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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5)화 (35/120)

# 34화

온느발레의 사신단이 아리오의 수도인 얼숍에 도착했다.

육 년 만에 귀국한 제이가 환호받으며 돌아왔던 길. 그 길 위에 원수 온느발레의 사신단이 있었다. 본심으론 차마 외칠 수 없는 환호였다. 그럼에도 아리오의 백성들은 강요받은 탄성을 외쳤다.

약자는 항상 아리오였다.

사신단이 보이는 오만함이 혁혁하여 누군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 쥐었다. 무슨 낯짝으로 아리오에 기어들어 와. 복중에 품은 계획이 있어 순순히 보내긴 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육 년간 아들을 빼앗겼던 왕의 원한이었다.

모국으로 돌아간 제이가 잘 도착했는지, 잘 지내는지 보고 인사하고 싶다는 명분이 우습다. 대국에서 소국을 향해 예의를 갖춘 명분이라서 오히려 더 우스워. 눈 가리고 아웅 하기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바닥이 이 정치판이라지만.

“…….”

제이는 발롬브로사의 뒷모습을 힐끔 보았다.

막상 사신단이 방문하는 명분이 된 제이는 그리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뮌제 생전에만 해도 온느발레에 그리 악의를 가지지 않기도 했었고, 지금은 죽음도 각오했다. 어서 저들에게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왕궁 안. 세 기사단이 사열한 가운데 사신단이 걸어 들어왔다.

제이는 눈을 깜박였다. 부루퉁해진 아이처럼 꾹 다문 입이 조금 비죽거렸다. 날 보러 오는 거라며? 어찌 된 게 싫은 작자들만 왔다. 이런 이유로 싫고, 저런 이유로 싫은. 황제와 윌리엄 로헤올까지 오면 완성이겠다.

분명 황제가 노린 인사일 터. 그 젊은 황제는 참으로 쓸데없게 유능하고 날카로웠다.

사신단 대표인 아르망 페레이라는 발롬브로사 앞에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뵈옵고, 황제께서 보내셨고, 어쩌고, 저쩌고. 잘 왔고, 편히 지내다 가고, 어쩌고, 저쩌고. 온느발레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가 제이의 귀에 도착하자마자 흘러나갔다. 아주 매끄러운 흐름이었다. 좀 만만한 이가 있나 하여 사신단 전면에 서 있는 요인들을 훑어보는 눈에만 집중력이 가득했다.

왕과의 인사를 마치고 지루해 보이는 왕자를 본 페레이라 백작이 호의 가득한 웃음을 빙그레 보였다.

“제이 왕자. 격조하였습니다. 건강한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서늘한 긴장이 생겼다.

발롬브로사와 몇몇 사람들의 고개가 제이를 향해 돌아갔다. 충격을 받은 눈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제국의 백작이라고 해도 왕국의 왕자를 존칭 없이 부르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제이는 그 어중간한 경대가 익숙했다. 젊은 왕자는 웃으며 대꾸했다.

“오랜만입니다. 몇 번 말한 적 있는데, 로헤올 전 공작이 죽었다고 어찌 이리 대번에 바뀔 수 있는지 궁금하다니까요.”

그 뼈 있는 말에 백작은 미소했다.

뮌제가 살아 있을 때는 제이는 왕자로서 제대로 대접받았다. 로헤올 공작이 예의를 갖추니 다른 중앙 귀족들도 굽히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 로헤올 공작은 제이에 대한 예우를 조금씩 거두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제이의 평판을 보호하는 일 역시 없었다. 그저 목숨과 생활만을 적당하게 보장했다.

윌리엄 로헤올이 보이는 그 태도야말로 제이가 본디 받아야 했던 대우였다.

직접적으로 ‘볼모’라는 단어로 왕자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기실 볼모와 다름없었다. 온느발레에 도착했던 처음부터 그랬다. 아리오에서 마땅히 왕자로서 받던 대우 전부를 온느발레에 와서까지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사 년간 분에 넘치게 정중히 예우받을 수 있었던 건 죽은 로헤올 공작 덕분이었다. 오히려 윌리엄 로헤올이 적정한 수준에서 제이를 대했다고 할 수 있었다.

페레이라 백작도 제이도 그걸 안다. 그러나 페레이라 백작은 굳이 받아쳐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실례하였습니다. 이곳은 아리오지요. 로드.”

백작은 대단히 자연스럽게 선뜻 말을 고쳤다. 그 때문에 오히려 일부러 ‘제이 왕자’ 따위로 불렀다는 느낌이 역력히 드러났다.

온느발레에서 아리오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겠다. 평소 제이를 적대하던 형제자매들마저 기분이 상한 가운데, 이 자리에서 기분이 멀쩡한 사람은 제이뿐이었다.

“그러게요. 놀랍게도 아리오네. 어어, 혹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정신이라도 잃고 있었습니까? 아리오인 걸 이제야 알았다니 저도 걱정이 되어서.”

“…….”

나이스 샷.

서 있던 아리오 관계자들은 하마터면 경건하게 박수를 칠 뻔했다. 제이의 유들유들한 성격이 이렇게 발휘되면 아주 고맙다. 평소에는 아리오인의 혈압을 올리더니, 그렇지, 이렇게 온느발레도 약 올려 주고 해야지.

발롬브로사는 온느발레에서 꽤 뻔뻔하게 살았을 제이를 마침내 선연하게 상상하는 중이었다.

은여우단의 기사가 로헤올 전 공작에게 붙잡혔던 이후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저 패기 보게. ……저러니 저 미친 자식이 온느발레에서 로헤올 전 공작의 죽음을 캐고 다녔지.

갑작스럽게 부글부글 끓는 마음 삼분지 일, 통쾌한 마음 삼분지 이로 갈렸다. 발롬브로사는 애매한 마음을 안고 기꺼이 수습에 나섰다.

“왕자. 아무리 온느발레에서 가깝게 지낸 사이라 하더라도 그리 무례한 말을 하면 아니 됨을 모르나. 사신으로 온 사람이다.”

가깝게 지낸 적 없다. 그러나 포장하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이런 데서 쿵짝 잘 맞는 제이는 크게 동요하지 않고 슬픈 얼굴을 하며 말했다.

“아니, 전 염려가 되어서. 괜찮습니까, 백작? 어디 아프면 큰일입니다. 당신이 아프면 제 마음도 아픕니다.”

“…….”

발롬브로사는 ‘내 아들이지만 진짜 얄밉다’고 생각했다.

아리오 왕실 일원 중 깐족거림으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던 제이다. 그 사실을 굳이 온느발레에 가서까지 전파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한다. 더해라.’

그야말로 부전자전의 훌륭한 표본이었다.

제이의 그 성격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발롬브로사는 제이가 최선을 다해 긁어 주길 바라며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물론 얼굴에는 난처한 것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표정을 그렸다.

그리고 부왕의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였던 탓에, 그 기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싫기로는 아르망 페레이라보다 부왕인 발롬브로사가 더 싫다. 고개까지 돌려 버렸다.

청개구리가 따로 없는 작태에 발롬브로사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아르망은 아슬아슬한 제이의 발언을 들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었다.

사신의 표정을 살핀 발롬브로사는 애써 미소하며 입을 열었다.

“왕자가 실례가 많소. 음, 일단 짐을 풀고, 좀 쉬시오. 이야기는 그 후에 하도록 하지.”

“아. 감사합니다.”

아르망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 백작, 마음 넓은 사람이 결코 아닐 터인데.

이 남자가 사신단 대표로 온다는 걸 듣고 모은 정보로는 그랬다. 조금도 기분 상하지 않았다는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발롬브로사는 내색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제이 저놈 자식도 데려오라고 시종장에게 손짓하는 걸 잊지 않았다. 뮌제 로헤올과 관련하여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당부를 해 두어야 했다.

엘르시어는 손짓하는 왕의 표정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왕이 자리를 뜨고 제이도 끌려가자, 나와 있던 왕비와 왕자, 공주들이 저마다 흩어지기 시작했다.

안내하는 아리오의 시종과 기사들을 앞세워 걸어가던 아르망은 뒤를 돌아보듯 힐끗 고개를 옆으로 했다. 그의 단정한 입매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저 왕자와 왕이 사이좋지 않다는 게 사실이었나 보군.”

그러자 그의 왼편에 있던 뮤니르 자작이 피식 웃었다.

“그 성질을 해서는 사이좋을 수가 없겠지요. 아무리 부왕이라 해도 자기를 온느발레로 순순히 보낸 사람인데요.”

“그러니 그 공작을 잊지 못하고 저리 천방지축으로 구는 거고.”

조소의 편린도 없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정치적인 사람이었는지 깨닫지를 못하니 실로 미련한 왕자다. 설마 그 뮌제 로헤올이 아무 의미 없이 아리오의 볼모인 왕자를 그토록 잘 보살폈으려고.

감정에 목말라 있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으면 어떤 참담한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뮤니르 자작은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비치는 햇빛을 손 그늘로 잠시 막았다. 겨우 수 초의 그늘이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든 분위기든 무언가가 나아진 것처럼 느껴져서, 이마를 훑듯 손을 내렸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손자까지 둔 중년 귀족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행복하지만, 제이의 마음을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어릴 적이 있었던 탓이다.

자작은 한숨처럼 말했다.

“결핍된 인생길을 걷는 사람이 왕자 혼자는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한순간이라도 결핍에서 벗어난 적 있느냐 하는 문제겠지. 한 번 맛보니 잊지를 못하겠는 게 아닐까.”

아르망은 웃음기 어린 음성으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저 왕자는 제게 첫 보호를 준 뮌제 로헤올이 저와 같이 결핍되어 있던 자인 걸 알까.

뮌제 로헤올이 아직 공작이 아니었을 때. 몸 약한 탓에 사교 활동을 아주 가끔 하였던 윌리엄 로헤올이 살롱에 나오는 날이면, 두 남매의 부친인 당시 공작은 윌리엄을 어떤 눈으로 보았던가.

윌리엄 로헤올이 연회에 참석하던 날이면, 두 남매의 모친인 당시 공작 부인은 윌리엄을 어떤 눈으로 보았던가.

관심 가지고 보다 보면 알 수밖에 없는 차이였다.

사교계에서 보이면 안 될 모습이었다는 건 당시 공작 부부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 공작도 어지간히 칼 같았어야지. 분명 감정을 자제하고 숨기려 노력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눈치챌 만큼 그들은 윌리엄을 애지중지했다. 윌리엄에 대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윌리엄 로헤올에게 그들 부모의 애정과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데, 뮌제 로헤올은 그럼 어떠했는가.

아르망은 자작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픽 웃었다.

요절한 부모로부터 사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뮌제는 윌리엄을 아꼈다.

설령 그녀가 혼인하여 제 새끼를 낳았어도 그렇게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윌리엄이 한 번 사교 활동을 나서면 그를 보는 뮌제의 눈에서는 사랑이 넘치다 못해 흘러 떨어졌다. 어쩌면 그들의 부모보다도 더 진득진득한 애정이었다.

그쯤 되니 그들의 부친이 생전에 보였던 윌리엄을 향한 사랑이 더 나을 정도였었다.

뮌제 로헤올은 제 약점이 윌리엄 로헤올임을 숨기지 않았다.

숨기지를 못했다.

윌리엄이 수도 광장에서 하마터면 칼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또 그때가 하필이면 뮌제가 루미나리에단 일과 모종의 일로 수 달을 혹독하게 움직이던 때였다. 누가 보아도 뮌제 로헤올은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지독하게 지친 탓에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비밀로 퍼져 있었을 정도였다.

뮌제 로헤올 전 공작은 황제를 알현하고 귀가하는 길에 윌리엄의 위험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몸으로 뛰었다. 항시 냉철하던 그녀가 무기를 들 생각도 못 하고 제 몸으로 칼을 막아섰다. 미친 일이었다.

그리하여 뮌제는 그날 죽을 뻔했다.

언제 온 건지도 알 수 없게 어느 순간 나타난 라파엘 에흐베가 잔당을 제압하지 않았다면, 뮌제는 여러 번 찔리고 베였으리라.

그때의 그 상황을 목도한 수많은 이가 충격을 받았다.

윌리엄은 그야말로 뮌제가 제 목숨을 불살라 지키려 했던 동생이었다.

그럼 그녀가 그리 애지중지하던 그 동생은 그 애정을 그녀에게 되돌려 주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현실 같지 않던 애정을 권좌를 쥐기 위한 살해로 갚았다. 어쩌면 그녀가 윌리엄을 지키다 죽을 뻔했던 일도 실은 윌리엄이 꾸민 살해 미수가 아닌가 싶었다.

하여 아르망은 감히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받지 못했던 걸 남에게 주고 있던 뮌제 로헤올의 속을, 저 왕자는 생각해본 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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