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서점에서 흑막 바보로 살아남기 (33)화 (33/120)

# 32화

위즈가 보내는 암호를 해석하고 연구실에서 나오면 지나가던 학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와 묻는다.

[으아니, 그 얼굴은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늙어 계십니까! 으아니, 이것은 눈물! 눈물까지! 도대체 누가! 무슨 일이!]

그럼 탑주는 감탄하며 죽은 눈으로 학자를 보았다. 왜 이렇게 우리 중앙탑의 박사들은 눈치를 말아 먹었을까. 이렇게 눈치 없이 제 갈 길 가는 학자들마저 빌게 만드는 위즈는 더 대단했다. 탑에 머물던 6개월 만에 중앙탑의 전설이 되어 버린 전설. 아니, 6개월도 아니었다. 쉬이 움직이지도 못하고 누워서 요양해야 했던 두 달 정도를 빼면 네 달 만에 전설이 된 것이다. 참으로 대단했다. 그러니 천재지. 하늘이 내린 재앙.

[자네 얼굴이 그렇게 된 이유와 같네.]

[위즈 박사군요.]

단번에 알아차린 학자는 잽싸게 도망친다.

일상이었다. 그렇지. 모든 게 위즈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정을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저보다 덜 똑똑한 위즈가 보낸 암호 때문에 쩔쩔매고 있다는 걸 토설하는 게 아닌가.

가자마자 혈압약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오늘 밤은 베개를 안고 눈물로 지새우겠지. 별을 보며,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리다 통곡할 것이다. 하고픈 말도 못하는 더러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는 탑주에게 여러 번 당했던 발롬브로사가 들으면 이번엔 그가 밤잠 이루지 못할 생각이었다.

위즈는 금방 헤실헤실 대답했다.

“네. 다 했습니다.”

“예. 그럼 저도 다 했으니 제발 한동안은 연락하지 맙시다.”

탑주의 고통을 제 행복으로 아는 위즈에게는 씨알도 들어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모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탑주가 텔레포트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를 꺼내는 걸 보던 위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런데.”

립스틱을 손에 든 탑주가 고개를 들었다. 위즈는 웃으며 엄지로 옆을 가리켰다.

“저기, 들르지 않고 가십니까?”

탑주는 반사적으로 옷을 쥐어짜듯 잡았다. 탑주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제는 소름이 온몸을 덮었다.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위즈가 지금 가리키는 곳은 막힌 벽이지만, 최종적으로는 위즈의 서점 옆옆집 건물이었다. 지난 2년 반. 위즈는 여태 전혀 묻지 않았고 전혀 권유한 적 없었다.

제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탑주는 끈적끈적한 침을 삼켰다.

이번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구나.

정말 흔들렸던 거다, 이 사람.

“그, 러지 않으셔도…….”

“예?”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얼떨떨한 표정을 하는 위즈에게, 탑주는 배에 힘을 주고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마비된 것 같다.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탑주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습니까. 정치 쪽은 저는 정말 잘 몰라서요.”

평소 짓궂은 농담을 하던 순진한 음성과 다르지 않았다.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게 부끄럽다는 듯이 멋쩍은 얼굴로 목을 더듬기까지 했다. 콘셉트의 일환이겠지만, 그에게는 누군가의 목숨 쥔 자의 손 움직임 같이 보였다.

노인은 떨리는 얼굴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아. 그렇지. 모처럼 오셨는데 뭔가 필요한 책이 있으면 가져가실래요?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새 책도 왔겠다, 기분이 좋습니다!”

“괜찮습니다. 저, 저기, 그 아이…….”

“피트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쾌활하게 오는 대답에 탑주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약점이라면 이렇게라도 살아 있는 편이 나았다. 수틀리는 순간 그를 모르는 그의 손자는 목숨을 잃을 것이다.

“다행입니다.”

“음식을 참 맛있게 합니다. 왜인지 이 자식 또 왔다고 매일 우는 것 같긴 한데.”

다른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여기서 무어라고 딴지를 걸 배짱이 그에겐 없었다.

탑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완전히 끝난 것 같아서 립스틱을 올리는데 위즈는 또 물었다.

“그런데 탑주님은 마법사가 마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우 놀랐습니다. 지금 빨리 돌아가서 조사해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한테는 더 묻지 않으시네요.”

“물으면 대답해 주실 겁니까?”

그가 묻자 위즈가 하하 웃었다.

그럼 그렇지. 엘르시어 클리포드와 한 대화의 주된 용건이 그것이었는데, 그 대화를 끝내고 상태 나쁘게 앉아 있었지 않은가. 물어봐서는 아니 된다는 걸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니고 뭔가.

이제 그만 떠나려는 그를 위즈는 또 잡았다.

“그럼 아까 그 사람의 말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까 은여우단 단장이 물은 것이라면. 후천적으로 마법과 관련한 능력이 발현된 경우는 들어본 적 없고요. 혈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더더욱 들은 적 없고.”

“역시 그렇겠지요. 그거, 누가 누구에게 둘러대느라 대충 지어낸 이름이거든요. 딱 한 사람에게만 말한 이름이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약속을 받아 두기도 했던 이름이지요.”

“……그런데 그 단장은 그걸 어떻게?”

“그 사람이 저 단장에게 말했나 보죠.”

“그런데 그거…….”

엘르시어는 뮌제 로헤올에 대해서도 물었었다.

거기에서 유추해 볼 때, 그 혈이라는 것에 대해 뮌제 로헤올이 그 ‘딱 한 사람’에게 말한 듯싶었다.

탑주의 은근한 질문에 위즈는 어정쩡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한숨 같은 웃음이었다. 전 공작이 말한 적 없다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대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아리송해하는 노인에게 위즈는 놀리듯 덧붙였다.

“어쨌든 고인이 들으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만.”

“…….”

“하여간 안녕히 가세요. 곧 또 뵈어요!”

그 인사를 기다렸다. 탑주는 이미 텔레포트를 위해 립스틱을 바르는 중이었다. 그걸 보고 있던 위즈가 멍하게 감탄했다.

“일레인 그 마법사도 참 취향 특이합니다. 평범하게 만들어도 좋을 텐데.”

텔레포트하며 탑주는 기어이 울컥했다. 그에게 있어 일레인은 아련한 옛사랑이자 절친한 친구다. 표정 험악해진 그를 위즈는 짓궂게 웃으며 배웅했다.

연구실에 도착한 노인은 연락이 닿은 지 오래된 마법사를 떠올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탑 소속의 학자이기도 한 일레인은 그가 부탁한 아티팩트를 웬만하면 제공해 주는 좋은 친구지만, 연락에 대해서는 여타 마법사들과 다르지 않게 자유로웠다.

“아, 그래도 좀 연락은 가끔이라도 줘도 좋잖은가.”

이렇게 멘탈 털리는 날에는 더욱 간절한 친구였다. 그녀의 명철하게 새파란 눈동자를 떠올린 그는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휴지로 입술을 지우는 건 잊지 않았다. 화장한 채로 오래 있으면 피부 나빠진다.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난 그즈음, 모처럼 희귀 책을 받아 낼 기회를 스스로 버린 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아니, 그때는 정말 무서워서 정신이 없었지만. 그렇지만. 야, 이 멍청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걸 놓쳐.

노인은 정말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위장이 아팠다.

* * *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가주의 집무실을 보호하는 문은 결코 조용히 움직일 수 없다. 알고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더욱 크게 들린 소리를 뒤로 하고 라파엘은 차분하게 책장으로 다가갔다.

찾아야 할 것은 명확했다. 목표가 분명하니 쓸데없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도서실에 없었으니 이곳 책장에 있어야 했다.

들고 있던 작은 촛대를 책장 근처로 기울였다. 최소한의 불이 비치자, 그는 빈 손끝으로 훑어가며 천천히 책을 찾았다.

침착하게 책을 찾아 가던 대공은 어느 순간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물러서십시오.”

그의 목을 꺾고자 접근하는 두 손의 주인을 향한 경고였다.

그러나 접근은 멈추지 않았다.

라파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책등만 눈에 담아 갔다. 무장하지 않은 그를 바로 앞에 두고, 윌리엄은 멈춰 섰다. 그의 자의가 아니었다. 오금이 떨릴 정도로 차가운 의지가 윌리엄을 묶었다. 아마도 살의였다.

공작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애써 헛웃음을 흘렸다. 뮌제가 한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던 게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때도 그녀는 이토록 물 흐르듯 사람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었다.

“여긴 로헤올 저택입니다. 대공 전하. 침입자가 할 말이 아닌 듯한데.”

“…….”

라파엘은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눈길을 움직였다.

그 단정한 뒷모습을 보던 윌리엄이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로헤올 공작은 한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나이트가운을 신경질적으로 끌어올렸다. 에흐베 대공을 죽이고자 다가갈 때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는 라파엘이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따랐다.

대공은 이십 분 걸려 집무실에 있는 책장을 모두 둘러본 뒤에야, 비로소 윌리엄에게로 몸을 돌렸다. 입을 열었다.

“이 저택에서 그 사람의 책을 반출한 적이 있습니까.”

시간 탓인지 조금 잠긴 음성이었다. 질문을 들은 윌리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새삼스럽게 옆의 책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라파엘을 보았다. 뭐야, 이거. 공작은 웃었다.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있으면?”

“…….”

윌리엄은 대답 없는 라파엘을 보며 혀를 찼다.

라파엘이 뛰어난 무인이라 오감이 예민하여 윌리엄의 기척을 비교적 쉽게 잡아낸 것도 맞다. 그러나 윌리엄 그 자신도 문제였던 게, 그는 이처럼 비밀리에 숨죽이고 다가간 경험이 별로 없었다. 기척을 다 내면서 다가가도 결국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기술이나 육체 기술보다는 요술이 훨씬 익숙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럴 힘이 없었다. 본디 윌리엄의 육신이 꽤 병약하기도 했고.

윌리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일에 철저하기로는 뮌제나 라파엘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윌리엄 그에 대해서만 다를 뿐.

그래서 뮌제가 당한 것이다. 뮌제도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죽임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뮌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라파엘이 이리 허술하게 움직일 리가 없었다. 라파엘 에흐베는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다. 이는 일종의 신뢰였다. 그 신뢰를 근거로 윌리엄은 라파엘에 대한 경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윌리엄은 이어 물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게 뒤지고 나갈 수도 있었던 듯한데, 어째서 기척을 낸 거지?”

“…….”

“왜 이제 와서 여길 뒤지고.”

그러자 라파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내내 무감하던 수려한 얼굴에 옅은 감정이 발렸다. 대공은 대답해 주었다.

“얼마 전 그대가 내게 무얼 기억나게 했습니다.”

대공을 향한 존중은 집어치운 윌리엄과 다르게, 라파엘은 여전히 로헤올 공작에게 전처럼 예의가 있었다.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 윌리엄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 상태로도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미소로 가면을 뒤집어쓰는 건 그의 오랜 버릇이었고, 오래되어 단단해진 방패였다. 공작은 그대로 되물었다.

“무얼.”

“공작.”

라파엘은 아직 잠겨 있는 목소리로 윌리엄을 불렀다. 윌리엄이 주도하려던 문답의 흐름이 간단하게 끊겼다.

뮌제가 이 저택에 있을 때 윌리엄에게 그랬던 것처럼, 라파엘은 퍽 부드럽게 말했다.

“아리오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윌리엄은 미소한 얼굴로 대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목덜미가 축축했다.

참 웃기게도, 머리가 조금 멍해지는 것도 같았다. 머릿속의 모든 핏줄이 곤두섰다가 풀리는 것처럼 아찔해지더니.

공작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새벽에 왜 이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또 꿀 수 있으려나. 뮌제가 그의 앞에서 무너져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리는 꿈이었……지.

그 순간 그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조금 뿌옇게 안개가 꼈던 악한 머릿속도 다시 선명해졌다.

뮌제 로헤올? 뮌제 로헤올과 연락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아니면 이번에 새롭게 접근해서 연락을 시작했던 걸까? 너, 역시 살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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