종적으로는 그를 환영해줄 것을 안다. 이제 성의 있게 찾아 주리라. 다니엘은 익숙하게 기대했다. 위즈는 천천히 그를 올려다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 이리 해 줄 것을 알았다. 다니엘도 따라서 미소했다. 서점 주인은 말했다.

“환영, 환영, 환영합니다. 손님. 귀한 손님이 오셨네요! 하지만 책은 팔지 않습니다.”

“…….”

하지만 기억을 리셋할 줄은 몰랐지.

다니엘은 입을 가렸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

그 와중에 그의 비통함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신나게 입안에 사탕을 일곱 개를 털어 넣고 있는 호쾌함에 감동할락 말락 했다.

“그애어, 우왜애 와, 와앗다, 고오?”

금붕어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통역한 것 같이 애매했다. 그것도 엄청 대충 통역한 것 같이. 사탕을 입안에 저렇게 탑 쌓은 채로 저 정도로 잘 발음한 게 오히려 대단하다.

‘그래서 왜 왔다고요?’였으면 좋겠다. 그는 제 마음속의 바람에 따라 그렇게 이해하고 대답하기로 하였다.

“다섯 개 현장의 유류품 목록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일시적으로 기절시키는 아티팩트를 찾아 주면 고맙겠습니다.”

“오.”

“…….”

대답하는 순간 그 입에서 결국 사탕 하나가 튀어나왔다. 카운터 위를 또르르 굴러가는 사탕을 보다가 다니엘은 두 눈을 지그시 눌렀다.

빨리 끝내고 꺼지자.

그나마 그는 위즈가 기억을 리셋시키며, 그녀를 눈물짓게 만드는 기억까지도 삭제해 버렸음을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다니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면 위즈가 울 이유도 없었다. 위즈의 표정은 더는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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