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거기까지 도달하자마자 그의 손끝이 싸늘하게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역시 너 아리오에 있어? 그때 어떤 새벽에 내 것에 닿았던 생명이 정말 너였어? 아리오에 사신을 보낸다니 불안해져서 이렇게 대공을 움직이는 거야? 역시 그래? 그럼, 그럼, 넌 사신과 마주칠 수 있는 곳에 있는 건가? 아리오 왕궁에 있어, 혹시? 아리오 왕실이 널 숨겨 주고 있어?
악마가 삼킨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이 환희가 찬란하여 숨을 쉴 수가 없다. 이 두려움이 확연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 밤에 견딜 수도 없게 이 무슨 기쁜 가정인가. 숨이 가빠졌다. 윌리엄은 제게 가장 의미 있는 사람이 뮌제임을 이 순간 확인하고 확인했다. 활기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공포 반, 설렘 반이다.
그리고 그에게 시간이 생기면 생길수록 설렘이 공포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있다는 건 그가 그만큼 강해진다는 뜻이므로.
강해진 그의 앞에 뮌제가 서면 완벽하다.
황홀한 상상에 푹 빠져 있던 윌리엄은 실내화 신은 발로 주춤, 자세를 고치고 다시 섰다. 그는 악마가 속살거리듯 달콤하게 물었다.
“너. 뮌제와 연락하고 있어?”
정말 살아 있으면 좋겠어. 너무도 황홀하여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가설들도 훑어보아야 했다. 그런데도 긴장에 겨워했던 몸이 가벼워졌다.
그의 물음을 들은 라파엘 에흐베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가시는 걸 보는데도 크게 두렵지가 않았다.
뮌제 로헤올은 그에게는 그야말로 만병통치약과도 같았다. 혹시 죽어 가는 일이 있어도 뮌제 로헤올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를 쓰고 살아 일어나야지. 이 깊고 짙은 원한을 아는 이가 윌리엄과 뮌제, 둘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라파엘 에흐베조차 모르는 둘만의 원한이었다.
그때 라파엘이 입을 열었다.
“이해를 못했군, 공작.”
환희로 끓고 있던 윌리엄은 순식간에 식었다. 정확히는, 정신을 차렸다. 얼음물을 맞은 것처럼 번뜩.
라파엘이 몸소 들고 있는 촛대의 촛불이 천천히 흔들렸다.
대공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 주홍 불빛에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 속에 들어 있는 윌리엄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환희에 젖은 그 얼굴을 담고 있는 연회색 눈동자는 부드럽고, 시퍼렇고, 적막했다. 에흐베 대공은 조금은 부드럽게 들리는 어조로 다시 말했다.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윌리엄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조심.
조심하라.
[너, 뮌제와 연락하고 있어?]
조심하라.
“푸흐…….”
윌리엄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뮌제와 관련해서 허튼짓 말라고 경고하는 건가.
“뮌제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군. 대공. 그렇지?”
“…….”
“네가 날 해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야. 아니 그런가? 내가 윌리엄이라서. 뮌제가 아끼던 윌리엄이라서. 살아 있는 뮌제가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네게 노할까 봐. 그렇지?”
라파엘의 표정이 묘해졌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윌리엄을 가소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히. 심사가 꼬인 윌리엄은 쿡쿡 웃었다.
“대공. 내게 경고하겠다고 친히 오셨으니 내가 한 가지 알려 드릴까.”
그렇게 말한 윌리엄은 주먹 쥔 오른손을 허벅지 옆으로 조금 들더니 손을 풀었다. 무언가를 놓아 떨어뜨리는 시늉이었다. 손을 편 그대로 그는 말했다.
“날 보더니 뮌제가 이랬어.”
라파엘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래서 윌리엄은 빙긋 웃었다.
“검을 놨어.”
“…….”
“그리고 폭발에 휘말려서 죽었어. 자기를 살려 달라는 말도 없었고, 기사들을 살려 달라는 말도 없이. 그렇게 순순히 죽었어. 왜냐하면, 나니까.”
조금 전까지 뮌제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기뻐하던 자는 오로지 라파엘을 도발하기 위해 뮌제의 죽음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라파엘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왜냐하면, 나니까.’를 들은 직후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가장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수많은 책을 잠시 보다가, 그쪽으로 촛대를 기울였다.
대공은 주홍 그림자가 일렁이는 책 제목을 눈에 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뮌제는 확실히 죽었다고, 내가 뮌제를 죽였다고 도발하였던 윌리엄은 어리벙벙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대공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래서 로헤올 공작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어?”
“뮌제 그 사람이 그렇게 순순히 당했다면 공작이 그 자리에 있었겠지요.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
“공작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뮌제는 설령 그곳에서 공작의 편지를 받았어도 그리 순순히는 당해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 말을 하는 라파엘은 담담해 보였다.
도발에 응해 주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윌리엄을 은근하게 도발했다. 윌리엄은 웃는 얼굴로 눈을 찡그렸다.
“그걸 어떻게 알아.”
“뮌제니까.”
“…….”
“그리고, 나니까. 공작.”
꽤 오랜 시간 촛불 가까이에 있었던 책이 조금씩 검게 물들어 갔다.
뮌제니까. 라파엘이니까. 윌리엄의 ‘나니까 뮌제가 죽어 줬다’에 차분하게 대항하는 그 말은, 그 자체로 어딘가 기품이 있었고 무거웠다.
그 순간 뮌제가 모아 왔던 책 중 한 권에 불이 붙었다. 뮌제의 흔적에 불이 붙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에흐베 대공은 그 불붙은 책을 꺼내 들었다.
“뮌제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이 구겨서 버린 쪽지를 기억합니까?”
그는 그 책을 윌리엄에게 보이듯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윌리엄의 발치에 툭 던졌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서 공작을 아직 두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남긴 그 한 문장 때문에.”
“…….”
“공작의 말대로, 나는 뮌제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공작이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공작 역시 뮌제의 생존을 아예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군요.”
“…….”
윌리엄은 조금씩 제 슬리퍼로 옮겨붙는 불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머리를 바라보며 에흐베 대공은 부드럽게 말했다.
“난 뮌제의 세상에 공작이 없기를 바라고, 로헤올도 온느발레도 없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렇게 만들어도 뮌제는 내게 화내지 않을 겁니다.”
윌리엄의 눈길이 올라왔다.
“그리고 설령 뮌제가 날 싫어하게 된다 한들 상관없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뮌제가 죽는 겁니다.”
“…….”
“아리오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2년 반. 라파엘은 조용히 움직여 왔을 것이다.
이제 와서 윌리엄에게 이리 알리는 까닭을 정확히는 알지 못하겠지만, 분명 음험한 꿍꿍이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 작은 불씨를 놓는 손길에 약간의 주저도 없었음을 윌리엄은 똑똑히 목격했다.
지금은 작지만, 끄지 않으면 점점 커져서 로헤올 저택 본관을 전소시킬지도 몰랐다. 그런 잠재력을 가진 작은 불씨를 라파엘 에흐베는 제 손으로 로헤올 저택 바닥에 떨어뜨렸다.
……뮌제의 앞에서만 온화한 미친 새끼.
오로지 뮌제만이 약점인 미친놈.
윌리엄의 슬리퍼가 빠르게 타들어가고 있는데도 라파엘에게서는 염려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윌리엄의 턱근육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죽일 수 있으니 몸 사리라는 경고를 이렇게 하는 건가.
이를 사리문 공작을 잠시 보고 있던 대공은 그에게로 세 걸음 다가갔다.
에흐베 대공은 활활 타오르는 슬리퍼의 둥근 앞코를 구둣발로 지그시 밟으며, 윌리엄에게 촛대를 쥐어 주었다. 겨우 밟는 정도로는 꺼지지 않을 불이었다. 바짓단에도 슬슬 옮겨붙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나 애초에 꺼 주기 위해 밟은 게 아니었으므로 대공은 그대로 공작을 지나쳤다.
윌리엄이 돌아보기 전에 에흐베 대공의 모습은 사라졌다.
“…….”
몸을 돌려 빈 곳을 잠깐 본 윌리엄은 다시 앞을 보았다.
슬리퍼를 벗고 불에서 물러났다. 바지 끝에 조금 옮겨붙은 불은 아직 작았기 때문에 툭툭 치자 꺼졌다.
몸을 세운 공작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집무실이었다.
2년 6개월 정도. 뮌제가 죽은 지 그 정도. 뮌제를 죽인 이후로 벌써 그 정도.
그 시간이 흐르도록 이곳엔 아직 뮌제의 흔적이 가득했다.
뮌제가 살아생전 절박하게 수집한 수많은 서적들의 일부. 뮌제가 집무를 보았던 마호가니 책상. 뮌제가 즐겨 쓰던 필기구.
그리고 심지어, 뮌제가 늘 책상 서랍에 두었던 단검. 뮌제 로헤올이 그를 죽이고자 하였을 때 썼던 그 단검까지도 아직 이 집무실에 있었다.
뮌제를 죽인 자가 뮌제를 지우지 않고 있다니 사실 굉장히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빌. 들리거든 명심해. 부디 내 이 죽음에 슬퍼하지 말고 끝까지 버텨. 넌 이겨낼 수 있어. 반드시 그럴 거야.]
“…….”
그는 라파엘이 뒤늦게 발견하여 불을 붙인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무슨 책인지 알고 있었다. 제이 왕자가 뮌제가 남긴 협지를 찾아냈던 책. 라파엘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랑해. 윌리엄. 모든 게 미안해. 내가 죽더라도 꼭 되돌릴게.
공작은 점점 커지고 넓어지는 불이 바닥을 기어가는 걸 조금 더 지켜보다가, 손에서 힘을 풀었다. 퍽. 무거운 촛대가 바닥에 쓰러졌다. 떨어지며 맞은 바람에도 살아남은 촛불 하나가 불을 보태기 시작했다.
그는 말없이 집무실을 나왔다.
밤중이라 발견이 늦을 것이다. 자칫하면 큰일로 번질 불을 뒤에 두고 윌리엄은 정말 자리를 떠났다.
침실로 돌아온 그는 문득 가슴께에 왼손을 올렸다.
손이 옷을 끌고 스르르 내려갔다. 복부에 도달했다. 손이 또 움직였다. 이번에는 목을 감쌌다.
다 급소였다.
뮌제 로헤올에게 자비 없이 공격당했던 급소들.
한 손으로 목을 감싼 채로 윌리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뮌제 로헤올. 그 쥐방울만한 어린 새끼는 그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날’의 그녀는 정말 강했었다. 소녀는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으로 그를 죽이려 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더라.
그는 졌지만 이겼었다.
분명 그가 이겼다.
그의 흰 것에 닿아 왔던 뮌제 특유의 느낌을 생각하며 그는 다시 웃었다. 너여야 해. 너여야만 해. 그래서 아리오에 본격적으로 선물을 주는 거잖아, 내가.
널 찾아내려고.
지금까지는 사람들을 죽여 힘을 보충하고자 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뮌제를 찾아내려고.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불이라고 외치는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건물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자인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일찍 발견했네.
밤하늘을 배경으로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다가, 윌리엄은 소리 없이 미소했다.
그것은 뮌제가 사랑하는 미소였다. 사랑해야 했던, 미소이기도 했다. 죄책감과 죄악감에 잠긴 그녀가 사랑해야 했던 미소.
만일 뮌제가 정말 살아 있어서,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는 먼저 웃으려 한다.
윌리엄은 아주 조금 궁금했다. 이렇게 평소처럼 웃으면 뮌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손을 놓을까. 그의 미소를 잠시 보다가 결국 순순히 폭사당하려 했던 그날처럼 모든 무기를 내려놓을까. 내 누이. 내 사랑하는 누이…….
웃는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혼이 뒤흔들리는 느낌이 넘실거렸다. 목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간절한 부름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윌리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더 깊게 웃었다.
조소였다.
멍청한 윌리엄 로헤올. 포기를 못 하지.
눈물은 그의 힘으로 바로 멈추었다.
누군가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불이 났다 보고하는 음성을 듣고, 공작은 목에서 손을 거두었다.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그는 충혈된 눈으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